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자가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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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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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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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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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2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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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다(2)

DUMMY

볼일을 순조롭게(?)끝낸 알렌은 전직 대마법사를 아군으로 받아들였다.


무슨 마법을 사용하는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전생에 어떤 사고를 쳤는지 대략적으로 들어보았다.


하이드는 매우 적극적으로 마녀의 험담에 가까운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또 그 마녀가 하필이면 제국의 황족을 건드려서...”

“응. 그래.”


알렌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한쪽 귀로 하이드의 이야기를 흘러들었다. 시간도 없는데다 저런 감정 섞인 정보를 들어봤자 큰 소득도 없었다.


하이드의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마녀의 사고기록을 보고받았을 때, 알렌은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 하이드. 둘이 너무 오래있으면 하피가 걱정할 수도 있고, 너도 그만 쉬어야 할 테니까.”

“아..그렇군. 배려해줘서 고맙다.”


하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놔두었던 모자와 로브를 집어 들었다. 로브를 두르고 모자를 써서 모양새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고정시킨다.


알렌은 의자에서 일어나 앞장섰다. 그리고 문까지 다가가 단번에 문고리를 잡고 열어젖혔다.


원래는 온갖 마법적 프로텍트가 걸려있는 문의 형상을 한 마법진이나 다름없었지만, 알렌의 앞에선 그냥 평범한 문과 다를 바 없었다.


“아, 이야기는 잘 끝마치셨나보군요. 주인님.”


침대에 앉은 채 하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루시가 곧장 일어서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반겼다.


그 옆에 있던 하피가 머리를 홱 돌리더니 알렌과 하이드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딱 봐도 또 ‘그걸’ 넘겨짚고 가려는 것 같아서 먼저 알렌은 한 발 빨리 선수를 쳤다.


“밀실에 두 남녀가 들어갔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야. 단순히 의뢰를 하나 더 받고 그 대가로 하이드와 동맹을 맺었을 뿐이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안 일어났으니까 괜한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닫고 있어.”


거기까지 말한 알렌은 방금 스스로가 내뱉은 말을 다시금 빠르게 머릿속에서 재생해보았다.


뒤로 갈수록 말투가 더러워지는 걸 보니 예상했던 대로 피로와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모양이다.


평소라면 신사적인 태도를 고수했겠지만, 가뜩이나 짜증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 눈치까지 볼 정도로 자신의 성격은 좋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렇듯 말투가 달라지는 건 스스로의 정신력이 상당수 깎여나간 상태라는 걸 의미했다.


‘빨리 쉬어야겠군. 하나만 더 확인하고.’


알렌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하피가 문득 힘 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런 게 아니야. 다만...조금 안심하고, 조금 허탈해졌을 뿐이지.”

“그래.”


알렌은 더 이상 하피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가 루시에게 눈짓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많이 유익한 대화였어요.”

“나도 마찬가지였어. 네 주인 따라서 잘 가렴.”

“예.”


인사를 마친 루시가 알렌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윽고 넒은 건물엔 다시금 하이드와 하피 둘 만이 남게 되었다.


*


하피는 하이드에게서 등을 돌린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시설이 참 좋죠? 고깝긴 해도 역시 귀족은 다르단 말이에요.”

“네가 원한다면 계속 여기에서 지내게 해줄 수도 있다.”

“에이, 괜찮습니다. 전 태생이 도둑이라서 이런 안락한 생활도 좋지만, 역시 가끔은 남의 걸 탐하면서 몸을 굴리지 않으면 안 돼요. 거기다 귀족들은 언제 등을 찌를지 몰라서...‘


하이드는 말을 하면서 침대로 걸어가 똑같이 그 끝에 걸쳐 앉았다. 가진 힘과는 달리 가벼운 그녀의 몸은 침대에 일으키는 파문조차도 작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말해 보거라.”


하이드가 부드러운 어조로 물어왔다. 서로 등을 마주한 두 사람은 등 너머로 상대의 목소리를 들었다.


“괜찮은 거 맞죠?”

“대공자는 자신의 것을 아끼는 사람이다. 그의 밑으로 들어간다면 그는 확실하게 우리들을 보호해줄 것이다.”

“그럼...그 대가는 뭐였나요?”


하피가 물었고, 하이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공자는 분명 자신의 사람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판 남인 자신들이 그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호벳이나 레폴과는 다르다. 둘은 알렌의 비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렌의 힘을 얻기 위해서 둘은, 아니. 하이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별 것 아닌 금제 하나뿐이다.”


