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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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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늑삼
작품등록일 :
2019.02.22 18:26
최근연재일 :
2019.09.2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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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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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2)

DUMMY

* * *




"으음······."


힘겨운 신음 소리와 함께 진혁이 눈을 떴다. 사방이 캄캄했다. 밤의 그림자와는 또 다른 느낌의 어둠이었는데, 빛에 대한 반대급부로써의 어둠이 아닌 어둠 그 본연으로써의 절대적인 어둠이었다.


진혁은 드러누운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엔 그 흔한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밤하늘에 왜 별이 하나도 없지? 이상한데······.'


사실 진혁은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그 행위 자체의 진위성조차 구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동서남북의 방위뿐만 아니라 전후좌우의 방향조차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정신이 피폐해 있었기 때문인데, 진혁은 그렇게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모든 감각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는 중이었다.


'으아아아······.'


진혁은 답답함과 두려움, 미안함과 그리움 등 다양한 감정 상태에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내가 지금 죽은 것인가? 벌써 아버지 곁으로 오면 아버지가 무척이나 슬퍼하실 텐데··· 그나저나 그 후론 어떻게 되었을까? 사상자가 꽤 많이 나왔을 텐데··· 그런데 왜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리 무모하게 덤벼들었을까? 뭔가 이상해······.'


진혁은 현재 자신이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어 저승에 와 있는지 구분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다만 현실이 이승이든 저승이든 차치하고 그저 그 어떤 세상 한구석에 홀로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 모든 정서가 자신 스스로 만든 황폐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만일 그렇다면 자신이 혹시 살아 있을 수도 있었다.


'내가 만일 살아 있다면··· 그렇다면 이건 쓸모없는 감정 이입이자 쓸데없는 감정 낭비다. 그런데 왜··· 멈춰지지 않지? 아니, 오히려 더 심해지는 이유는 뭐지? 이대로라면 내 마음과 내 의지가 더 약해질 게 뻔한데··· 그래, 이렇게 망설이며 주저하게 되면 그다음 수순은 오직 후회뿐이다. 지금 당장 머릿속의 생각들을 멈춰야 한다. 그것도 서둘러 멈추고 단호히 뒤돌아서야 한다. 그래야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우쒸, 왜 이렇게 그 하나는 없어지지 않고 자꾸 떠오르는 거야? 잘 지내고 있으려나? 그나저나 낭순이는 또 얼마나 버릇없게 만들어 놨을지······.'


깊어 가는 밤을 따라 시간도 어김없이 흘렀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참 후 진혁이 누워 있던 자리를 털고 주섬주섬 자신의 몸을 일으켰는데,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탄이 터지며 풍압이 발생했고, 그 풍압에 휘말려 저만치 날아가 처박힌 게 전부였다. 만일 포탄이 조금만 더 날아왔더라면, 그래서 조금만 더 가까이에 떨어졌더라면 진혁 또한 온전히 못했을 게 분명했고, 아마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지만 황천길을 건넜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날아온 포탄은 진혁이 서 있었던 강둑 바로 아래에 떨어졌고, 그 바람에 진혁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진혁이 자신의 몸을 주섬주섬 일으키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불빛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횃불처럼 보였는데 두 개였다. 진혁은 그 즉시 바닥에 납작 엎드린 후 은폐물이 있는 곳으로 기도비닉을 유지한 채 신속하게 기었다.


'전투에서 우리 농민군이 패했나? 그럴 리는 없었을 텐데··· 만일 저들이 관군이면 우리 농민군이 패했다는 얘기인데, 그럼 귀동 아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진혁이 은폐물에 몸을 숨긴 뒤 이것저것 하나씩 따져 보며 온갖 걱정을 다 했는데, 하지만 그건 한낱 기우에 불과한 염려였고 걱정이었다.


"··· 훌쩍, 훌쩍. 진혁 형님. 어디 계세요? 훌쩍, 살아 있는 거 다 아니까 빨리 나오세요. 훌쩍, 훌쩍······."


"허, 우리 젊은 타격장님은 그리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니 제발 울지 말래도··· 거 참, 말 안 듣는 젊은이네."


"훌쩍, 저도 알아요··· 우리 형님이 안 죽었다는 거 저도 안다고요. 근데 어르신, 우리 형님을 마지막으로 본 게 이 근방이 맞아요? 훌쩍······."


"그,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게 이 근방에서 활을 쏘는 모습이었는데··· 사실 그다음은 나도 보질 못해서······."


