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1894 노령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대체역사

완결

검늑삼
작품등록일 :
2019.02.22 18:26
최근연재일 :
2019.09.26 14:17
연재수 :
78 회
조회수 :
12,471
추천수 :
251
글자수 :
667,027

작성
19.09.17 14:02
조회
57
추천
1
글자
23쪽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1)

DUMMY

농민군이 집강소 통치에 전념하며 전라도 땅을 안정시키고 있을 때 나라 안의 정세는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천진(톈진)조약을 빌미 삼아 조선 땅에 발을 붙인 왜군이 유월 스무하룻날 경복궁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중전 쪽의 세력을 무너뜨린 다음 흥선대원군을 정계로 복귀시킨 뒤 김홍집 등 개화파 인사들로 하여금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게 했다. 명분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낡은 제도를 새롭게 고친다는 경장이었는데, 하지만 그 명분은 허울 좋은 하눌타리에 불과했고, 실상은 조선에서의 지배 세력을 넓히기 위한 왜놈들의 고차적인 술수였다.


어쨌든 그 갑오경장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의 섭정 시대가 다시 열렸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흥선대원군을 이용해 야욕을 달성하려는 왜놈들의 얄팍한 꼼수에 불과했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섭정 한 달 만에 뭔가를 간파한 흥선대원군이 청국에 서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자 왜놈들은 그 즉시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퇴진시켜 버렸다. 물론 강제로 이루어진 조치였다.


그렇게 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파병한 왜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농민군이 해산했음에도 불구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는커녕 도리어 내정 간섭까지 해 대며 조선 땅에 말뚝을 박고 있었다. 그러다 칠월 초하룻날에는 급기야 우리 조선에 파병된 청국의 군대에 선전포고까지 하는 등 조선 반도가 마치 제 놈들 세상인 양 제 놈들 마음대로 떡 주무르듯 하며 활개를 치고 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기어코 우리 조선 땅에서 청국의 군대와 전쟁을 벌여 청군을 몰아낸 왜군은 더욱더 기고만장해 대며 그때부턴 내정 간섭뿐만 아니라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온갖 행패를 다 부려 댔다.


그처럼 점점 확연해지는 왜군의 침략 행위는 조선 팔도 만백성에게 불안과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런 왜군을 조선 땅에서 축출하기 위해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은 비분강개하며 다시 봉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왜놈들이 경복궁을 침입해 내정 간섭까지 해 대며 우리 조선 땅이 마치 제 놈들 땅인 양 마구 유린해 대는데 조선의 백성인 우리가 모른 척하고 가만히 있어야 되겠소?"


"아니요! 절대 그럴 수 없소!"


"그렇소! 그리 몰지각한 왜놈들은 당장 몰아내야 하오!"


전봉준의 호소에 모여 있는 좌중 여기저기서 분노한 외침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뿐만 아니라 왜놈들이 우리 조선 땅에서 청국과 전쟁까지 벌이며 우리 강산을 피로 물들였는데, 이 땅의 주인인 우리가 모른 체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겠소?"


"그럴 수 없소! 당장 왜놈들을 몰아냅시다!"


"그럽시다! 당장 한양으로 올라갑시다!"


만산홍엽이 한창인 가을날이었다. 구월 초나흗날 전라도 삼례에 전봉준과 농민군 사천여 명이 모여 척왜를 부르짖고 있었다. 이들은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났다는 창의의 의미로 자신들을 의병이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모이자마자 삼례에 즉각 투쟁 본부를 설치하고 각 고을 집강소로 통문을 띄워 군사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결과 실로 놀립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사이 삼례에 모인 농민군의 수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깜짝 놀랄 만한 숫자였는데, 그 수가 무려 십일만 명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는데, 때마침 가을걷이까지 끝나자 그 이후로도 더 많은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여하튼 그 자리에서 농민군의 조직이 재편성되었는데, 이번에도 전봉준은 농민군의 대장으로 추대되었고, 손화중과 김덕명은 총지휘에 추대되었다. 그와 동시에 '한양으로 올라가 권귀를 쫓아내고 왜군을 몰아낸다'는 기치까지 내걸었는데, 이 소식은 곧장 조선 팔도 전역으로 들불처럼 퍼져 이번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심지어 강원도와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농민군이 들고일어났다.