하이드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심장은 여전히 힘차게 박동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금제에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상대가 하피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하하...그 자식 성격에 대충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결국 계약만 지키면 그만인 문제다.”

“그런가요.”


잠시간 말이 끊겼고, 이번에도 먼저 말꼬리를 튼 것은 하피였다.


“저 불안했습니다. 혹시나 그놈이 그대로 하이드를 죽여버리는 게 아닌가, 하고. 그래서 막 문으로 쳐들어가거나 아예 루시를 인질로 삼아보려고도 했는데...참았습니다.”


단지 참았다. 그 말뿐이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에 몇 번이고 고뇌하고 넘어질 뻔 했다.


하지만 결국 참았다.


“하이드가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저 같은 게 끼어들어서 일을 망치고 하이드가 저한테 실망하는 건 더 싫었고.”

“잘했다. 네 덕분에 일이 잘 풀렸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아요.”

“안 하는 것 보단 낫다.”

“그런가?”


하피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키득 웃음을 흘렸고, 하이드는 문득 자신의 입 꼬리가 살짝 씰룩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네가 설령 불안에 못 이겨 일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너에게 실망하는 일 따윈 없었을 거다.”

“삶에 미련이 없으니까?”

“그렇지.”


하피의 웃음이 뚝 하고 그쳤다. 삶에 미련이 없다. 그것은 그녀가 하이드와 동행한 이후로 줄곧 들어오던 말이었다.


함께 다니며 자신은 점점 더 삶에 애착이 많아졌지만, 하이드는 반대로 점점 더 삶에 미련이 없어졌다.


마치 억지로 얻은 생 따윈 어떻게 망가지든 알 바 아니라는 듯이.


태생이 마법사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녀와 같이 폭주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하이드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성을 유지했지만, 가끔씩 자신의 모든 걸 아무렇지도 않게 판돈으로 올리는 순간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대공자에게 도박을 했고, 운이 좋아 그 도박이 대공자에게 먹혔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하이드는 저 방에서 대공자에게 죽었겠지.


하피는 이미 지나간 가능성을 상기하며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하이드가 바로 옆에서 죽었을 수도 있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 사실이 못내 비참했고, 허무했다.


나서지 못한 것은 비단 무력의 부족함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하이드의 삶이었고, 하이드의 목숨이었다. 과연 하이드가 자신의 목숨을 걸었을 뿐인 일에 고작해야 타인인 자신 따위가 끼어들어도 되는 것일까?


몇 번이고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스스로의 내면에서 돌아오는 것은 부정뿐이었다.


그렇기에 나서지 못했고, 나서지 않았다.


“하이드.”


하피가 나직이 하이드의 이름을 불렀다.


“왜 그러냐.”


하이드가 답했다.


“죽지 마세요. 자기 일에 왜 귀찮게 참견 하냐고 짜증내실 수도 있지만...그래도 전 하이드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탁할게요.”


하이드는 환생 때문에 시궁창에 박혔던 자신의 인생에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다. 하이드 덕분에 자신은 다시금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두 번째 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자신의 곁에는 언제나 하이드가 있었다. 이제 와서 떨어지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걱정 마라. 마녀를 죽이기 전까진 나름대로 살아볼 생각이니까.”

“그럼 마녀를 죽이면요? 그 뒤엔 뭐가 있죠?”


하피가 물었다. 마녀를 죽이기 전까지. 그 말은 마치 하이드가 스스로에게 맹세한 자신의 최후처럼 들렸다.


마녀를 죽이기 전까지 살아볼 생각이다. 그 말은 마녀를 죽이기만 한다면 나머진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마녀를 죽인 다음. 그 다음이 하이드에게 있기를 원했다. 그게 뭐가 되었든.


그녀와 자신이 함께 걸어갈 다음 길이 있었으면 했다.


“생각해본 적 없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러나 하이드의 말은 바뀌지 않았고, 그 말투는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하피의 귓가에서 그것은 송곳처럼 뾰족하게 변해 박혔다.


“하지만...방금 전에 하나쯤 찾은 것 같기도 하다.”

“정말요?!”


하피가 기겁하며 뒤돌았다. 마찬가지로 하이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진정해라.”

“아니. 그 전에 빨리 말해주세요. 뭔데요?”

“그냥...보고 싶은 게 생겼다.”

“보고 싶은 거?”


하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하이드가 과거를 회상했다.


