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 상해. 봉천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하산
작품등록일 :
2019.04.0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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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4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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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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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1)

DUMMY

1919년 1월

광활한 서부 시베리아 벌판에 빙한 지옥이 펼쳐졌다. 얼음과 눈보라로 뒤덮인 천지.

이토록 혹독한 한파는 이곳 원주민들조차도 처음이라 했다. 토한 숨결이 허공에서 빠지직 얼어붙는 엄청난 추위.

그 혹한 속의 눈벌을 느리게 걸어가는 긴 대열. 앞 사람 발자국을 따라 한발 한발 내딛는 군상들은 각색의 천으로 얼굴을 싸매고 있다. 숨 쉴 때마다 날카롭게 폐를 찔러대는 매서운 냉기를 조금이나마 걸러보려는 필터 겸 보온용이지만 혹한 속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미 제대로 걷는 사람이 드물다. 반쯤 얼이 나간 허깨비들은 저마다 비틀댔다.

허공을 찢은 칼바람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푸르뎅뎅한 얼굴들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다. 또다시 꾸역꾸역 눈을 토해내는 회색 하늘. 한도 끝도 없이 토해낸다. 고이는 순간 바로 얼어붙어 렌즈가 되어버린 눈물로 시야가 흐릿하다. 사물이 온통 뒤틀려 있다. 일그러진 거울 속 세상처럼...

눈 닿는 곳까지 끝없이 펼쳐진 묵직한 회색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검붉게 노을 진 구름 아래로 불티처럼 흩날리는 붉은 눈가루. 노루꼬리만큼 짧은 겨울 낮이 빠르게 저물면서 기나긴 북국의 밤이 내리고 있었다.

졸리다. 눈꺼풀의 고드름이 너무도 무겁다.


작년 11월 14일,

옴스크를 함락시킨 붉은 군대에 쫓겨난 수십만의 인파, 끝도 보이지 않던 긴 대열도 이젠 눈에 띄게 줄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눈밭에 쓰러진 말들은 네 굽을 움츠리며 죽어갔고 그 많던 마차들도 땔감으로 사라졌다. 이젠 더 이상 땔감도 없다.

오, 주여. 낙오자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그러나 매순간순간 제 한 몸 추스르기도 급급한 그들에게 그런 여유는 사치였다. 출발 며칠 뒤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동사자 행렬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서로를 격려하던 사람들도 서서히 표정이 굳어져가면서 묵묵히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씩 힘겹게 내딛을 따름이었다.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어지는 순간이 곧 버림받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지난 자리에 널브러진 주검들은 갈수록 많아졌고 머지않아 그렇게 되어갈 웅크린 인간형상의 눈덩어리들 역시 늘어만 갔다. 하루 밤에 수천 명이 동사한 날조차 있었다.


“타냐, 자면 안 돼, 타냐”

얼어 죽은 말 대신에 힘겹게 썰매를 끌던 장교복의 청년 삐에르가 애타게 아내를 불렀다. 이 추위 속에서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기 어렵다. 모피를 겹겹이 깔고 덮은 썰매 속에 축 늘어진 여인, 푹 눌러쓴 샤프카(모피 털모자) 밑은 긴 목도리로 감싸 청회색 눈만 빼꼼히 보인다. 썰매는 이미 사람과 모피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눈에 뒤덮여있다.

“만삭의 몸으로 어찌... !“

삐에르는 피난가자는 아내를 펄쩍 뛰며 만류했었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붉은 군대가 가장 증오하는 제국군 대위의 신분. 나 때문에 이 이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음이 급해진 타티아나 로스토바는 남편을 어르고 닦달했다. 그리고 결국 삐에르를 몰아세워 피난길에 나섰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이 지옥 속에서 아기가 나오려하지 않는가!


체코 군단


16c 초에 식민지로 전락한 체코인들은 종주국 오스트리아를 뼛속깊이 증오했다. 때문에 1차 대전 당시, 독오獨奧 동맹군으로 끌려나온 동부전선의 체코출신 장병들은 기회만 생기면 러시아로 귀순했고 일단 포로가 되면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그래서 러시아 측은 체코출신 귀순자와 포로들로만 1개 중대를 따로 편성해주었다.

이에 고무된 그들은 독립의 꿈에 부풀어 의용군을 조직했다. 재在러시아 체코동포들까지 모여들어 삽시간에 5만의 대병력을 이룬 그들에게는「체코군단」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도 생겼다. 제정러시아 정부의 전폭적 지원 하에 출전준비를 마친 이들, 체코군단이 사기충천해 서부전선의 요충지인 키에프로 집결한 것은 1918년 1월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달,

새로 들어선 볼셰비키 정부는 느닷없이 독일과의 휴전을 선포했다. 레닌이 이끄는 혁명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혁명의 완수. 동맹국과의 전쟁보다는 러시아 제국의 망명정부 토벌이 더 시급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주문제작한 최신형 모신나강 소총을 우선적으로 공급받을 만큼 호의적 지원을 받아오던 체코 군단은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낙담한 그들은 가장 우호적이던 프랑스로 가서 동맹국들과 싸우려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그들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 중인 서부전선과 독일이 턱 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그건 애시당초 될 일이 아니었다.

우호관계인 동맹국들(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등)의 심기를 건드리는 체코군단은 그 존재 자체가 레닌의 골칫거리였다. 정전협정 이래 두 달 가까이 체코군단의 거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없이 침묵하던 레닌정부의 2인자이자 군사인민위원 트로츠키는 3월 말이 되어서야

“시베리아로 우회해 블라디보스톡까지 가서 배편을 이용하라.”

는 매정한 지시를 내렸다.

