고독한 사이보그의 요리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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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21 03:23
최근연재일 :
2019.03.14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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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21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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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빵이 먹고 싶어 (1)

DUMMY

세상은 무료하다. 그리고 위험하다.


태어난 지 한 달째에 접어든 나의 소감이다. 카인의 지시에 멋모르고 열흘 내내 청소를 했던 지난날이 차라리 그리울 지경이다. 150년 동안 쌓였다는 먼지를 닦아낼 때는 묘한 쾌감마저 느꼈었다.


그 뒤로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있다. 청소를 하던 중 발견한 책을 읽다가 배가 고프면 알약 몇 개를 집어먹고, 가끔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문을 열어 고개를 빼꼼 내민 채 바깥을 살펴보다가 자리로 돌아와 다시 책을 읽는 하루다.


카인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절대 사용할 일이 없는 지식’들을 설명하는 책들을 보고 있자면 졸음이 쏟아질 지경이다. 하지만 이곳에 남아 있는 물건들 중 성한 것은 얇디얇은 책뿐이다.


그래도 책은 유용하다. 하필 화장실의 조명 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흐르는 미세한 전류로도 빛을 내는 책을 돌돌 말아 가져가면 훌륭한 조명이 된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작은 손짓에 무의미하게 화면을 넘기는 책을 공중에 내던지니 금세 빛을 잃고 낙엽처럼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본 적 없는 낙엽의 모습이 머릿속에 뿌옇게 그려졌다.


그때 카인이 날아왔다. 새처럼 입으로 책을 낚아채더니 구석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150년 동안 먼지더미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카인은 집을 어지르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물건 좀 어지르지 마.」

“떨어질 때 받으려고 했어.”

「정신 사나우니까 하지 마.」

“할 일이 없단 말이야.”

「할 일 없으면 내 눈이나 닦아줘.」

“어제 닦아줬잖아.”

「어제 밥 먹었다고 오늘 밥 안 먹을 거야? 먼지는 매일 생긴다고.」

“먼지 보이지도 않는데.”

「보여. 먼지 하나 내려앉으면 얼마나 거슬리는데. 네 눈알에 먼지 하나 올려놔 봐. 어떻게 보이나.」

“아― 정말. 알았으니까 이리 와.”


자리를 잡고 앉으니 카인이 기다렸다는 듯 가슴 앞까지 날아왔다. 어차피 말싸움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 저 작은 몸뚱이에 얼마나 많은 지식과 정보가 들었는지 일목요연하게 따지기 시작하면 말싸움은 언제나 나의 패배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구나.」


부드러운 천으로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눈을 닦고 있으니 카인이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야.”

「내가 기억하는 인간은 늘 게으름과 싸워야 했어. 입으로는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지만 실행을 하는 일은 드물어.」

“이 상황에 뭘 하라는 거야?”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치라고 했어. 스스로 생각해야지. 네 몸은 블랙홀에 빠져도 괜찮을 만큼 단단하다고 말했잖아.」

“내 몸이 단단한 거랑 할 일이 없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카인의 눈꺼풀이 절반쯤 내려왔다. 한심한 눈빛. 기계가 이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기분 나쁜 눈초리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기계가 그런 눈으로 보니까 상처 받을 것 같아.”

「최소한의 지식만 이식했던 것이 실수였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인간은 경험을 통해 발전한다고 생각해서 가급적 스스로 배우기를 원했는데.」

“난 뭘 해야 하는데?”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야. 바깥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지. 하지만 맨몸으로? 무기도 없잖아. 하다못해 칼이라도. 내가 마지막 생존자라면서? 내가 없어지면 인간은 멸종이야.”

「그 어떤 무기보다 네 몸이 더 단단하다고 장담해. 그리고 네가 마지막 생존자라고 하지 않았어.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말했지.」

“99.95%정도의 확률로.”

「0.05%의 확률을 포기할 셈이야?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면 확률은 0%야. 생존자도 생존자지만 200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세계야. 바깥으로 발을 내듣는 순간 넌 탐험가가 되는 거라고.」

“탐험가······?”

「인류 최후의 탐험가 피티. 그가 역사적인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이다. 그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멋있어.”


카인이 동그란 기계 눈을 빛내며 귓가를 맴돌았다. 지식을 탐구하고 세상을 개척했던 탐험가들의 일화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어느새 문 밖에 서 있었다. 배웅을 나온 카인이 있지도 않은 팔을 흔드는 것 같았다.


