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새벽이 움직이는 소리 3화 전후보상 -
3. 전후보상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심하군요. "
세레즈의 여왕 세느비엔느가 보내온 공문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에스피아는 한숨 섞인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이 요구안에 대하여, 신료들 사이에 논란이 일고 있다 하더니 과연 그럴 만합니다. 그나저나 아버님께서는 어찌하실 요량이신지요."
에스피아는 눈길을 들어 맞은 편에 앉아있는 부왕을 바라보았다. 로그스트 Ⅵ세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녀는 분홍빛이 감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새어나가려는 한숨을 간신히 억눌렀다.
“설마하니 세레즈가 제시한 조건 전부를 수용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 사이로, 에스피아의 날카로운 음성이 다시 한번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로그스트 Ⅵ세는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감았다.
코네세타 군이 초라한 모습으로 귀환해 왔을 때부터, 세레즈의 여왕이 승전국의 위용을 내세우며 이런저런 요구를 해올 것이라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느비엔느가 전쟁으로 피폐화된 세레즈 남부 지구를 복구하는데 쓰일 보상금으로 50 세레니온(세레즈 최고위 화폐단위. 금화)이라는 엄청난 액수를 요구해왔을 때에도, 로그스트는 태연했다. 배상금 지불이나, 식량 지급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전부 다 난감한 요구들이긴 하지만, 세 번째 조항은 더욱 곤란하군요. 이런 시기에, 우리 장정들을 일만이나 보내라니요. 일부러 넣은 조목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어요, 이건. "
하지만 세레즈가 채석장 노역에 필요하다고 청장년층의 인부를 일 만 명이나 보내라고 요구해 왔을 때에는, 그로서도 아연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영토를 내어 달라는 것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청을 했다면, 당당히 거부 의사를 표명하련만.
“아버님께서 무엇 하나 결정하시지 않은 마당에, 제가 무어라 나선다는 것 자체가 과히 좋은 모양새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들의 요구를 다 받아 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
로그스트 Ⅵ세도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쟁으로 기진맥진해져 있는 것은 우리뿐이 아닐 겁니다. 그것은 그 욕심 많은 족속들이 요구해 온 것이 영토가 아니란 점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어차피 무리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청해 온 만큼, 그 조건들을 다 수용치 않더라도 새삼 책임을 물을만한 여유 또한 없을 겁니다."
에스피아는 목소리는 조소하는 듯한 울림을 가지고 응접실 안에 차갑게 메아리쳤다.
실제로 이번 전쟁이 벌어졌던 곳은 세레즈의 남부 영지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최고의 격전지였던 펜데스칼이나 하크스 영지는 세레즈 굴지의 곡창지대였다. 그 외에도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세력지인 그레안이나, 주요 상업지 역할을 하던 로크라테 등이 전화로 황폐해졌으니 세레즈는 현재 자국 내의 식량조달마저 쉽지 않은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레즈는 이번 전쟁으로 명목상으로나마 존재했던 해군 전부와, 십여만이 넘는 지상군을 상실했다.
설령 군비가 충분하여 세레즈 자국에서부터 코네세타까지 이르는 긴 보급로를 구축할 여유가 있다손 치더라도, 원정대의 선두에서 막강한 코네세타 해군을 상대로 접전을 벌여야 할 해군력의 부재는, 확실히 세레즈의 발목을 붙들어 매기에 부족함이 없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세레즈는 자신들과의 전면전을 치루기 위해 북부 영지들로부터 무리하게 병력을 차출한 바 있으니, 지금쯤 그 뒷수습으로 국경 지대마저 어수선할 터였다. 이상의 모든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차전을 벌일만한 여력이 없다는 것은 세레즈나 코네세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차피 양측이 놓여있는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면, 자신들이 미리부터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필요 또한 없지 않겠느냐고, 에스피아는 생각하고 있었다.
“세레즈로 사신을 파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보상금과 식량 원조에 있을 터이니, 인부 건에 대해서는 타협의 여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
“사신이라."
에스피아의 말을 낮게 되뇌는 로그스트의 얼굴에는 회의 섞인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버님께서 무얼 우려하시는지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측의 의사를 표명해두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 외의 목적도 있으니까, 이 시도는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 겁니다. 제가 지금 아버님께 세레즈로 사신을 파견하시라 주청 드리는 것은, 기실 광산 인부 타협보다는 포로 맞교환 제의 거부에 있으니까요."
“포로 교환을 거부하라니. 그럼 장수들의 몸값을 지불하란 말이냐. "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어오는 부왕을 향해, 그녀는 여유 있게 미소지었다.
“이번에 포로가 된 장수들 가운데에, 시블리스 출신의 하우제이드 장군이 있지요. 금화 몇 자루로 시블리스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로서는 손해라 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시블리스 건은 처음부터 제가 나선 일이니, 마무리 역시 제가 하고 싶습니다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 같았던 시블리스를 설득하여 세레즈와의 전면전에까지 종군하게 한 에스피아니만치 그 해결 역시도 그녀에게 맡기는 것이 옳겠다 싶어, 로그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 건은 네게 일임하도록 하지. 그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내 너를 국정대리로 삼을 것이다. 에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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