거기서 유럽까지는 다시 지구를 반 바퀴쯤 더 돌아야 한다. 게다가 블라디와 연해주 일대는 혁명정부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 하바롭스크에는 망명정부를 세운 짜르가 여전히 버티고 있다.

이쯤 되면 난 모르겠으니 알아서 가시라는 얘기나 진배 없었다. 그러나 체코군단으로서는 더운 밥 찬밥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방향이 정해진 것만도 감지덕지하며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키에프를 출발했다. 1918년 4월 1일이었다.


이동은 원래 5월 중순까지 마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6월 초까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것은 60여개 부대로 편성했던 5만여 명중 1만 4천명에 불과했다.

당시의 시베리아는 곳곳에 무장 세력들이 출몰하는 무정부상태. 치안은 극도로 불안했고 철도는 수시로 습격 받아 운행이 끊기곤 했다.

그래서 체코군단은 서부 러시아의 소도시, 뺀쟈에서 극동의 블라디까지 철도노선을 따라 8천km에 걸쳐 늘어선 상태에서 짧은 이동과 긴 대기를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었다. 볼거리라곤 없는 삭막한 시베리아 벌판은 터무니없이 넓기만 했다. 하지만 그 광대한 넓이만큼이나 여유로운 러시아인들은 가혹한 자연조건마저 넉넉한 유머로 받아넘겼다.

“시베리아에서 400km는 거리도 아니다.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니고 섭씨 40도는 더위도 아니다.

그리고 40도 이하짜리 보드카는 술도 아니다.”

거북이처럼 느려터진 이동이 지겨웠던 장병들은 열차 내에서 체코어 신문을 발행하고 우체국을 운영했다. 심지어는 은행도 개설했는데 이건 의외로 큰 환영을 받았다. 전 재산을 휴대할 수밖에 없던 장병들은 언제 불상사를 당할지 몰라 불안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은행에 맡기면 도난이나 강도 걱정이 사라진다.

게다가 예금약관에는 본인 유고시 가족을 찾아 전달해주는 친절한 조항도 들어있었다. 그래서 열차은행은 인기리에 성업 중이었다. 이 열차은행은 훗날 프라하 은행으로 발전한다.


군대모집이라면 상상불허의 탁월한 - 사실은 무지막지한 - 수완을 발휘하는 트로츠키였지만 막상 그들을 무장시킬 무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골머리를 앓던 그의 독수리눈은 이윽고 체코군단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녀석들이 5연발의 신형 모신나강 소총과 맥심 기관총 등 최신식 무기로 잔뜩 무장하고 있다.

이 골칫거리들의 무기로 차라리 적군赤軍을 무장시킨다면...? 일거양득의 묘수였다.

음흉한 심보로 꼬투리를 찾던 트로츠키는 서부 시베리아의 첼랴빈스크 역에서 어느 날 벌어진 사소한 소동(1918년 5월, 헝가리 포로와 체코군단의 난투극)을 빌미삼아 대뜸 체코군단의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는 상대를 너무 만만히 여긴 오판이었다. 동맹국들과 한 판 붙을 요량으로 단단히 준비해온 체코군단이다. 이따위 명령에 호락호락 응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무장해제를 한답시고 겁도 없이 나타난 오합지졸 수준의 적위대를 간단히 제압해버렸다. 그리고 체포된 동료들 구출에 나섰는데 그게 도를 넘어 첼랴빈스크 시가지를 온통 휩쓸어버렸다.

"음, 이건... 조금 심했나?"

뜻밖의 사태에 난처한 얼굴로 갸웃대던 28세의 참모장 가이다 대령은 이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에라, 이왕 저지른 김에...!"

시베리아 철도를 장악한 그들은 내친 김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서부 시베리아의 주요 역들(첼랴빈스크 ~ 옴스크 ~ 이르쿠츠크)까지 몽땅 점령해 버렸다. 이 사건으로 체코군단은 시베리아 최강의 무력집단임을 과시했지만 소비에트와는 확실히 등을 지고 만다. 따라서 블라디를 통해 귀국한다는 희망 역시 불확실해졌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생기는 게 세상사. 고립무원의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체코군단은 자신들이 연합국 측임을 천명했고 연합국(영,불,미국, 일본 등)은 쌍수를 들어 이들을 환영했다.


조국 독립을 꿈꾸며 광활한 시베리아를 떠도는 체코군단의 드라마는 당대 서구지식층의 호기심을 부풀리고 로맨티시즘을 자극했다. 이윽고 머나먼 이국 땅, 시베리아에 고립된 체코 청년들을 구하자는 감상적 여론이 서구사회에 광범하게 형성되어 갔다.

드세진 여론의 등쌀에 떠밀린 연합국측은 울며 겨자먹기로 국제연합군을 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각국의 파견병력은 시늉만 내는 수준의 수백 명 규모에서 많게는 수천 명 정도에 그쳤다.

다만 언제나 그 속내를 짐작키 어려운 신흥국 일본만은 무려 7만 명이나 파견했다. 덕분에 연합국들은 일본의 진의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느라 한 동안 분주해졌다.


명분은 일단 체코군단 구출이었지만 꿍꿍이는 제각각인 국제연합군과 백계 러시아군의 복잡한 동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블라디에 이미 도착해있던 체코 선발대는 원래 7월 1일이면 유럽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 고립된 동료들을 구출한다며 국제연합군까지 몰려온 마당에 동포라는 자들이 모르쇠로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제연합군에 동참한 그들은 하바롭스크의 망명 정부 백군과 함께 볼셰비키 일소에 나섰다. 당시 소비에트 극동위원회 외교부장이며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였던 김 알렉산드라가 처형된 것도 이때였다.

체코군단은 드디어 시베리아의 적백내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청일전쟁, 둥베이, 이홍장, 원세개, 명치유신, 서태후, 손중산, 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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