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 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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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늑삼
작품등록일 :
2019.02.22 18:26
최근연재일 :
2019.09.2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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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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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제 9장 : 세사난측(世事難測。세상일은 변천이 심해 미리 알기가 어렵다) (4)

DUMMY

* * *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이이이이 내 사랑이로다. 아매도 내 사랑이야."


"······."


"니가 무엇을 먹으랴느냐? 니가 무엇을 먹으랴느냐? 둥굴둥굴 수박 웃봉지 떼뜨리고, 강릉 백청을 따르르르 부어 씨랑 발라 버리고, 붉은 점 웁벅 떠 반간 진수로 먹으랴느냐."


짝짝짝!


"와아! 진혁 형님, 진짜 대단한데요."


우우, 우우우······.


"우쒸, 낭순이 너··· 그렇게 울부짖지 말랬지? 이걸 진짜 확!"


크르릉!


"뭐? 산속에선 괜찮다고 했다고? 내가··· 언제 그랬나? 쩝!"


"진혁 형님, 근데 이 소리는 언제 배웠어요?"


"엊그제."


"엊그제요? 누구한테 배웠어요? 혹시 서연 낭자한테 배운 거예요?"


"아니, 서진 낭자한테."


"예? 서진 누님도 소리할 줄 아세요?"


"응, 아주 잘하던데··· 내가 들을 땐 서연 낭자 못지않더라고, 흠흠."


"와아, 나도 한번 들어 봤으면 좋겠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나도 서연 낭자한테 소리 좀 가르켜 주라고 졸라 봐야겠다. 진혁 형님, 우리 어서 내려가요. 네?"


진혁과 귀동이 걸망 하나씩 등에 걸머지고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걸망 안엔 새박뿌리가 가득했는데, 둘은 이른 아침 산내골 화전촌을 나서 그제 귀동이 새박뿌리를 캐 왔던 그 장소를 다녀오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곳에 자생하고 있는 귀하디귀한 새박뿌리를 모조리 캐서 내려오는 중이라 진혁이나 귀동의 기분은 최고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이 최고였던 진혁과 귀동은 수간두옥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최악의 기분으로 전추되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소식을 이경륭으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인데, 말 그대로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춘, 춘장 어르신. 서연 낭자···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갔습니까요?"


"어찌 아무 말도 없이 갔겠느냐? 한참 동안 마당에서 울고불고··· 그렇게 많이 아쉬워하며 떠났다."


귀동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방울을 한 채 이경륭의 입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서진 낭자는요?"


귀동에 이어 진혁이 서진에 대해 묻자 이경륭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슬며시 귀동을 돌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허, 그것 참. 귀동이 있는 데서 사실을 이야기해 줄 수도 없고··· 우선은 우리 귀동이가 문제니 어쩔 수 없구나. 이따 다시 자세한 얘기를 해 줄 테니 네 녀석은 당분간 애 좀 닳고 있거라.'


"사실은 서진 처자의 혼례 때문에 급히 떠났다."


"예? 서진 낭자의 혼례요? 아,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언뜻 들은 탓에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다만 태인현에 서진 처자의 정혼자가 있다는 것 같더구나."


"그, 그럼 서진 낭자한테 정혼자가 이미 있었다는 말씀이세요, 아버지?"


"··· 으음, 뭐 그렇다고 하더구나. 허험."


"······."


"진, 진혁 형님. 어, 어떻게 해요? 세,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이경륭의 복심은 적중했다. 깜짝 놀랄 만한 이경륭의 이야기에 진혁은 하늘이 노래질 만큼 커다란 충격을 받았지만, 반면에 귀동은 자신이 받은 충격을 뒷전으로 밀치며 진혁을 걱정하기 바빴다.


'설, 설마 그럴 리가······.'


진혁은 아버지 이경륭의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그만큼 이경륭의 말은 하늘이 두 쪽 나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실로 놀랍고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아냐, 이건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진 낭자가 내게 보인 모습은 결코 정혼자가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어. 하지만··· 아버지가 이런 걸로 날 놀리실 리도 없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진혁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버지, 정읍현으론 아직 돌아가면 안 될 텐데요. 혹시 어디로 간다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아마 태인현으로 간다는 것 같더구나."


"언제쯤 떠났는데요? 떠난 지 오래 되었어요, 아버지?"


이경륭의 말을 통해 서진의 행선지가 밝혀지자 그 순간 진혁이 눈빛을 빛냈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만··· 지금 쫓아가 봐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예서 점심나절에 떠났으니 지금쯤이면 아마 태인현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게다."


"그럼 아버지, 서진 낭자가··· 혹시 이 소자에게 남긴 말은 없었어요?"


"왜 없었겠느냐, 당연히 있었지. 음, 지금은 좀 그러니··· 아비가 차후에 다시 이야기해 주마."