‘그것’을 보았던 순간을.


대공자의 영혼에서 일어난 융합의 흐름을 막기 위해 심볼을 발현하고 고유마법으로 그의 내부에 있는 영혼을 관조했을 때였다.


그의 내부에서 그의 본질과 함께하는 영혼을 본 순간,


압도당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공자의 영혼이 특별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왕의 영혼이 환생조차 하지 못하고 튕겨나갔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미궁에서 있었던 악마와의 전투. 그 최후의 순간에 그의 영혼 일부를 얼핏 훔쳐볼 수 있었다.


한없이 찬란한 빛의 덩어리. 그렇게 보였다. 그 빛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아서 정말 강하고 특이한 영혼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이 대공자에게 도박을 거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만한 빛을 지닌 영혼이라면 필시 두 번째 벽 따윈 얼마안가 넘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오산이었다. 자신이 보았던 빛의 덩어리는 고작해야 그 거대한 것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너무나 거대해서 아주 작은 티끌조차 너무나 황홀하게 빛나는 영혼이었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다.


여태껏 수많은 영혼을 보아왔다.


노예부터 시작해서 왕족까지.


처음 검을 잡아본 검사부터 시작해서 무의 극한에 다다랐던 위대한 무인까지.


겨우 주문을 외워 마법을 발현하는 햇병아리부터 진리를 구현한 대마도사까지.


정점에 오른 용, 기괴한 악마, 광폭한 괴수와 자연 그 자체인 정령....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비교 자체가 모욕이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보아온 그 어떤 영혼보다도 대공자의 영혼은 특별했다.


아니. 특별하단 말조차 부족하다. ‘그것’을 표현하기엔.


그의 영혼에 담긴 본질은 경이로웠고, 위대했고, 압도적이었으며,


신성했다.


다른 모든 것과는 그 본질부터가 한없이 격이 다른 존재였다. 감히 그 가능성을 재단하는 것조차 죄악이었다.


영혼 속에 숨겨진 그 본질을 마주한 순간, 단 한 순간이나마 그만 정신을 잃고 빠져버렸다.


만약 정신을 옮긴 상태가 아니었다면 현실의 육체 또한 그대로 무릎을 꿇었을지도 모른다.


루시...통찰의 마안을 지닌 여인이 떠올랐다.


그 여인이 대공자에게 보였던 신앙에 가까운 충성심이 이해가 되었다. 비록 환생했다고는 하나 그랜드마스터의 격을 지닌 자신조차 이 꼴이다.


만약 그런 최소한의 격조차 없다면 그것을 앞에 둔 순간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그 본질에 빼앗겨버렸을 것이다.


빛을 삼키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또 다른 빛이니까.


대공자의 그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포악하고 강렬한 빛이었다.


세상조차 집어삼킬 만큼.


그 본질을 마주한 뒤, 겨우 정신을 차렸고 문득 한 마디가 떠올랐다.


‘이 자라면...가능할 지도 모른다.’


여태껏 그 어떤 무인과 마법사, 초능력자들도 뚫지 못했던 세 번째 벽.


세상이 막아놓은, 신이 되기 위한 마지막 벽을 그라면 초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신성하고, 세상 그 자체를 삼켜버릴 만큼 포악하기에, 그는 어디까지고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은 묘한 흥분을 자신의 가슴 속에 일으켰다.


마치 처음 마법을 사용했을 때처럼, 처음으로 심볼을 얻었을 때처럼,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진리를 엿보았을 때의 그 떨림과 흥분을 그 순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으로선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뚫고 나아가는 존재.


그런 존재의 곁에 서서 언제까지고 그 존재가 걸어 나갈 길을 보고 싶었다.


그때의 자신은 계시를 받은 신관이었고, 무한의 앞에 선 필멸자였으며,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였다.


‘그래. 그것을 보기 위해서라면...미련 없는 삶을 억지로 이어나갈 가치가 있다.’


하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심연을 보는 자, 조심하라. 그대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또한 그대를 보고 있을 지니.


필요 없는 소리였다.


이미 자신도, 루시란 여인도, 그 심연에 잡아먹혀버렸으니까.


‘하지만...과연 그 빌어먹을 놈이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군.’


신이 될 자격을 타고난 자를 이 세계의 신이란 녀석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대공자의 인생은, 그가 가진 재능은, 축복이 아닌 저주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우연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다른 대가를 받아가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하나만은 확실했다.


