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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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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늑삼
작품등록일 :
2019.02.22 18:26
최근연재일 :
2019.09.2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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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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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 : 앙천부지(仰天俯地。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본다)

DUMMY

최초 고부 봉기부터 시작해 갑오년 한해 동안 전개되었던 동학 농민 혁명은 농민군의 대장 전봉준이 체포되자 모든 막이 저절로 내려졌다. 결국 '새 세상을 열어 보자'는 농민군의 열망은 전봉준이라는 구심점을 잃고 이리저리 표류하다 끝내 좌초되고 만 것인데, 실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막이 그리 내려졌음에도 실질적으론 다 끝난 게 아니었다. 파란만장했던 갑오년이 저물고 을미년(1895년)이 밝자마자 전라우도로 피신해 재기를 다짐하고 있던 손화중마저 몇몇 간부들과 끝내 체포되고 말았는데, 그렇게 발본색원 당하는 농민군 간부들은 붙잡힘과 동시에 그 즉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을미년 삼월 스무아흐렛날 전봉준을 비롯해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최영남 등 한양으로 압송된 농민군 대장과 간부들은 전옥서에서 교수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조용히 사라져 갔다. 태양력으론 사월 이십삼 일이었는데, 하지만 이때까지도 조선의 허아비 임금이나 중전, 그리고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미처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내정 간섭이나 일삼는 왜군은 우리 조선에 있어 백해무익한 존재이자 악한의 무리나 다름없었다. 그런 왜군을 몰아내려 했던 농민군을 외려 그 왜군의 힘을 빌려 처단한 그 결정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피바람이었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로부터 다섯 달 후인 을미년 팔월 스무날 새벽 갑시(오전 5시) 손에 장검을 든 왜놈들이 경복궁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중전의 침전인 건청궁을 둘러쌌다. 그리곤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며 눈에 불을 켜고 중전을 찾았는데, 오로지 중전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왜놈들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 댔고, 그럴 때마다 그 무자비한 칼질에 궁녀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갔다.


그렇게 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쓰러져 가는 궁녀들과 함께 중전 민비도 그 미친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끝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중전 민비는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사후에도 온갖 음행적 치욕을 다 당한 뒤 고작 한 줌의 재로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왜놈들의 집요하고 끝이 없는 야욕은 엽기적인 악행으로까지 이어지며 치를 떨게 했는데,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만행이 아닐 수 없었다.


예언컨대 왜놈들의 이런 못된 근성과 야만적인 민족성, 변태적인 성욕과 비인간적인 인간상은 그들의 후세까지 자자손손 이어질 게 틀림없었다.


아울러 내친김에 하나 더 대언장담하며 예언하자면 그에 대한 인과응보로 정확히 반백 년 후 왜놈들 나라에 커다란 날벼락 두 방이 사흘 간격으로 떨어져 왜놈들 수십만 명이 비명횡사할 게 분명했다.




* * *




해가 바뀐 을미년에도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렇게 봄이 찾아와 완연해질 때쯤 칠보 산중과 산내골 화전촌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는데, 그 분주함은 마치 이사를 가기 위해 세간을 미리 꾸리는 것처럼 그리 보였다.


미상불 어느 봄날 칠보 산중과 산내골 화전촌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길을 나섰다. 머리에 온갖 세간을 인 아낙네들과 남정네들의 등에 지어진 커다란 등짐으로 보아 이사 행렬이 분명했는데, 그 행렬의 면면을 살펴보니 송유석을 비롯한 서진, 서연 자매와 귀동을 비롯한 귀동 아범과 귀동 어멈, 그리고 김종삼의 식구들을 비롯해 화전촌 사람들 몇몇과 그들의 식구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의외의 인물들도 몇 명이 더 있었는데, 다름 아닌 정의석과 그의 식솔들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관군에게 붙들려 갔던 진혁이 낭순이와 함께 그 행렬의 맨 앞에 있었다.