「돌아다니다가 쓸 만한 물건 있으면 주워 와.」

“물건을 주워오는 건 탐험가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최소 200년 된 물건이야. 어떤 물건이든 인류학사에 큰 의미가 있어.」

“······정말 그러네. 맞는 말이야.”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와.」

“내가 생각하는 탐험가와는 다른걸.”

「수습 탐험가잖아.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자고.」

“그것도 그래. 그럼 다녀올게!”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불빛이 없다는 걸 명심해.」

“알았어, 알았다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카인을 뒤로 하고 나는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좋아. 내 걸음걸음은 인류에게 위대한 도약이 될 것이다. 쓸 만한 골동품들을 많이 주워 가야겠다.


하지만 이런 나의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발아래로 느껴지는 땅의 감촉이 너무 이상했다. 묘한 점성까지 느껴졌다. 물컹물컹. 흐물흐물. 끈적끈적. 무엇에 빗댈 수 있을까. 타르와 늪의 중간쯤? 살아가는데 필요한 상식들을 이식했다더니 벌써부터 이런 식이면 차라리 상식이 없는 편이 나았겠다.


땅뿐만이 아니다. 안에서 볼 때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건만 하늘도 이질적이다. 형형색색의 파스텔로 칠해 놓은 모습이다. 공기도 다르다. 촉촉하다. 물방울을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다.


지구를 떠올리면 위로는 푸른 하늘이, 아래로는 단단한 땅이 펼쳐진다. 이곳을 더 이상 지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 모습이 바뀌어도 지구는 지구인가? 역시 계속 지구라고 부르자.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벌써 연구소가 작게 보였다.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건물이 외로워 보였다. 나무들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주변은 사막처럼 벌거숭이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눈앞의 허전한 풍경 위에 옛 지구의 풍경을 덧칠했다. 누구의 기억인지 몰라도 익숙한 풍경들이었다. 추억을 이식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경험과 지식은 떼어낼 수 없는 것인가?


“음?”


누군가의 추억에 젖어들어 있을 때였다. 난 두 눈을 의심했다. 덩그러니 서 있던 연구소가 갑자기 사라졌다.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니고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갑자기 사라졌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바닥이 단단하지 않아 불안하더니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가라앉은 걸까? 하지만 하필 지금?


난 당황하며 다시 연구소를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거짓말처럼 연구소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 황당하게 다시 나타난 연구소를 보고 있으니 이후로도 몇 번이나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신기루?”


사막에서 볼 수 있다는 신기루가 이런 것인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사막처럼 더운 것도 아니고. 이 촉촉한 대기 때문에? 아니면 파스텔로 칠한 것 같은 하늘? 타르 같은 땅?


무의미한 고민이었다. 텅텅 비어 있는 머리를 싸매고 백날 고민해봐야 답이 나올 리 없으니까. 카인도 아마 모르겠지. 아는 것이 많아 보이지만 전부 옛 지식들이다. 밖에서는 헛똑똑이라 이 말씀. 이제부터는 내가 카인을 가르쳐야겠는걸.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카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발전한다. 난 벌써 발전했어. 탐험은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구나.


새로운 자연현상을 발견한 뒤로는 시선을 자꾸만 멀리 두게 되었다. 아득히 멀어 보이는 산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모습이 너무도 신기했다. 돌아가면 카인에게 원리를 물어봐야겠다.


“어, 어?”


한눈을 팔다가 발이 돌부리에 걸렸는지 균형을 잃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뒤꿈치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아등바등하니 어째서인지 딱딱한 질감의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바닥을 보니 깨진 돌가루가 널려 있었다.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타르 같은 땅과는 전혀 다른 재질이었다. 부서진 돌가루를 주워 만져보니 역시 다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면을 보았을 때, 난 내 눈이 정말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건물들이 식물처럼 땅에서 자라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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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 살을 구워 먹는다고? (1) +1 19.03.01 63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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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 빵이 먹고 싶어 (8) +1 19.02.27 43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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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 빵이 먹고 싶어 (6) 19.02.25 63 0 9쪽
6 1. 빵이 먹고 싶어 (5) 19.02.24 61 0 10쪽
5 1. 빵이 먹고 싶어 (4) 19.02.23 69 0 9쪽
4 1. 빵이 먹고 싶어 (3) 19.02.22 85 0 10쪽
3 1. 빵이 먹고 싶어 (2) 19.02.21 95 0 9쪽
» 1. 빵이 먹고 싶어 (1) 19.02.21 103 1 9쪽
1 프롤로그. 고독한 요리사의 탄생 +1 19.02.21 229 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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