'허, 서진 처자의 탁언을 한시라도 빨리 이 녀석에게 전해 줘야 하는데, 우리 귀동이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이거 참,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군.'


진혁은 현재 뭐가 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상황이 제대로 파악이 안 되어 혼란스럽기만 했는데,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슴 한 켠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이 느껴졌다. 그 아픔은 다름 아닌 허전함과 상실감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서운함과 야속함이란 상태감정도 그 아픔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허전함, 상실감, 서운함, 야속함과 같은 상태감정을 느끼는 건 비단 진혁뿐만이 아니었다. 귀동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하물며 낭순이도 뭔가 허전한 게 느껴지는지 수간두옥 뒤안부터 시작해 집 안 곳곳을 숨가쁘게 돌아다니며 서진과 서연을 찾고 다녔다.


"아버지, 소자와 귀동 아우가 며칠 전 계획하기를 다음 약초 캘 장소로 모악산을 손꼽았는데, 저희들 마음도 그렇고··· 바람이나 쐴 겸해서 며칠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밖으로 나가는 진혁의 뒷모습을 이경륭은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허! 이거 우리 귀동이를 생각하면 이러기도 그렇고, 또 진혁이 저놈을 생각하면 저러기도 어려우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따로 없구나.'


귀동을 배려한 이경륭의 심량처지에 귀동은 놀람에서 비롯된 충격이 다소나마 해소되며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경륭의 그 심량으로 인해 귀동의 충격까지 애꿎게 떠안은 진혁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한마디로 정신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마당으로 내려선 진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온통 캄캄하게 보였다. 해가 아직 서산에 절반쯤 걸려 있는데도 그리 보이는 건 큰 충격으로 말미암아 시각적인 신경이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충격으로 인한 후유증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 자꾸만 솟구쳐 올라왔다. 그러다 목구멍에 턱 하고 걸리더니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해지더니 급기야 정신이 아찔해지며 아득해졌다.


"어? 진, 진혁 형님!"


집 밖으로 나서던 진혁이 휘청거리며 쓰러질 듯하자 뒤따르던 귀동이 황급히 부축한 뒤 싸리문 밖으로 이끌었다.


그로부터 한참 후 시간은 소슬바람처럼 무심히 흘러 어느새 까만 밤이 되었다. 그렇게 어둠이 몰려온 산중은 한없이 적막하기만 했는데, 어찌나 고요한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흐름이 일시에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한참 후 그때까지도 적막함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환하게 떠오르는 달로 인해 사위를 둘러싼 어둠은 서서히 걷혀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얘지는 어둠과 고요함 속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진혁이었다.


진혁은 평평한 바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밤하늘엔 휘영청 떠오른 하얀 달리 황홀한 제 빛을 세상에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에 질세라 영롱하게 반짝이는 별들도 하나 둘씩 나타나더니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기 시작했다.


진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스치는 바람에 가시가 돋힌 것마냥 살갗이 쓰라리게 느껴졌다. 주변에 떠도는 온갖 소리도 몸 속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처음에는 짐승 울음소리가, 다음에는 야조 소리가, 그다음에는 벌레 소리가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도 내 마음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막상 이렇게 되었다고 벌써부터 내 마음에서 내쫓으려고 하고··· 후우, 이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인가?'


진혁의 눈에서 어느 순간 눈물이 흘렀다. 정혼자가 있는 서진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어서 눈물이 흘렀고, 정혼자가 있는 서진이기에 붙잡을 수가 없어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서 서진을 몰아내려는 부질없고 속절없음에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 번 터진 눈물은 아무리 닦아도 소용이 없었고, 두 눈을 감아도 멈추질 않았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줄 것 같이 그리 행동해 놓고, 이렇게 한 번 옹졸해지니 서진 낭자에 대해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내주려 하지 않는 내 마음이 정녕 옹종망종하기 그지없구나.'


진혁은 자신의 옹졸함 때문에 울음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서글픔에 더더욱 눈물을 쏟아 내야만 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애써 참아 보고, 또 참아 봤지만 그럴 때마다 애먼 입술만 깨물어졌다.



* * *



서진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전혀 외롭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너무나 외롭고 마음 한 켠이 공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세상 한구석에 홀로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사실 지금의 이 허전하고 쓸쓸한 정서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 만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현실을 바꿔 보고 싶어도 완강한 아버지가 버티고 있는 한 쓸데없는 심력 낭비였고, 쓸모없는 헛된 생각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고, 당면한 상황을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그 어떤 그리움에 사로잡혀 갔다.


'잘 지내고 있을까? 내 미소가 활짝 핀 목련보다 더 아름답다고 했는데··· 내 목소리는 꾀꼬리의 지저귐보다 더 감미롭다고 했고, 또 내 발은 새하얀 목화송이보다 더 보드랍다고 했는데······.'