사실 그렇게 되기까지 적잖은 사연이 있었는데, 그 내막인즉슨 이랬다. 진혁은 칠보 산중에서 체포되어 태인 관아로 끌려간 다음 하룻밤을 태인 관아의 옥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전라 감영으로 압송되어 전라 관찰사와 초토사로부터 다음날 참수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곧바로 미어터지는 감영의 옥에 투옥되었다. 그런데 천만몽외로 그곳에서 구원의 손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몽외지사가 아닐 수 없었다.


"어? 그, 그대는 한성택 종사관 나리의 조카가 아니시요? 아니, 어쩌다 이리 붙들려 왔소? 좀 더 꼭꼭 잘 숨어 있지 않고······."


"나를 아십니까?"


"아, 알다마다요. 나부터 시작해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 태반이 그대에게 목숨을 구명 받지 않았소. 어디 그뿐이요? 그대의 동생이라는··· 거, 귀동이라는 청년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우리들을 얼마나 살뜰하게 챙겨 줬는데··· 다행히 그 청년은 붙잡히지 않은 모양이구려."


"귀동 아우가? 아, 그러면 그때··· 제 숙부님이랑 함께 옥에 갇혀 계셨던 분인가 보군요."


"예, 맞습니다. 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불편하더라도 잠시만 참고 계세요. 곧 우리가 꺼내 드릴 테니······."


"예? 나, 나를 꺼내 줄 수 있다고요? 어, 어떻게······."


"쉿! 일단 조용히 하고 계시요. 난리 통이라 이 옥도 미어터질 만큼 꽉 차서 듣는 귀가 많으니··· 사실 이곳 감영은 행정 업무를 보는 관원부터 나같은 옥장까지 그대가 살려 준 사람들이 거의 다 맡고 있소. 그러니 그대 한 명 빼돌리는 거야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지 않겠소. 그리 알고 잠시만 참고 계시요."


그렇게 해서 진혁은 거의 죽을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사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 * *




"진혁 형님, 가는 동안 이 많은 인원을 다 먹이려면 고생 좀 해야겠네요."


"그거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잖아."


"어, 어떻게요?"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야, 귀동 아우가 끼니 때마다 조금씩만 먹으면 되지."


"아쒸··· 또, 이럴 거예요?"


"귀동 아우도 알잖아, 귀동 아우를 약 올리는 게 내 유일무이한 낙이고 취미라는 걸. 큭큭······."


한창 봄이 절정일 무렵 칠보 산중을 떠난 행렬은 노령 산줄기를 따라 무주 덕유산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백두대간으로 옮겨 타고 계속해 북상했는데, 북상하는 동안 넉넉치 못한 식량 사정 때문에 진혁과 귀동, 낭순이는 간간이 산속으로 이동하며 행렬이 먹을 식량을 일부분 조달하기도 했다.


그렇게 백두대간을 타고 태백산, 설악산, 금강산, 두류산을 거쳐 여름이 끝날 때쯤 행렬은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인근에 도달해 있었는데, 행렬의 발길이 닿는 산등성이마다 그야말로 절경의 극치가 따로 없었다. 말 그대로 대장관이었다.


"아! 정착지를 찾는 걸음만 아니라면 이 심산유곡에서 그저 하릴없이 유유자적하며 이 상쾌함과 즐거움을 한없이 만끽할 수 있을 텐데··· 낭순아, 우리 급한 일도 없는데 이곳에 며칠 머물며 신선놀음이나 한번 해 볼까?"


크르릉!


"아, 대저 도련님이 그런 생각을 할 만하네요. 사방팔방이 정말 최고의 경치예요."


"아쒸, 낭순이 저게··· 그리고 서진 누님, 이럴 땐 진혁 형님을 뭐라 나무래야지··· 거기에 동조를 하면 어떡해요?"


"맞아, 언니. 가져온 식량도 거의 다 동나서 큰 오라버니가 게으름 피우면 우리 다 굶어죽는단 말야."


귀동과 서연이 무람없이 뭐라고 하든가 말든가 아랑곳하지 않고 진혁과 서진은 손을 잡고 마치 시간을 멈춰 세우려는 듯 아주 느릿한 동작으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자 진혁과 서진의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천산만학의 산수화가 연속적으로 펼쳐졌다.


"서진 낭자, 아름답죠?"


"예, 도련님. 너무 아름다워요."