그러나 그처럼 대군중이 모이며 거사 준비가 착착 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농민군은 삼례에서 한 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뜻하지 않은 일에 발목이 잡혀 한양으로 올라가는 날짜가 차일피일 의붓아비 제삿날 물리듯 미뤄졌기 때문인데, 그 사연인즉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로 다름 아닌 동학 북접과의 해묵은 노선 갈등 때문이었다.


사실 제이대 교주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 북접은 처음부터 종교적 입장을 고수하며 무력 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려 했었고, 한때 마지못해 봉기했을 때도 준비 부족으로 인해 민중의 해방은커녕 오히려 민중들에게 폐해만 끼친 적이 있었다. 그런 부끄러운 과오 때문에 이번에도 선뜻 나서질 못했는데, 대신 교주랍시고 최시형이 남접의 활동에 사사건건 개입하며 서로 간의 대립만 조정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북접과의 노선 갈등이 심화된 탓에 삼례에서 무려 한 달 가까이 허송세월을 보낸 농민군은 다행히 항왜 구국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극적인 화해를 이뤄 낸 뒤 비로소 충청도 논산으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월 초아흐렛날 북접이 이끄는 충청도 농민군과 논산에서 합류하게 되었는데, 하지만 그사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길목을 막고 있는 관군과 왜군 때문에 고작 약정 하나만 맺고 또다시 헤어져야 했다.


어쨌든 그렇게 논산으로 올라가기까지 수많은 곡절을 겪고 있을 때 그 한 달 동안 악재가 차곡차곡 쌓여 갔고, 부작용도 심해 농민군의 출혈이 상당했다. 먼저 한 달 동안 흐지부지한 상황만 계속되자 삼례에 모인 십일만여 명 중 대다수인 구만여 명이 제풀에 지쳐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고, 그 바람에 논산까지 함께한 농민군은 모종의 대비를 위해 따로 빼돌려 놓은 수천 명을 제외한 만여 명이 전부였다.


반면에 조정에선 농민군의 한양 입성을 막기 위해 그사이 다각도로 대책을 강구하며 그에 대한 방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조정은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를 두며 뼈아픈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포역포를 내세우며 농민군 토벌을 왜군에게 요청한 것인데, 그야말로 배알도 없는 짓거리로 미련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하기야 이미 조정을 장악한 상태에서 내정 간섭을 일삼던 왜군이었기에 조정의 그 조처는 의지에 의한 게 아니라 사실상 왜군의 강요에 의한 조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 여길 수밖에 없는 게 가뜩이나 조선 침략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었던 왜군은 조선을 자신들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려면 우선 먼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강력한 무력부터 선보여 겁을 줘야 했다. 그런 마당에 이처럼 좋은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왜군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 결과 관군과 왜군은 한양에서 남하하여 공주성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공주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여러 길목 중 하나로 농민군의 상경을 저지하기 위한 장소로 물색되다 최종 선택이 된 곳이었다. 그런 만큼 농민군에게 있어 공주 돌파 여부는 한양으로 진격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자 열쇠였다. 물론 관군과 왜군 입장에서도 공주가 농민군에게 뚫리면 곧바로 한양까지 밀릴 우려가 있었기에 공주 방어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런 형국이다 보니 농민군과 왜군 간의 싸움도 결국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김 총지휘, 그대 생각은 어떻소? 돌아가는 정황으로 보아 사활이 걸린 싸움이 될 텐데 말이오. 아무래도 군사를 다 끌어 모아 총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소?"