서진은 휘영청 떠 있는 둥근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달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른 채 그렇게 진혁을 그리고 있었다.


잠시 후 졸린 눈을 비비대며 서연이 다가왔다.


"언니,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


"자다 말고 왜······."


"자다 깼는데 언니가 안 보여서··· 큰 오라버니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


십분 짐작이 된다는 듯 서연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한마디를 건넸다. 하지만 서진은 함구무언으로 대답을 대신했는데, 비록 사실일지언정 차마 그렇다고 말로써 표현할 수 없었다.


"나도 작은 오라버니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데··· 언니는 오죽하겠어? 휴우, 두 오라버니 못 보고 온 게 못내 마음에 걸려··· 낭순이한테도 미안하고, 언니도 그렇지?"


서연이 침울한 표정으로 서진을 위로하다 도중에 한숨을 내쉬며 애틋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이내 미안함이 담긴 말을 쏟아 냈다.


"응··· 나도 그래, 지금이라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서진 또한 서연의 말에 동조를 해 보이며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언니. 산속에 있을 땐 사실 답답하기도 했는데, 막상 이렇게 나와 보니··· 그곳이 훨씬 더 좋았던 것 같애."


"진짜?"


예상치 못한 말이 서연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자 서진이 의외라는 듯 짧은 한마디로 그 진의를 되물었다.


"응. 그나저나 언니, 그 고 도령하고 혼례 올릴 거야? 난 솔직히 언니가 고 도령보다는 큰 오라버니한테 시집갔으면 좋겠어. 사실 큰 오라버니는 잘생긴 데다 사내답잖아. 게다가 마음씨도 따뜻하면서 정도 많고··· 언니가 만일 내 친언니가 아니었으면 큰 오라버니를 넘겨 주는 일은 아마 절대 없었을 거야."


서연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혼례에 대해 묻다 어느 순간 진혁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서진의 그리움에 불을 지폈다. 가뜩이나 진혁을 생각하고 있던 서진은 그로 인해 진혁에 대한 그리움이 더더욱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우리 서연이가 큰 마음먹고 이 언니한테 양보까지 해 준 사람인데······."


"참, 아까 다 들었어. 언니가 어르신께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며느리, 지어미 운운했던 거······."


그렇게 두 자매가 애틋하고 아련한 심정으로 한밤중 수다를 늘어놓고 있을 때, 어두운 달 그림자 속에서 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호오! 나와 혼담이 오가는 여인이 이미 다른 사내를 품고 있었단 말이요?"


"엄마야!"


"어머나!"


웬 사내가 어두운 공간에서 인기척도 없이 튀어나와 난데없는 말을 내뱉자 서진과 서연은 동시에 서로 껴안으며 화들짝 놀랐다.


"서진 낭자! 어찌 그럴 수가 있소? 감히 우리 집안을 어떻게 보고··· 나와 우리 집안이 그리 하찮게 보였소?"


"뭐예요··· 그곳에서 지금껏 우리를 훔쳐보고 있었던 거예요?"


"훔쳐보긴 누가 훔쳐봤다고··· 괜히 생사람 잡지 마시요. 난 그저 지나는 길에 우연히 낭자들 이야기 소리를 들고 와 본 것뿐이요."


어두운 곳에서 서진을 훔쳐보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사내는 고유천의 아들인 고남철이었다. 고남철은 계유년 생으로 서진보다 두 살이 많은 스물두 살이었는데, 방금 전 상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행실이 그리 바른 편이 못되었다.


"저기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내가 아까 방에서 나와 우리 언니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 올 때만 해도 행랑채 바깥문이 잠겨 있었거든요. 그렇다는 것은 고 도령이 기척을 숨긴 채 이 행랑채 어딘가에 계속 숨어 있었다는 말밖에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잖아도 자신의 언니를 함부로 대하는 고남철이 꼴불견처럼 느껴지던 참이었다. 그런데 뻔뻔하게 거짓말까지 해 대자 서연이 욱하는 마음에 대뜸 나서 거짓부렁을 야무지게 따지고 들었다.


"아, 아니 자매가 쌍으로 나서 모, 모함을 하고 그러네. 서, 서연 낭자. 내가 숨어 있는 것을 직접 보기라도 했소?"


앳된 모습과 달리 서연이 논리적으로 따지며 제법 앙칼지게 대들자 고남철은 말까지 더듬거리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정황상 뻔한 것 아니예요?"


"허! 서연 낭자,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그리 함부로 누명 씌우는 게 아니요. 그리고 서진 낭자는 꿈 깨는 게 좋을 것이요."