대자연이 빚어 내는 그 장엄한 절세 풍광이 마치 서른여섯 폭 산수 병풍을 연상케 하듯 진혁과 서진의 눈에 오롯하게 펼쳐졌다. 그렇게 진혁과 서진의 눈은 병풍틀이 되었고, 사방팔방의 절경들은 말 그대로 병풍차가 되어 서른여섯 폭이나 되는 산수 병풍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유로움도 잠시 귀동과 서연의 성화에 행렬은 다시 두만강 줄기를 따라서 움직여야 했다.


"서연 낭자, 오늘 저녁때 끼니는 뭘 먹고 싶어요? 혹시 고기 먹고 싶지 않아요?"


"또, 그 노래를 타령 조로 불러 보라고요? 그럼 큰 오라버니, 불러 드리면 산토끼 고기 먹게 해 줄 거예요?"


"그야 당연하죠. 그렇지, 낭순아?"


크르릉!


"좋아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령산의 녹두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가고, 우리네도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령 들의 녹두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 때리니 우리네도 매 맞는다··· 새야 새야 녹두새야, 노령 산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은 새는 아버지의 넋이로고, 죽은 엄마 넋이오니 우리네의 넋이로다··· 새야 새야 녹두새야, 조선 팔도 파랑새야. 너는 어이 날아왔나. 왜 쪽발이 몰아내고, 솔잎 댓잎 푸릇푸릇 봄 알리러 날아왔지."


그렇게 다시 여정이 시작되고 닷새쯤 지나 행렬은 최종 목적지인 두만강 하류의 커다란 섬에 도착했다. 그 섬은 행렬이 정착지로 정한 곳으로 예전에 이경륭이 살아생전 말해 줬던 바로 그곳이었다.


"자, 다 왔습니다. 이곳인데··· 어떻게 마음에 드세요?"


"아, 아버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을 줄이야."


"언니, 너무 아름다워······."


진혁을 중심으로 해서 양옆으로 서진과 서연, 그리고 함께 온 사람들 모두가 쭉 늘어서서 앞쪽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다들 입을 헤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두의 눈앞엔 새파란 하늘과 맞닿은 허허벌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벌판 군데군데엔 키를 훌쩍 넘는 억새풀들이 군락을 이루어 살랑거리고 있었는데, 그 억새풀 사이사이엔 노란 야생화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활짝 피어 있었다.



<끝>


작가의말

<글쓴이의 말>


  팔순이 넘은 노모를 몇 년 전부터 요양 병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요양 병원과는 거리가 60km 이상 떨어져 있는 데다, 하루하루가 먹고 살기 바쁜 일상이다 보니 요양 병원에 계시는 노모께는 한 달에 고작 한두 번 들어다뵈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가끔씩 노모를 뵙고 돌아올 때마다 으레 아릿한 눈물이 앞을 가렸고, 그럴 때마다 차를 도로변에 세워야만 했습니다.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런 병문안 길에 이따금씩 두 아들이 동행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두 아들과 함께 요양 병원에 다녀오는 도중이었습니다. 아리고 북받치는 감정에 스스로의 하소연 삼아 '나중에 만약 이 아비가 너희들에게 폐를 끼칠 것 같으면 그땐 내 스스로 너희들 곁을 떠날 것이다'는 말을 두 아들에게 건넸다가 본전도 못 찾고 도리어 된통 혼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적으로 배신을 당하며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졌고,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곧바로 구석이 되었습니다. 워낙 큰 사건이라 훗날 두 아들이 취직을 한다든지 결혼을 할 때 아비라는 존재가 헤살 요소가 될 게 분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 풍토상 두 아들에게 커다란 연좌의 굴레까지 씌워질 게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만큼 큰 사건이다 보니 두 아들의 삶에서 아비라는 존재가 언급될 때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 대신 침묵 내지 부득이한 거짓말로 대충 얼버무릴 것 같았습니다. 아비라는 존재로 인해 두 아들이 그렇게 허구한 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거나, 아니면 밥 먹듯 거짓말을 하며 살 거라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두 아들이 당당함을 잃어 가며 위축된 모습으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앞날이 창창한 두 아들에게 거짓말이나 일삼게 할 순 더더욱 없었습니다. 두 아들에게 비굴한 행동이나 구차한 거짓말을 하게 하느니 차라리 '돌아가셨습니다'라는 이 간단명료한 한마디를 제공해 주는 게 오히려 더 낫겠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불현듯 들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숙려와 장고가 거듭되었고, 결국 그렇게 해 주려고 세 번을 시도했습니다. 처음 두 번은 마지막 순간이다 싶을 때 혼몽하고 희미해진 정신에서 큰 아들 녀석과 작은 아들 녀석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생에서 마지막이라는 안녕을 고하기 위해 부른 것인데, 그 녀석들은 자신들을 부른 줄 알고 매번 시공을 초월하며 득달같이 달려왔습니다. 그리곤 순식간에 매듭을 풀어놓고 돌아갔습니다. RNTC 후보생 시절부터 현역 부사관 시절까지 포획 훈련 때마다 각종 매듭과 올무를 매었지만 단 한 번도 풀리지 않았던 완전무결한 매듭과 올무였습니다. 그런 매듭이 마지막 순간마다 연거푸 풀렸는데, 그야말로 신이하기 그지없는 괴사였습니다.