대공자가 스스로의 재능을 꽃피운 것이든, 아니면 신의 판 안에서 놀아나는 것이든 간에,


아마 그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신이 될 자격을 타고났으나 그 앞에 있는 건 무한한 투쟁과 파멸인가...’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무한히 달려 나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였기에, 똑같이 무한을 달리다 끝내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이 스러질 수밖에 없는.


‘누군가 대공자에게 가면을 씌워 그것을 막으려했던 것 같지만...’


혹시 모른다. 대공자가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 그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되고, 누구도 그런 재능을 원하지 않는 시대였다면.


그 또한 다른 인간들과 같이 조금 더 긴 수명과 인간다운 인생을 누리다 평범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부질없는 짓이지. 가면은 이미 깨지고 있는 중이야.’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지금의 시대는 평화롭고 안정된 세계가 아니다. 환생자들이 현생의 몸을 강탈해 강림하고, 수많은 힘과 사상이 충돌하는 시대였다.


강하지 못하면 짓밟히고, 먹어치우지 못하면 잡아먹힌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서 대공자의 재능과 가능성은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나리라.


‘부디 조금 더 그 빛을 강렬하게 불태워주길...’


그렇게 생각하는 하이드의 눈빛은 어딘가 루시와 닮아있었다.


*


알렌은 가만히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거리는 미궁에 들어가기 전과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것이 여름의 생기와 폭풍을 간직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다 빠지고 미래를 위해 몸을 웅크리는 겨울이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활기와 죽음이 뒤섞여 혼탁했다. 무너진 건물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미리 배급소 앞에 서서 오늘 먹을 밥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공감대로 엮여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는 공간에서 알렌은 동떨어져있었다.


단순히 알렌이 태연하게 사람들의 옆을 지나가고 있음에도 단 한 명의 사람조차 그를 눈치 채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알렌은 그들의 집단에 속해있지 않았고, 그들의 감정에 티끌만큼도 공감할 마음이 없었다.


자신이 미궁에서 싸운 여파로 재난민이 발생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급증했고, 현재 할덴이 개방한 성의 일부와 임시천막에서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식량창고를 개방하고, 그동안 거래를 해오던 상단에게서 식량을 구입한 덕분에 현재 배고픈 자는 없었다. 다만, 가족과 집을 잃은 여파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많았고, 자그마한 자극으로도 쉽게 충돌이 발생했기에 경비들이 상시 대기 중이었다.


바로 옆에서 그 참상을 목도하고 있음에도 알렌에게 들어오는 정보는 글로써 정리된 보고서와 별 차이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범위가 좀 더 좁혀진 대신 더 자세해졌다는 것 정도?


딱히 알렌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는 장애 같은 게 있어서는 아니다.


단순한 효율의 문제였다.


‘못’하는 게 아니다. ‘안’할 뿐이지.


왜 자신이 타인의 슬픔에 공감해야 하는가? 그래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물론 그들을 관리하는 데에 그들의 슬픔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면 그리 하겠지만, 지금 이상으로 그들을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였나...개소리지.’


그것이 정말로 실현될 수 있는 현상인지는 예외로 두더라도 일단 상도덕이 없는 말이었다.


기쁨까진 괜찮다. 그런데 슬픔이 문제다. 나누는 쪽이야 좋겠지. 자기 아픈 게 반으로 줄어드니까.


하지만 나눔을 받는 쪽은 굳이 그걸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왜 굳이 타인을 위해 자신이 아파야만 한단 말인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이익이 된다면 또 모를까.


연애 또한 비슷했다.


‘사랑하니까 만난다. 그리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니 더 만날 필요가 없다. 그러니 헤어진다. 간단하지.’


알렌은 조금도 자신이 특이하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굳이 삼시세끼 먹을 때마다 매번 세상 반대편에서 굶어죽는 사람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


굳이 사람을 죽일 때마다 상대의 남은 가족과 그가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며 죄책감을 더 얻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자신이 죽인 사람의 숫자를 하나하나 꼽아가면서?


그 유명한 인간의 권리에도 있지 않은가. ‘행복추구권.’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자신은 그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과의 공감대를 잠시 끊어둘 뿐이다.


그러니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다고 해서 욕먹을 이유는 없다는 소리다.


거기다 현재 알렌이 관심 있는 분야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알렌은 힐긋 자신의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루시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루시의 배에 그 신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서클에도 관여가 가능하다면 단전에도 충분히 먹힐 만하겠지?