어찌 된 영문인지 횃불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은 다름 아닌 귀동과 정의석이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전투가 모두 끝난 다음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남겨 둔 채 황룡강 유역을 신속히 벗어나 현재는 장성과 정읍 경계쯤에서 주둔 중이었다. 그런데 그간 이 두 사람에게 무슨 사정과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이 시간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것도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전장을 떠나지 않고 이처럼 이리저리 서성이며 배회하고 있었다.


"진혁 형님! 훌쩍, 어디 계세요? 빨리 안 나오면 이 소제도 훌쩍, 그냥 확 가 버릴 거예요."


귀동은 연신 흐느끼며 진혁을 찾고 있었다. 오로지 진혁을 찾기 위해 애원도 해 보고, 공갈도 쳐 대며 목 놓아 진혁을 불러 댔다. 그러면서 점차 진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귀동 아우!'


진혁은 어느 순간 자신을 찾는 귀동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그 즉시 귀동을 불렀다. 그러나 반가움에 소리쳐 부른 '귀동 아우'라는 목소리는 어찌 된 영문인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목이 메더니 목소리 대신 눈물이 터져 나왔기 때문인데, 그것도 눈이 아닌 목에서부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진혁은 또다시 주섬주섬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심정은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언제까지고 목 놓아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동생이 저리 애타게 자신을 찾고 있으니 그 애달픔을 조금이라도 빨리 달래 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모습을 한시바삐 드러내 자신의 동생에게 보여 줘야만 했다.


"귀··· 으어어엉······."


"지, 진혁 형님? 진혁··· 형님!"


귀동은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집어던지고 달렸다. 저 멀리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며 그저 그 어떤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귀동은 그 어슴푸레한 형체가 진혁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지레짐작에 불과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직감에서 비롯된 짐작이었기에 진혁이 틀림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귀동은 횃불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진혁 형님!"


"흐어어··· 귀동··· 아우······."


귀동은 눈물 콧물을 한 채 진혁의 품으로 득달같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진혁 역시 눈물 콧물을 한 채 두 팔을 활짝 벌려 귀동을 반겼다. 그렇게 그들 형제는 재회를 했고, 그 감동적인 재회 장면이 누군가의 기억에 담겨지고 있었다.


'그 형에 그 동생이라··· 어쩐지 남다르다 했더니만, 친형제들보다 더 가깝게 지낸다는 호형호제였었군.'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다시 지난 후 세 사람은 북쪽을 향해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었다.


"거, 자네 말일세··· 자네 형님 찾게 도와줬으니 약속한 것 꼭 지켜야 하네. 허험!"


"예, 어르신. 꼭 지킬게요. 산삼 캐면 그 즉시 어르신한테 바로 갖다 드릴게요. 근데 사시는 곳을 알려 줘야 찾아갈 텐데, 왜 알려 주시지 않는 건지······."


"허억! 산삼? 뭐야, 귀동 아우. 나 찾으려고 정 어르신과 그런 약속을 했단 말야?"


"어이구, 타격장님. 말도 마십시요. 이 젊은 청년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어찌나 울고불고 애걸복걸을 해 대던지······."


"그런데 정 어르신은 왜 본진과 함께 가지 않고 남아 계셨던 겁니까? 혹시 정 어르신도 저 생각해서 찾고 계셨던 겁니까?"


"허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야 뭐, 이젠 나이가 들어 몸뚱이가 말을 안 듣다 보니 본진을 따라가지 못했던 거지요."


"예? 이상하네. 정 어르신께서 나이가 드셨다고 해도 아까 싸울 때 보니 젊은 사람 못지않던데요. 그리고 지금도 이리 쌩쌩하게 걷고 계시잖아요."


"허엄! 그나저나 타격장님, 본진에 따라붙으려면 걸음을 좀 더 재게 놀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진혁을 걱정한 자신의 속내가 은연중에 들통나자 정의석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부리나케 앞쪽으로 나섰다. 그리곤 좋아서 죽고 못사는 두 형제와 거리를 슬그머니 벌려 줬는데, 그 덕분에 뒤따르는 진혁과 귀동은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마음껏 회포를 풀 수 있었다.




* * *




농민군의 모든 간부들과 함께 김경천을 불러들인 전봉준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조가비처럼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으로 일관했는데, 그건 다른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보니 김경천은 내심 죽을 맛이었다. 이곳으로 불려 오기 전까지 쉼없이 굴린 잔머리가 소용이 없어졌고, 그렇게 쥐어짜낸 변명 거리 또한 그 빛을 바래고 있었다.