  그 와중에 유치장 CCTV 감시에 발각이 되어 응급조치를 받고 멀쩡히 되살아났습니다. '못난 아비의 아들들로 태어나 줘서 고맙고, 그동안 너희들과 부자지간으로 살 수 있어 행복했다··· 혹여 이 아비가 보고 싶을 때에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봐라. 항상 내려다보며 너희들을 지켜 주고 있을 테니··· 지금까지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으며, 저세상에 가서도 영원히 사랑하마······.' 등등의 내용이 담긴 유서도 빼앗겼고, 빼앗긴 유서는 검찰을 거쳐 곧바로 재판부로 넘겨졌습니다.


  그 후에도 결심은 변함없이 확고부동했습니다. 이미 마음으로 작정한 이상 변함이 있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반면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했습니다. 그 두려움 또한 의지와 상관없이 뇌리 한쪽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 하지만 두 아들의 창창한 앞날에 걸림돌이 되고, 짐이 될 수는 없었기에 그 두려움을 애자지정으로 씹어 삼켰습니다.


  '형님, 그 정도 양이면 두세 번도 죽을 수 있는 치사량입니다.' 라는 말에 다시금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승 문턱에서 망지소조하며 비몽사몽만 겪었을 뿐 또다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유서만 압수당했습니다. 결국 마음은 이미 세상을 등졌는데, 몸은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그런 꼴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간쯤의 한 귀퉁이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머릿속을 강타하는 뭔가에 그 어떤 걸 홀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막상 깨닫고 보니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어차피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하니까······.'하는 불민하고 단순한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그 이면의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별이라는 슬픔을 간직한 채 그 슬픔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살아야 될 두 아들의 미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두 아들에게 짊어지운 짐을 죽음을 내세워 빨리 거두어들일수록 그만큼 더 오랜 시간을 사별이라는 슬프고 아픈 기억의 또 다른 짐으로 대신 짊어지운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그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야누스의 얼굴이 되어 변덕을 부려야 했습니다. 저승길이 아닌 살길을 모색해야 했는데, 그야말로 여반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때마침 신문에 실린 '당신도 책의 저자가 될 수 있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사고 직후 면회 온 작은 아들이 '그 안에서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으면 책이라도 한번 써 봐.'라고 한 말이 번뜩 떠올랐습니다. 눈물이 절로 나는 아린 기억이었지만 동기 부여가 되었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날부터 바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너무나 어려워 앞이 깜깜했습니다. 흔히 시작이 절반이라고 하던데 천만의 말이었습니다. 절대 아니었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는데, 굳이 그 상황을 비유하자면 이도 안 난 게 콩밥을 씹으려 했고, 심지어 뼈다귀를 추렴하겠다는 딱 그 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걷기도 전에 뛰려고 한 꼴이었습니다.