농민군의 대장 전봉준이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고 총지휘를 맡고 있는 김덕명에게 당금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내 생각도 그렇소, 대장. 전주나 광주에 있는 군사도 마저 불러 와야 될 것 같소. 하, 이거 참. 우리가 삼례에서 한 달을 허비하는 동안 저놈들이 저리 철저하게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사실 농민군의 주력 부대가 한양으로 진격하는 동안 혹시 남해안으로 왜군이 들이칠까 봐 전봉준과 농민군은 농민군 일부를 차출해 예비 부대 두 개를 만든 다음 하나는 손화중에게 맡겨 광주에 주둔시켰고, 남은 하나는 김개남에게 맡겨 전주에 주둔시켜 둔 상태였다.


"대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바로 우리 남접 농민군만으로 치고 올라갈 걸 그랬소."


새롭게 결성된 농민군 총지휘 김덕명의 후회 가득한 넋두리였다.


"김 총지휘, 그건 아니 될 말이오. 동학교에 몸을 담고 있는 교도가 어찌 교주의 말을 어길 수가 있겠소. 자, 아쉬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어차피 다 지난 일이니 그 얘기는 일단 접어놓고 차후의 일부터 논의해 봅시다."


전봉준은 전라도 삼례에서 만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논산까지 올라왔지만, 막상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터운 장벽과 마주하자 암담하기만 했다. 게다가 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한 북접 농민군과도 소통이 원활치 않자 공동전선은커녕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기 바빴다.


"대장, 무엇보다 북접의 농민군과 공조가 안 되는 게 가장 큰 문제요. 이번에도 첫 전투나 다름없는 목천 세성산 전투에서 관군과 왜군에게 크게 패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그 또한 독단적으로 나서지 말라고 우리가 그리 말렸건만, 우리 남접의 말은 당최 귀담아들을 생각을 안 하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소."


북접 농민군은 남접 농민군의 당부와 경고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관군, 왜군과의 첫 전투를 충청도 목천 세성산에서 벌였는데, 그 전투에서 숫자적 우위만 믿고 무턱대고 돌격하다 왜군의 강력한 무기에 밀려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며 대패하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내가 큰 실수를 한 게 아닌가 하고 자꾸만 마음에 걸리오. 북접 농민군 만 명을 우리에게 합류시킨다는 약정 때문에 우리 군사 수천 명을 뒤로 돌린 게 영 께름칙하기만 하니··· 아무래도 안 되겠소. 김 총지휘 말대로 전주와 광주로 돌린 군사를 다시 불러 올려야겠소."


손화중과 김개남에게 두 개의 부대를 맡겨 뒤로 돌린 이유는 왜군의 남해안 침투를 대비한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바로 북접 농민군 만 명이 남접 농민군 주력 부대에 합류하기로 한 약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초 약속과 달리 북접 농민군은 독자적으로 전투를 벌이며 약정을 이행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전봉준과 남접 농민군은 계획에 차질이 생격 애를 먹고 있었다.


그렇게 상호 간 신뢰에 금이 가며 철석같이 믿고 맺었던 약정까지 지켜지지 않자 결국 북접 농민군과 남접 농민군은 각자 다른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강력하고 막강한 왜군을 눈앞에 두고 둘이 굳건하게 합쳐도 시원치 않을 판에 그처럼 따로따로 갈라지게 되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사실 그 모든 게 전봉준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제이대 교주 최시형의 배후 조종 때문이었다.


"날짜가 촉박한데 가능하겠소, 대장?"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이진혁 타격장을 만나 봐야 될 것 같소."


"이 타격장은 왜? 아, 이 타격장을 전령으로 보낼 생각이요?"


"그때 전주성을 수성할 때 정찬호라는 자에게 짬짬이 말 타는 방법을 배우던데··· 한번 물어봐야 되겠소. 자, 같이 가 봅시다."


지금으로부터 약 반 년 전 진혁이 전라 관찰사 김문현을 뒤쫓아 갈 때 말을 탈 줄 몰라 불가부득 정찬호라는 자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그 당싱 전주에서 여산까지 다녀오는 동안 정찬호와 관계가 다소 친밀해진 진혁은 시간이 날 때마다 정찬호로부터 말 타는 법을 배웠었다. 비록 전라 감영에 머문 기간이 십여 일밖에 안 되었지만 진혁에겐 그 시간이면 충분했고, 결국 웬만큼 말을 탈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사실을 지금 전봉준이 홀연히 기억해 낸 것이다.