결국 초조함으로 범벅된 시간이 흐르며 똥줄만 타 들어갔고, 거기에 더해 어느 순간 두려움까지 스멀스멀 피어오른 탓에 김경천은 현재 속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몇 마디의 질책보다 굳게 다문 침묵이 더 무서울 때가 있는 법인데, 지금 김경천이 느끼는 두려움이 바로 그랬기 때문이다.


어쨌든 김경천이 그렇게 초심고려하며 진땀을 흘리고 있을 때 시간도 같이 흘러 김경천이 불려 온 지 어느새 일 각쯤 되어 갔다.


"정백현 비서는 밖에 나가 이진혁 타격장의 소식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오시오."


이윽고 전봉준이 무겁게 입을 떼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말의 내용은 김경천에 관한 게 아니었다.


"예, 총대장님."


전봉준이 한참 만에 입을 열어 비서에게 명령을 내린 후 다시 침묵을 고수하려 하자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총관령 손화중이 슬그머니 입을 열고 당금의 현실을 일깨웠다.


"총대장, 이 타격장님은 분명 살아 있을 것이요.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말고··· 일단 눈앞의 현안부터 처리하는 게 어떻겠소?"


"··· 알겠소. 그럼 먼저 김경천 행동장의 안건부터 상정하겠소. 자, 여기 김경천 행동장의 불복종을 어찌 처리하면 되겠소?"


드디어 총대장 전봉준이 자신의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하고 그에 대한 처분을 간부들에게 묻자 김경천은 결국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은 언뜻 자포자기한 듯 보였는데, 하지만 그건 고도의 술수일 뿐 그 이면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시 말해 김경천은 지금 총대장 전봉준과 농민군 간부들을 속이기 위한 일환으로 연출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표리부동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농민군에 헌신한 게 한두 가지도 아니고, 쌓아 온 실적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은데··· 설마하니 내치기야 하겠어? 졸자로라도 붙어 있기만 하면, 어떻게든 다시···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은 나 죽었소 해야 되겠지. 쳇! 이 짓도 못해 먹을 짓이군.'


"총대장, 당사자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 보는 게 우선일 듯하니 김경천 행동장의 이야기부터 들어 보는 게 어떻겠소?"


이번에도 총관령 손화중에 나서 멍해 있는 총대장 전봉준을 슬쩍 일깨워 줬다.


"음, 알겠소. 김경천 행동장,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게. 그대가 우리 명령을 어기고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터, 그에 대해 어디 한번 이야기를 해 보게."


손화중의 권고를 받아들여 전봉준이 김경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뭐가 탐탁치 않다는 듯 표정과 말투가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


"왜··· 우리 농민군의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가게 했는지 그 이유를 말해 보란 말일세."


자신의 말에 김경천이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보이자 전봉준이 대뜸 언성을 높이며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저는 단지, 부하들의 뜻에 따라······."


전봉준이 격앙된 모습을 보이자 김경천이 슬쩍 입을 열었다가 이내 얼버무렸다. 물론 김경천의 계산된 일언일행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여기 모여 있는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제대로 말을 해 보게."


결국 김경천의 의도대로 전봉준이 뜻하지 않게 멍석을 깔아 줬다.


"··· 전투에서 죽은 제 부하들 중에 먼저 출전한 유격 대원들과 친밀하고 친압하게 지낸 자들이 많아 그들의 뜻을 꺾지 못하고 그만··· 그리고 저 또한 먼저 출전해 고전하고 있을 유격 대원들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야비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거짓말이 확인될 수 없도록 비겁하게 죽은 부하들을 팔아먹는 김경천이었다. 불과 몇 시진 전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부하들에게 호언장담했던 그 김경천이 맞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무릇 지휘관이라면 자기 주관, 자기 판단, 자기 결정이 굳건하고 명확해야 하거늘 어찌 그리 부하들의 인정세태에 휘둘렸던 말인가? 물론 인정도 품앗이라고 부하들의 그런 마음을 귀히 여기고 존중했어야 하나 그때는 싸움 중이었고 그곳은 전장이었네. 부하들에게 휘둘린 그대의 오판으로 인해 우리 농민군 몇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그대는 알고 있는가?"


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이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지금껏 꾹꾹 누르고 있던 노기가 결국 노성으로 터져 나온 것인데, 그 정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주변의 공기까지 팽배해졌다.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총대장님."


"어쨌든 좋네. 모름지기 잘못을 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따르는 법··· 김경천 행동장, 우리가 그대를 어찌 처벌했으면 하는지 먼저 얘기를 해 보게."