  더욱이 소위 말하는 책가방 끈도 그다지 길지 않은 데다, 학창 시절 마지막 시험 석차가 58분의 57등일 정도로 공부도 별 볼일 없었습니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모르는 것 천지였고, 궁금한 것은 그 끝이 없었습니다. 그저 막막하기만 했는데, 하지만 이 안에서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루 24시간을 사방의 좁은 벽과 함께하는 여건인데, 아니 할 말로 벽을 보고 물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 난관 중에서도 특히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헛갈리는 띄어쓰기와 한 번씩 맞닥뜨릴 때마다 글쓰기를 멈춘 채 소유하고 있는 책 몇 권과 신문을 뒤져야만 했습니다. 오직 그 방법밖엔 달리 없었는데, 그럴 때가 한두 번도 아니고, 허다하게 많았습니다.


  구상과 전개도 오로지 머릿속의 기억에만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전개의 폭도 그다지 넓혀지지 못했고, 무엇보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이 밑바탕 되는 부분에선 다소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못내 아쉬웠고, 그런 만큼 스마트폰을 비롯해 인터넷이 연결된 기기들이 간절한 정도로 그리웠습니다.


  그처럼 숱한 난관과 우여곡절을 거치며 시작한 지 57일이 지나자 얼렁뚱땅 초고가 마련되었고, 그 다음날부터 윤색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양파 껍질처럼 벗겨져 사라지는 게 너무 많아 종국에는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65일째 되는 날부터 교정을 하며 옮겨 쓰기를 시작했고, 마침내 시작한 지 91일째 되는 날 비로소 최종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 후 줄곧 방치해 뒀습니다. 그러다 징역살이의 일환으로 다시 꺼내 들고 한 달 보름에 걸쳐 윤문을 한 번 더 거쳤습니다.


  좁은 독방에서 넉 달하고도 보름 남짓을 교도소에서 파는 360원 노트 40권, 700원 샤프 1개, 190원 샤프심 2통, 180원 지우개 3개, 250원 검정 볼펜 20개, 파랑 볼펜 3개, 빨강 볼펜 3개, 그리고 940원 수정 테이프 12개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런 내막과 과정을 오롯이 품어 안고 완성된 이 소설은 두 아들을 사랑하는 한 못난 아비의 고백을 어설픈 글로 대신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세상과 단절된 채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을지언정 감옥에서나마 내 자신이 살아 숨 쉬며 존재하고 있음을 자증하고픈 몸부림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넉 달 보름의 시간이 주제꼴에 맞지 않게 미련과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물론 그 못지않게 스스로의 부끄러움과 같잖음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기도 합니다.


  끝으로 이 소설을 쓸 수 있도록 저승의 문턱에서 이승으로 꼬집어내 주신 순천교도소 배상규 주임님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항상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신 서영준, 송무석, 남정락 주임님께 이 기회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징역살이 여러 날 중의 어느 날.

  이  경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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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3) 19.09.25 40 0 31쪽
76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2) 19.09.24 35 0 26쪽
75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1) 19.09.23 36 1 32쪽
74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4) 19.09.20 45 1 18쪽
73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3) 19.09.19 38 1 24쪽
72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2) 19.09.18 45 1 25쪽
71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1) 19.09.17 58 1 23쪽
70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3) 19.09.13 53 2 20쪽
69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2) 19.09.12 45 1 24쪽
68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1) 19.09.11 51 1 32쪽
67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4) 19.09.10 55 1 16쪽
66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3) 19.09.09 46 1 23쪽
65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2) 19.09.05 49 2 21쪽
64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1) 19.09.04 51 2 24쪽
63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3) 19.09.03 45 1 29쪽
62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2) 19.09.02 44 2 22쪽
61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1) 19.08.30 72 2 32쪽
60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3) 19.08.29 74 1 30쪽
59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2) 19.08.28 62 1 29쪽
58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1) 19.08.27 62 2 27쪽
57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4) 19.08.26 61 1 20쪽
56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3) 19.08.23 53 1 15쪽
55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2) 19.08.22 51 1 26쪽
54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1) 19.08.21 54 2 25쪽
53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3) 19.08.20 69 2 26쪽
52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2) 19.08.19 65 2 28쪽
51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1) 19.08.16 72 2 25쪽
50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4) 19.08.15 59 2 18쪽
49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3) 19.08.14 72 2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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