"이 타격장, 고생이 많네."


"어? 대장님··· 다같이 하는 일인데 고생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인 일로 이렇게 총지휘님까지 같이 오신 겁니까?"


진혁이 다른 농민군과 섞여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한쪽에 쌓다가 전봉준과 김덕명이 나타나자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일손을 멈췄다.


"다름이 아니고 반 년 전 전라 감영에 주둔할 당시 그때 말 타는 걸 배우는 것 같던데, 그때 익힌 승마술은 어느 정도인가?"


"예? 승마술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그냥저냥 웬만큼은 탈 수 있습니다, 대장님."


"음, 꽤 중요한 일이라 거두절미하고 다시 묻겠네. 장거리도 가능하겠는가?"


"글쎄··· 잘은 모르겠으나 말만 탈 줄 알면 거리는 그다지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정찬호에게 처음 승마술을 배울 때만 해도 진혁은 금방이라도 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배우다 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아 진혁은 적잖이 당황하며 꽤 애를 먹었었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거야 어떻게든 할 수 있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자세가 엉성했고 무엇보다 말이 제멋대로 달려나가려 해 진혁이 원하는 대로 가질 못했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말이 애물단지가 될 때가 많았는데, 그런 난감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배운 덕분에 이젠 제법 말과 호흡을 맞출 수도 있었고, 말을 타고 원행을 간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자신만만히 갈 수 있는 그런 경지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런가? 그럼 이 타격장, 자네가 내 부탁··· 아니, 농민군 대장의 특명을 받아 수행해 줘야 할 임무가 있네."


"예? 어, 어떤······."


"왜? 특명이라고 거창하게 말하니 두려운가?"


"아닙니다, 대장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두려운 것보다 갑자기 그리 말씀하시니 좀 부담스러워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뭐든 명령만 내려 주십시요. 대장님 명령이라면 그 어떠한 임무라도 반드시 수행해 내겠습니다."


"역시··· 이 타격장 자네가 그리 나올 줄 내 이미 짐작하고 있었네. 알았네, 내 자네를 믿고 농민군 대장으로서 특명을 내리겠네."


이렇게 해서 진혁은 농민군 진영에서 말 한 마리를 끌고 나와 남쪽을 향해 박차를 가했다. 물론 말을 끌고 나오기 전 귀동에게 들러 오만 잔소리를 다 하며 이것저것 신신당부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농민군과 관군, 왜군과의 첫 전투가 있기 직전인 시월 중순의 어느 날 진혁은 공주 인근에 주둔 중인 농민군 진영을 빠져나와 남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말 옆구리에 있는 박차는 굳이 가할 필요가 없었다. 전주를 거쳐 광주까지 가는 동안 말을 바꿔 탈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인데, 물론 중간에 두어 곳 정도 역참이 있었지만 이미 폐쇄된 데다 설사 정상적으로 운영된다 하더라도 진혁이 타고 가는 말이 관용으로 쓰는 역마가 아니었기에 바꿔 탈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 지치지 않도록 살살 몰아야만 했는데, 어차피 전주를 거쳐 광주까지 가려면 중간에 몇 번은 쉬어야 했기에 이래저래 시간이 허비되는 것은 매일반이었다. 그런 만큼 마음은 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여타 조건 때문에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아침나절에 공주를 출발해 논산, 여산, 삼례를 거쳐 점심나절이 한참 지날 때쯤 전주 송천골에 도착한 진혁은 그 즉시 농민군의 주둔지를 찾아 부대장 김개남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중차대한 임무가 더 남아 있었기에 전봉준의 특명만 급히 전한 뒤 곧바로 말에 올라야 했는데, 그렇게 끼니 때가 훨씬 지났음에도 중반은 고사하고 잠시 쉴 틈조차 없이 다시 말에 올라 남쪽을 향해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광주까지는 하루 만에 갈 수 없고, 이 속도로 달리면 태인이나 정읍에 도착할 때쯤 해가 저물 텐데··· 그럼 길에서 하룻밤을 노숙해야 하는데, 차라리 그럴 바엔 칠보 산중에 들러 하룻밤 쉬어 갈까? 아, 아냐. 귀동 아우도 없이 나만 나타나면 춘장 어른이나 자당 어른께 괜히 심려만 끼칠 테고··· 우쒸, 괜히 칠보 산중을 떠올려서 또 아른거리게 만드네. 어? 저 주막집은? 아, 바로 저 주막집에서 서진 낭자를 처음 봤었지? 아니지, 그때는 기생오라비였지. 큭큭······.'