"···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겟습니다. 다만 농민군에서 내치지만 말아 주십시요. 만일 그리만 해 주신다면··· 처벌이 다 끝난 다음엔 비록 하찮은 힘일지언정 농민군에 종군하며 이 한 몸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김경천이 우물쭈물하며 처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슬며시 밝혔다. 하지만 그에 곁들여 선처를 바탕에 둔 자신의 각오까지 슬쩍 다짐하고 나섰는데, 그야말로 교묘하고 고약한 행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떡을 줄 수밖에 없게끔 은근히 상대를 압박하는 고도의 술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김경천을 전봉준이 여전히 분노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사실 전봉준은 김경천의 오만과 독선을 그전부터 웬만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꽤 오래전부터 동학 활동을 함께 했었고, 집회나 봉기 때마다 많은 농민들을 동참케 하는 등 그동안 김경천이 보여 준 수고가 적지 않았기에 전봉준은 설마 하는 염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경천을 행동장에 임명하며 오백 명의 군사들까지 내어 준 거였다. 물론 김경천을 행동장에 임명할 당시에도 걱정과 염려가 없지 않았지만 설마하니 이처럼 큰 참사를 빚어낼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총대장, 그동안 김경천 행동장이 우리 농민군을 위해 헌신한 부분이 많았던 만큼 농민군에서 이대로 추방하기보단 그의 바람대로 행동장의 직위를 박탈하고 일반 군사로 남게 하는 게 어떻겠소?"


"그렇소, 총대장. 비록 안타까운 결과로 점철되었지만, 어찌 보면 그 또한 김경천 행동장의 충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겠소? 그리고 손 총관령의 말처럼 김경천 행동장이 우리 농민군을 위해 그동안 애쓴 노고도 처벌에 감안해야 하지 않겠소?"


총관령 손화중에 이어 총참모 김덕명까지 나서 김경천의 그동안 업적을 언급하며 처벌에 대한 감경을 건의하자 주변의 다른 간부들도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처럼 주변 간부들이 동조하며 부화뇌동할 수밖에 없는 건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형편이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려 지내다 보면 서로의 사정을 보아줄 수밖에 없는 그 어떤 동질의 유대감이 생기기 마련인데, 지금 이 자리에서도 그에 대한 현상이 자연스레 펼쳐지고 있는 거였다.


간부들이 이처럼 김경천의 처벌에 대해 감경의 뜻을 내비치자 전봉준도 처벌 수위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율대로 하자면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대로 끝내고 즉각 추방해야 마땅했는데, 하지만 간부들의 말마따나 김경천의 그동안 업적도 결코 녹록치 않았기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더 큰 화근이 될 수도 있는데, 내가 더 큰 화근을 키우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잠시 뭔가를 생각한 전봉준이 입을 열었다.


"김경천 행동장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벌을 내리겠소.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다시피 김경천 행동장이 저지른 잘못은 엄히 다스려야 할 만큼 중한 게 사실이오. 그런 만큼 일벌백계로 삼아 우리 농민군에서 추방시켜야 마땅하나, 손 총관령과 김 총참모 등 여러 간부들이 선처해 줄 것을 호소하기에 그들의 뜻을 반영하여 행동장의 직위만 박탈하도록 하겠소."


이로써 김경천에 대한 처벌은 여러 요소가 감경 사유로 적용되어 결국 미미한 수준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 전봉준은 훗날 뼈저린 후회를 하며 땅을 쳐야 했는데, 그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일곱 달 후였다.


"감, 감사합니다··· 총대장님."


"그리 알고 김경천 행동··· 그대는 이만 자신의 본대로 돌아가게."


김경천은 쾌재를 부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그 즉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 문밖으로 발빠르게 사라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를 맞춰 전봉준의 비서 정백현이 다급히 들어와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전했다.


"총대장님, 이진혁 타격장이 살아 있답니다!"


"그, 그게 정말이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하오? 어서 자세히 얘기해 보시오."


진혁이 살아 있다는 정백현의 말에 전봉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가움과 놀라움을 동시에 표출했다.


"예, 총대장님. 방금 후방 관측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진혁 타격장이 조금 전에 우리 농민군 진영 안으로 복귀했다고 합니다."


"허, 그게 정말이오? 아! 하늘도 무심치 않았구나, 무신치 않았어··· 그래, 이진혁 타격장의 상태는 어떻다고 하오? 어디 다친 데는 없다고 하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내가 그쪽으로 직접 가 볼 테니 정 비서는 어서 앞장을 서시오."