‘젠장. 하이드 말고 루시한테도 금제를 걸어야하는데.’


루시가 당장 환생자가 되더라도, 혹은 모종의 이유로 자신을 배신하더라도 곧바로 처리할 수 있는 그 기술은 알렌의 마음에 평화를 주는 아주 고마운 것이었다.


문제는...아직까지 그걸 한 사람한테 밖에 쓸 수 없다는 거고.


‘왜 이렇게 제약이 많은 거야?’


마법 같은 기술이라서 그런지 제약도 마법만큼 많았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알렌의 무리한 요구에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긴 불상사였다.


‘쓸데없이 난이도만 높아서 함부로 수련할 수도 없고 진짜...아깝다 아까워.’


알렌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목적지를 바라보았다.


‘곧 있으면 도착하겠군.’


유독 곡소리가 크게 울리는 곳을 향해 알렌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문득 루시가 말을 걸었다.


“주인님. 손...잡아드려요?”

“아니. 왜?”


갑자기 왜 그러냐는 듯이 묻자, 루시가 알렌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굉장히 격렬하게 떨리고 계시는데.”

“아...”


알렌은 미친 듯이 떨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진짜 연비가 쓰레기야.”


빌어먹을 놈의 심무心武. 고작 두 번 썼다고 이 꼴이 나다니. 몸 상태를 감안하더라도 연비가 너무 구렸다.


효과는 그만큼 확실했지만.


‘자주 쓰지는 못할 테니...확실하게 판을 뒤집는 용도나 결정타를 날릴 때 쓰는 게 적당하겠군. 이런 걸 필살기라고 하던가?’


이런 유형의 기술을 처음 접해보는 것도 아닌지라 알렌은 빠르게 심무의 활용방식을 짚어나갔다.


물론 심무가 특이한 기술이니만큼 파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더 활용방법을 알아낼 수 있겠지만, 현재 떠오르는 것은 이게 다였다.


알렌은 계속 해서 떨리는 손의 원인을 파악해갔다. 단순히 근육과 신경의 문제인지, 아니면 내부의 기운이 무슨 작용을 하는 건지 알아야하니까.


‘둘 다군.’


알렌이 멀쩡한 왼쪽 손가락을 뻗어 오른팔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가슴까지를 점혈했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진동이 멈추었다.


지금부터 만나러 갈 사람을 생각하면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마이너스다.


‘이제 도착했나.’


주저앉은 사람들의 틈 사이로 들어간 알렌의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의 묘비가 꽂힌 임시적인 공동묘지였다.


이번 일로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 죽음을 애도하듯, 혹은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듯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절벽과 가까운 한 언덕 위에 익숙한 얼굴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할덴이었다.


알렌은 기척을 죽인 채 할덴에게 다가갔다. 할덴은 알렌이 온 줄도 모르고 계속 하염없이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할덴의 얼굴을 확인했다. 앞서 들었던 대로 이전보다 더욱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대방벽의 지원군들을 상대하랴, 시민들 관리하랴, 상인들 대면하랴, 고작해야 3일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몸이 10개라도 모자란 일들뿐이었다.


다른 관리들과 병사들의 노고를 제외하더라도, 그 모든 일들을 끝까지 책임을 지고 도맡아 한 할덴은 충분히 유용하고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현재 무엇보다도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이별의 아픔이었다.


할덴이 앞엔 작은 비석이 세워져있었고, 그 비석엔 그가 잃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헤록, 녹산드. 그 두 이름이 그들의 잔향처럼 선명하게 비석에 남아있었다.


알렌은 먼저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외딴 곳이었기에 다른 사람들과는 떨어진 상태였고, 루시는 옆에 있는 숲 사이로 숨어들었다.


알렌은 은신을 풀고 기척을 내보였다. 그와 동시에 할덴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알렌을 올려다보았다.


“시장...님?”

“맞다.”

“헉!”


할덴이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곧장 부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그만 상념에 빠져 시장님께서 와계신 줄도 몰랐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괜찮으니까 그만 몸을 일으켜라. 누가 보면 귀찮아진다.”

“알겠습니다. 그럼.”


할덴은 다시 상반신을 일으키고서 여전히 하반신은 바닥에 붙인 채 비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얼핏 시장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알렌은 그런 사소한 것은 따지지 않기로 했다. 거기다 정말로 할덴이 자신을 무시할 리도 없고.


그는 비석과 할덴을 번갈아 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둘에 대해서는 루시에게 들었겠지.”