불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산자락마다 이미 황량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사자락이 한동안 주마간산으로 비치다 어느 순간 고갯마루의 주막집이 보이자 진혁의 뇌리에서 문득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가 이른 봄이었으니 벌써 반 년이 훌쩍 넘었구나. 그나저나 아버지께서는 잘 계시려나? 아버지, 잘 계시죠? 이 소자가··· 많이 보고 싶습니다.'


진혁이 그렇게 말 잔등이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아버지 이경륭과 서진을 그리워하는 사이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어느덧 서산마루를 향해 훌쩍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진혁을 태운 말은 어느새 금구와 금산을 지나 태인에 도착하고 있었다.


잠시 후 태인 피향정 앞을 지나던 진혁이 다급히 고삐를 잡아당겼다.


"워, 워어!"


휘이이힝!


진혁은 다급히 말을 세우고 훌쩍 뛰어내렸다. 비틀걸음으로 마주 오던 취인이 갑자기 말이 지나는 길 가운데로 넘어졌기 때문이다.


"괜찮으시요? 어디 다친 데는 없소?"


"으씨, 뭐야? 괜찮으니 상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시요."


진혁이 넘어진 취인에게 다가가 부축이며 일으켜 주려고 하자 취인이 진혁의 손길을 뿌리치며 도움을 거부했다. 그리곤 엉거주춤 일어나 자신의 두루마기를 한 손으로 대충 털더니 또다시 길 한가운데를 차지하곤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런데 그 취인은 한쪽 손을 못 쓰는 불구였는데, 긴 자상의 흔적이 보기 흉하게 남아 있었다.


'나이도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저녁도 되기 전에 술이라, 그것도 요즘 같은 세상에··· 불구인데도 다행히 팔자가 좋은 사람이로군.'


진혁이 다시금 말에 올라 정읍 방면으로 떠나자 길 가운데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던 취인이 또다시 넘어졌다.


"으윽··· 송, 송서진······."


그런데 넘어졌던 그 취인이 주춤주춤 일어서며 난데없이 서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사실 그 취인은 다름 아닌 고남철이었는데, 고남철은 요즘 그 어떤 이유 때문에 이렇게 술독에 빠져 지내고 있었다.




* * *




올봄이었다. 고남철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서진에게 낭패감을 안겨 주려다 도리어 자신이 낭패를 당해 한쪽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 그렇게 한쪽 손이 불구가 되었음에도 그냥저냥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작은 위안거리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위안거리는 다름 아닌 서진이 동생 서연과 함께 전라 감영으로 끌려간 거였다. 온갖 고초를 당하고 있을 게 뻔한 만큼 고남철은 그동안 울분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그 사실을 위안거리로 삼아 가며 치솟는 울분을 삭이고 또 삭여 왔다.


그러나 그동안 위안거리로 삼아 왔던 그 사실이 실상은 사실이 아니고 거짓이었다. 다시 말해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그 사실이 실제론 거짓된 진실이라는 걸 고남철은 며칠 전에야 비로소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것인데,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 내가 정읍현의 사가에 인사차 들렸다가 그 이야기를 동문생들에게 전해 들었다."


"아, 아버지. 그게 사실입니까? 그 두 계집이 전라 감영에 아닌 칠보에 살고 있다고요? 그것도 아주 멀쩡하게요? 혹, 혹시 아버지께서 잘못 들은 게 아닙니까?"