진혁에 대한 전봉준의 감정 상태가 반가움과 놀라움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해 갔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총대장님. 제가 걸음을 조금 빨리 놀려 먼저 왔을 뿐, 이진혁 타격장도 아마 곧 이곳에 도착할 겁니다."


정백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봉준과 농민군 간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농민군 진영의 한복판에서 왁자지껄한 소란이 한바탕 벌어졌다.


"이진혁 타격장! 이리 살아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맙네. 하기야 난 자네가 죽지 않았다는 걸 이미 느낌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걱정을 별로 안 하고 있었네만, 다른 사람들은 쓸데없이 자네 걱정을 많이 하더군."


진혁이 마침내 모습을 나타내자 전봉준이 제일 먼저 다가와 환한 미소를 보이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런데 그 태도와 말투가 평소와 달리 진정성이 없어 보였고, 어딘지 모르게 능청스럽게 느껴졌다.


'이거 체통 때문에 정작 하고 싶은 반가운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으니, 이거 원······'


기실은 진혁의 생환이 무척이나 기쁘고 반가운 전봉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곁에 붙잡아 두고 이것저것 물으며 그동안 걱정했던 걸 몸소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자칫 점잖은 체면이 깎일 수도 있었기에 그러지 못하고 불가부득 반가움 속에 능청만 살짝 섞은 거였는데, 하지만 원체 형편없는 눈속임이라 대번에 들통날 수밖에 없었다.


"에이, 그건 아닌 것 같소. 내가 볼 땐 우리들 중 총대장이 제일 안절부절하며 이 타격장을 가장 많이 걱정하는 것 같던데··· 설마하니 내가 잘못 본 거요?"


총관령 김개남이었다. 성격이 다소 급한 탓에 말도 다분히 직설적이었다.


"허허, 김 총관령. 생사람 잡지 마시오. 내 언제 그랬다고··· 그나저나 이진혁 타격장에게 들어 볼 이야기가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밖에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군막 안으로 어서들 들어갑시다."


총대장 전봉준이 김개남의 말을 얼렁뚱땅 받아넘기며 자신의 막사로 진혁을 이끌자 다른 간부들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들 모두의 입가엔 하나같이 흐뭇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사실 농민군의 총대장 전봉준은 태양처럼 강렬한 빛을 내는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방금 전 진혁을 대할 때처럼 주위 사람들을 자신의 빛으로 은연중에 물들이는 그런 존재였다. 한마디로 강렬한 빛을 내는 태양보다 세상을 빠짐없이 은은하게 비춰 주는 달 같은 존재가 바로 전봉준이었는데, 물론 이지러진 편월이 아닌 둥근 만월 같은 존재였다.


어쨌든 정읍 못미처 장성 끝자락의 밤하늘엔 비쩍 마른 남루한 달이 구름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숨겼다 반복하고 있었고, 그렇게 푹 이지러진 달이 숨바꼭질을 반복하는 사이 오늘은 어제가 되고 내일은 오늘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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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총장 : 앙천부지(仰天俯地。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본다) 19.09.26 120 1 11쪽
77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3) 19.09.25 40 0 31쪽
76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2) 19.09.24 35 0 26쪽
75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1) 19.09.23 36 1 32쪽
74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4) 19.09.20 45 1 18쪽
73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3) 19.09.19 38 1 24쪽
72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2) 19.09.18 45 1 25쪽
71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1) 19.09.17 57 1 23쪽
70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3) 19.09.13 53 2 20쪽
69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2) 19.09.12 45 1 24쪽
68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1) 19.09.11 51 1 32쪽
67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4) 19.09.10 55 1 16쪽
66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3) 19.09.09 46 1 23쪽
65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2) 19.09.05 49 2 21쪽
64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1) 19.09.04 51 2 24쪽
63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3) 19.09.03 45 1 29쪽
»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2) 19.09.02 44 2 22쪽
61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1) 19.08.30 72 2 32쪽
60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3) 19.08.29 74 1 30쪽
59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2) 19.08.28 62 1 29쪽
58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1) 19.08.27 62 2 27쪽
57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4) 19.08.26 61 1 20쪽
56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3) 19.08.23 53 1 15쪽
55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2) 19.08.22 51 1 26쪽
54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1) 19.08.21 54 2 25쪽
53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3) 19.08.20 69 2 26쪽
52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2) 19.08.19 65 2 28쪽
51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1) 19.08.16 71 2 25쪽
50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4) 19.08.15 59 2 18쪽
49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3) 19.08.14 72 2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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