“예.”


할덴을 비롯한 다른 관계자들에게 알려진 정보는 미궁 탐사를 위해 하이드 일행을 알렌이 고용해 미궁에 들어갔고, 악마가 만든 함정에 빠져 녹산드와 할덴을 잃었으며, 그 뒤 악마와 조우해 전투에 돌입.


막대한 희생을 치룬 끝에 겨우 악마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가 전부였다.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듯이 필요한 것만 밝히고 중요한 진실들은 꽁꽁 숨겨놓은 말이었지만, 녹산드와 헤록의 죽음은 결코 거짓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악마에게 잡혀 고통스럽게 능욕당한 뒤 괴물이 되어 일행들의 앞을 막아섰고, 결국 알렌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기사다운...명예로운 죽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의 끝은 마기에 침식된 괴물이었지만, 할덴에게 있어서 둘은 영원한 자신의 기사였다.


악마에게 잡혀 이지를 잃고 몸이 괴물이 되었다고 한들, 그것만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알렌의 약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들을 벤 것은 나의 검이지. 내가 미운가?”

“아닙니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할덴이 고개를 저었다. 할덴은 티끌만큼의 증오조차 알렌에게 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알렌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대공자 덕분에 둘은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었다. 괴물로서의 죄악을 저지르기 전에 자신들이 흠모했던, 또 다른 기사의 검에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으니까.


대공자는 헤록과 녹산드에게 편안한 잠을 안겨주었고, 그 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악마 또한 이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충성은 보답 받았을 것이다. 할덴은 그렇게 생각했다.


“헤록과 녹산드는 마지막까지 명예로운 기사였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모든 이가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들은 기사로 남을 거다.”


괴물이 아닌.


할덴은 알렌의 확답을 들은 순간, 다시금 눈길에 짠 물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르니오 가문의 대공자에게 기사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형태 없이 빛나는 훈장이라면 그들도 자랑스럽게 가지고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시장님. 헤록과 녹산드, 그리고 이 도시의 모든 시민들을 대표해서.”


시장은 자신인데 굳이 재무관인 그가 대표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할덴이 자신에게 악감정이 없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단 루시에게 듣긴 했으나, 혹시라도 안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면 그냥 치워버렸을 것이다.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 놈한테 힘을 쥐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처음엔 둘을 죽인 걸 그냥 악마에게 덮어씌우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그런 일로 자신에게 악감정을 품을 정도면 그 경우에도 둘을 데려간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 분명했기에 아예 확실하게 나가기로 했다.


‘앞으로도 써먹을 수 있겠군.’


주저앉은 할덴의 좁은 어깨를 내려다보며 알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런 알렌을 보며 너무 냉정한 것 아니냐는 말을 할지도 모르지만, 알렌은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위에 선 자는 주저앉을 시간도, 슬퍼할 자격도 주어져선 안 된다.


다른 이들과 똑같이 울고 슬퍼한다면 그자가 굳이 다른 이들의 위에 설 이유가 없으니까.


귀족이 왜 귀족이겠는가.


뭐, 어차피 이건 어디까지나 이상론에 불과하니 너무 새겨들을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이랬으면 좋겠다, 정도의 말일 뿐이니까.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생각 따윈 없고, 실제로 자신도 어느 정도 지키려고 하고는 있지만, 일정수준이 넘어가면 전부 다 때려치울 가능성이 높다.


“죄송합니다, 시장님. 전 그동안의 일을 시장님께 보고하고 추궁 받을 의무가 있지만...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괜찮다. 나 또한 더 쉬어야 했으니까. 내가 회복되었을 때 다시 부르도록 하지.”


확인할 걸 확인한 알렌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할덴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장님. 제가 시장님께 감사드려야 할 일도, 용서를 빌어야 할 일도 많습니다만....마지막으로 딱 하나. 루시님을 통해 둘의 유해를 챙겨와 주신 것. 정말...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말. 기억하고 있겠다.”


원래부터 그런 용도로 챙겨오라고 한 유해였다. 물건이 제 값을 한 것에 불과했으니 알렌으로선 큰 감흥이 없는 일이었다.


‘이걸로 도시운영은 앞으로도 편해지겠어.’


굳이 정신상태가 불안정한 할덴을 써먹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시민들의 여론이 별로 좋지 않았다.


지금도 청각을 집중하면 또렷하게 들려왔다.