"아니다. 나도 송유석 그놈이 괘씸해서 이 동문 저 동문에게 몇 번을 확인해 봤는데, 여름이 시작될 무렵 정읍현에 나타나 집을 팔고 칠보로 이사 갔다고 하더구나. 더구나 두 딸 혼례에 써야 한다며 세간살이까지 아주 꼼꼼히 다 챙겨 갔고··· 내 송유석 그놈을 만나기만 하면, 으드득······."


며칠 전 아버지 고유천으로부터 그 얘기를 전해 들은 고남철은 그때부터 날이면 날마다 칠보를 넘나들었다. 하지만 칠보 고을이 아닌 산중에 살고 있는 서진이 눈에 띌 리가 없었고,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별무소득 없이 허비하다 혹시나 하고 기억 한편에 남아 있는 이진혁이라는 이름으로 수소문을 해 보았다.


그런데 구태여 수소문을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옆에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그저 별 의미 두지 않고 슬쩍 물어봤는데, 그 사람이 이진혁에 대해 아주 상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진혁요? 우리 칠보 집강소의 집강이 이진혁인데 어인 일로 그이를 찾으시요?"


"예? 그, 그놈이 집강소 집강이라고요? 젠장칠··· 그년이나 그놈이나 뭐 이리 복잡한 게 많은 거야?"


"어라? 이 사람 좀 보소? 지금 우리 이진혁 집강한테 욕을 한 것이요? 어째 수상한데··· 어이, 자네들 이리 좀 와 보게. 그리고 거기, 자네들도 이리 좀 와 보게. 여기 이 사람이 우리 이진혁 집강한테 적의를 보이며 뒤를 캐고 다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수상한 자 같네."


"예? 그게 무슨 소리요, 동운 형님?"


"허, 감히 어떤 자가 우리 이 집강의 뒤를 캐고 다닌다는 겐가?"


그렇게 말 한마디 실수하는 바람에 그 즉시 칠보에서 쫓겨난 고남철은 결국 서진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 고남철은 이를 갈아 대며 술독에 빠져 지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진혁이라는 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칠보 근처엔 아예 발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송서진 네 년도 피눈물을 흘리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반드시······.'


방금 전에 마주친 사람이 이진혁이라는 사실을 고남철은 꿈에도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진혁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에 마주친 사람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해코지를 가해 생사존망의 기로에 처하게 될 줄은 진혁도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간사인데 달포 후쯤의 일을 벌써부터 알 리가 만무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1894 노령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8 총장 : 앙천부지(仰天俯地。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본다) 19.09.26 120 1 11쪽
77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3) 19.09.25 40 0 31쪽
76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2) 19.09.24 35 0 26쪽
75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1) 19.09.23 36 1 32쪽
74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4) 19.09.20 45 1 18쪽
73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3) 19.09.19 38 1 24쪽
72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2) 19.09.18 45 1 25쪽
»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1) 19.09.17 58 1 23쪽
70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3) 19.09.13 53 2 20쪽
69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2) 19.09.12 45 1 24쪽
68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1) 19.09.11 51 1 32쪽
67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4) 19.09.10 55 1 16쪽
66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3) 19.09.09 46 1 23쪽
65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2) 19.09.05 49 2 21쪽
64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1) 19.09.04 51 2 24쪽
63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3) 19.09.03 45 1 29쪽
62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2) 19.09.02 44 2 22쪽
61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1) 19.08.30 72 2 32쪽
60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3) 19.08.29 74 1 30쪽
59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2) 19.08.28 62 1 29쪽
58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1) 19.08.27 62 2 27쪽
57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4) 19.08.26 61 1 20쪽
56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3) 19.08.23 53 1 15쪽
55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2) 19.08.22 51 1 26쪽
54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1) 19.08.21 54 2 25쪽
53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3) 19.08.20 69 2 26쪽
52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2) 19.08.19 65 2 28쪽
51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1) 19.08.16 71 2 25쪽
50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4) 19.08.15 59 2 18쪽
49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3) 19.08.14 72 2 24쪽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검늑삼'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