직접 보지 못했다는 서연의 말에 고남철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발뺌을 했다. 그렇게 뻔뻔함의 극치를 보이던 고남철이 돌연 서진을 향해 알 수 없는 한마디를 던지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고남철이 알 수 없는 말을 툭 내뱉자 서진이 고운 인상을 찌푸리며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몰라서 묻는 것이요? 낭자는 지금 나와 혼담이 오가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어찌··· 어쨌든 혼례 이야기가 나온 만큼 내가 낭자를 놓아줄 것 같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것만 알고 계시요."


당시의 사회상으로 사내의 우쭐함을 대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남존여비 사상이었다. 고남철이 그런 고루한 사상까지 내세워가며 공갈 비슷한 말로 서진을 위압하려고 했다.


"혼례요? 고 도령도 꿈 깨는게 좋을 거예요. 제 맘속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가뜩이나 기분이 상해 있는 서진은 고남철의 안하무인격 언사에 자신의 속내까지 서슴없이 드러내며 만만치 않은 맞대꾸로 맞받아쳤다.


'으드득, 건방진 년. 네 년의 미모가 꼴값을 떨 만큼 받쳐 주니까 내 우선은 참는다. 하지만 혼례만 치르고 나면 그때는··· 그때는 평생을 천한 창기처럼 취급해 주마. 그러니 지금은 어디 네 마음껏 까불어 봐라, 이 건방진 년.'


"암튼, 생각이나 잘하고 있으시요. 아, 그리고 내 경고 차원에서 미리 한마디 해 주는데··· 나도 뭔가 알고 있다는 걸 명심하시요. 허험!"


고남철이 비릿한 냉소를 지어 보이며 알다가도 모를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서진과 서연은 아연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고남철의 비릿한 표정에 야비함이 한껏 묻어나 있었고, 그의 말속에서도 뭔가 마음에 걸리는 기분 나쁜 느낌이 스멀거리며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니, 저 생뚱맞은 고 도령의 말이 무슨 뜻일까? 우리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눈치인데··· 혹시 아버지가 다 이야기한 게 아닐까?"


"설마하니··· 그럴 리가 있겠니? 우리가 당분간 얹혀살 거라고 하니까 아마 제 딴에 그냥 한번 넘겨짚어 본 걸 거야."


하지만 서진과 서연은 미처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아버지 송유석이 그제 고남철의 아비인 고유천과 술을 진탕 마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송유석은 그제 고유천을 만나 술을 마시며 그간의 사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미주알고주알 모두 고해 바쳤다. 고유천의 밑두리콧두리에 말려든 결과였는데, 하지만 자신과 두 딸을 비롯해 이경륭 부자가 관군에 수배된 사실까지 모두 얘기했다는 게 문제였다. 물론 송유석은 자신이 고유천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술이 취해 알 수가 없었고,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근데 언니, 저 고 도령 말이 왜 자꾸 신경 쓰이는 거지? 나만 그런가? 언니는 안 그래?"


"··· 별거 아닐 거야. 이제 그만 우리도 들어가 자자."


'나도 사실은 뭔가 불안하게 느껴지긴 하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아버지한테 한번 여쭈어 봐야겠어.'


서진은 서연을 앞세우고 처소로 향하며 무심코 하늘을 한번 올려다봤다. 유리처럼 맑은 밤하늘에는 비단결 같은 월광을 내뿜는 밝은 달이 떠 있었고, 그 주위에는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은 별 무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별 무리는 너무도 맑아서 팔을 살짝 내뻗으면 충분히 손에 닿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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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총장 : 앙천부지(仰天俯地。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본다) 19.09.26 263 3 11쪽
77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3) 19.09.25 91 2 31쪽
76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2) 19.09.24 60 2 26쪽
75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1) 19.09.23 64 2 32쪽
74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4) 19.09.20 65 2 18쪽
73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3) 19.09.19 65 2 24쪽
72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2) 19.09.18 65 2 25쪽
71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1) 19.09.17 92 2 23쪽
70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3) 19.09.13 80 3 20쪽
69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2) 19.09.12 66 2 24쪽
68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1) 19.09.11 78 2 32쪽
67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4) 19.09.10 77 2 16쪽
66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3) 19.09.09 64 2 23쪽
65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2) 19.09.05 66 3 21쪽
64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1) 19.09.04 71 3 24쪽
63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3) 19.09.03 73 2 29쪽
62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2) 19.09.02 62 3 22쪽
61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1) 19.08.30 92 3 32쪽
60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3) 19.08.29 96 2 30쪽
59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2) 19.08.28 87 2 29쪽
58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1) 19.08.27 91 3 27쪽
57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4) 19.08.26 79 2 20쪽
56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3) 19.08.23 71 2 15쪽
55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2) 19.08.22 73 2 26쪽
54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1) 19.08.21 77 3 25쪽
53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3) 19.08.20 99 3 26쪽
52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2) 19.08.19 80 3 28쪽
51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1) 19.08.16 95 3 25쪽
50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4) 19.08.15 84 3 18쪽
49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3) 19.08.14 94 3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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