“빌어먹을. 이게 다 그 새 시장 때문이야. 그 놈이 모험가들만 죽이지 않았어도.”

“난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지가 뭐라고 모험가들의 일에 간섭하는 거야?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덕분에 미궁도 폭주해버렸잖아!”

“젠장. 백작 가의 대공자면 다냐고!”

“이봐. 말조심해. 그러다 끌려가는 수가 있어.”


가족과 터전을 잃은 분노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나마 머리가 좀 돌아가는 사람이 말리려고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하! 잡아가라고 해! 어차피 어머니도 동생도 미궁이 폭주하면서 둘 다 죽었는데. 나도 죽으면 더 빨리 만날 수 있겠네.”


딱히 미궁의 폭주와 모험가들에 대한 징계가 큰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한 시민들은 복잡한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정보가 들어오지 않기도 했고. 더 큰 동요를 막기 위해 미궁의 최하층에 악마가 살고 있었다는 건 아직까진 비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하다간 용신교가 개입해서 계획이 흐트러질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그들에겐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명확하게 특정지어 증오할 수 있는 대상이.


새로 들어와 도시에 혼란을 불러온 시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자신을 험담하는 게 기분 나쁘긴 했지만, 딱히 실망감이나 배신감, 혹은 회의감 같은 게 들지는 않았다.


‘개한테 뭘 바라는 건 잘못된 거지.’


개가 사람 말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거다. 그들의 무지와 나약함에 새삼스럽게 새로운 무언가를 느낄 이유는 없었다.


그나마 그들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 그게 전부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짧은 행복을 위해 살아가다, 다음 세대를 낳아주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신 같은 귀족의 역할이었고.


굳이 알렌은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지 않았다.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그들의 머리를 가루로 만들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죽이려면 당장 4할에 가까운 시민들을 전부 다 죽여야하는데. 그럼...너무 귀찮지 않은가.


저들이 저택의 고용인들처럼 아버지나 다른 가문의 일원에게 자신의 정보를 신빙성 있게 제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개가 개소리를 할 뿐일 일에 그런 귀찮음을 감수하고서 그들을 도살하고 싶진 않았다.


개가 주인을 향해 짖는다면 밥을 주면 그만이다.


배가 부른 뒤에 머리가 식고 지금 자신들이 누구덕분에 먹고 잘 수 있는지 깨닫게 되면, 더 이상 저렇게 짖지 못할 테니까.


그때 미궁에 도사리고 있던 위험과 자신의 활약을 홍보하면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전까지 상황을 매끄럽게 흘러가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증오조차 이용하기 위해선 할덴이란 톱니바퀴가 필요하다.


“그래도. 할덴 님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살 수 있었잖아. 그나마 다행인 일이지.”

“...그건 그렇지. 할덴 님은 그 시장의 하수인이긴 하지만...재해가 일어났을 때 성을 개방해주셨으니까. 그건 알고 있어.”

“지금 구호품도 할덴 님이 그 시장 대신 결제해서 내려주시는 거잖아. 이럴 땐 자기 잇속만 챙기는 모험가보단 확실히 나라의 보호가 더 필요해.”

“모험가보단....나라의 관리가 더 낫지.”


이게 현재 할덴에게 가는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어둠이 크면 빛 또한 함께 커지듯이 약간의 조작을 통해 몰아준 할덴의 지지도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리고 할덴이 자신의 밑에 있는 이상 그 힘은 곧 자신의 힘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걸로 충분해.’


알렌은 할덴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어가 그에게서 떠나버렸다.


그렇게 할덴은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 언제나처럼. 그리고 조금 낯설게.


할덴은 멀어져가는 걸음걸이를 통해 또 한 번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루시님을 통해 그들의 죽음을 전달받고 천에 싸여진, 그들이었던 가루더미를 두 손에 얹은 이후로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대공자를 만나니 아직도 마음에 희망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대공자만이 그들의 비밀스러운 생존소식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망상과도 같은 생각이 자신의 안에 잠들어있었다.


그래봤자 망상은 망상이었기에 진실을 다시금 확인받자마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깨져버렸다.


그들은 죽었다. 행복할 때 보이던 그들의 웃음도, 힘들 때 듣던 그들의 위로도 더 이상 없다.


수십 번 눈물을 흘려도 그들의 손길에 남아있던 온기는 오직 자신의 머리에만 남아있을 뿐, 결코 현실이 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친애했던 동료들을 묻은 자리 앞에서 다시금 그들의 죽음을 확인받은 할덴은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의 주인은 도시를 관리하는 재무관이 아닌, 그저 친구를 잃은 한 인간일 뿐이었다.


두 기사는 자신들의 죽음에 보답 받았으나, 할덴은 잃어버린 친구에 대한 슬픔과 상실감을 보답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보답 받을 수 없을 것이다.


*


“흐음...”


자신이 사라지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할덴을 나무 뒤에 숨어 바라보던 알렌이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사람이 아이보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추하다 생각되진 않았다.


눈물에 대한 권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


다만, 의문이 들었을 뿐이다.


과연 나는 그와 같이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인간인가.


사람의 목숨은 평등하지 않다. 자신에게 더 가치 있는 사람, 더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에게서 영원히 사라진다고 해도 자신의 눈에 슬픔이 흐를 거란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슬쩍 물어봤다. 자신 외에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


“루시. 나는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인가?”

“한 번 확인해볼까요?”


루시는 그렇게 말하며 즉시 자신의 손에 강기를 두르고 스스로의 목에 가져다댔다.


“그만해.”

“예.”


알렌이 짐짓 꾸짖듯이 말하자, 루시는 재빨리 손에서 기운을 털어냈다.


루시는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해 키운 부하다. 그런 부하를 고작해야 이런 실험 따위로 날려먹을 순 없었다.


알렌은 여전히 시선을 할덴에게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넌...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지.”

“저번에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아버지와의 대련 뒤에 찾아온 밤의 일이었다. 루시는 자신이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냐고 물었고, 자신은 소중한 부하라고 대답했다.


“네가 죽으면...난 굉장히 화가 날 거야. 네 용도와는 상관없이, 그동안 너한테 투자한 모든 게 날아가는 거니 당연하겠지. 허탈하기도 할 거고. 널 죽인 놈이 있으면 반드시 그놈을 찾아가서 죽여버릴 거다.”

“예.”


루시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기가 죽는 걸 가정하고 있는데 저런 웃음이 나오나? 하여간 정말 특이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내가 네 죽음 때문에 울 것 같지는 않아. 확신이 없어.”


마치 잘 키우던 애완동물이나, 정성을 다해 깎아온 조각품이 눈앞에서 박살나는 걸 가정하는 느낌이었다.


그것들이 누군가에 의해 죽거나 부서지면 화가 나거나 허탈하긴 하겠지만, 그것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은 그 정도로 상냥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어렵군.’


자신이 갑자기 감성적인 인간이 되어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었다.


심무心武는 자신의 마음에 영향을 받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마음에 대해 깊이 알아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의지의 부족.


감정의 폭발은 그것을 충분히 메워줄 수 있을 것이다. 악마 때도 똑같았으니까.


“감정. 감정이라...그냥 나태함으로는 안 되나?”

“그걸 끝까지 추구하실 수 있다면요.”


알렌의 중얼거림에 루시가 답했다. 알렌은 물끄러미 루시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흐릿한 눈 너머로 무언가에 삼켜져버린 광기가 느껴진다.


감정의 폭발. 소중한 인간. 할덴. 그리고 루시.


몇 가지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합쳐졌다.


“네 눈은 가끔 너무 많은 걸 보는 것 같아.”

“의안으로 대체할까요?”

“아니. 됐어.”


알렌은 등을 돌렸고, 이내 홀연히 사라졌다. 루시는 흐릿해지는 알렌의 존재감을 쫓아 가까스로 손을 뻗었다.


알렌의 옷자락이 루시의 손에 잡혔다. 알렌이 슬쩍 뒤를 돌아보자 루시가 입을 가만히 다물다가 말했다.


“눈도 안 보이는데, 같이 좀 가줘요.”

“그러지 뭐.”


할 일을 끝마친 알렌은 루시와 함께 병실로 이동했고, 곧이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


루시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알렌이 일어난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이제 다시 미궁으로 들어갈 시간이 다가왔다.


작가의말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선추코 부탁드립니다.

...엑스트라의 심리를 묘사하다보니까 분량이 너무 늘어나네요.(17000자..ㄷㄷ)

ㅠㅠ 앞으론 자제해야 겠습니다.

이번 편에서 뭔가 굉장히 장황하게 써놓긴 했지만, 주인공은 그냥 자신의 행복을 위해 효율적인 선택을 할 뿐입니다.

...그래도 너무 비인간적이다 싶으면 심리묘사를 조금 생략할지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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