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새벽이 움직이는 소리 6화 지독한 그리움
6. 지독한 그리움
슈레디안은 별궁 앞에 멈춰선 채, 에스피아가 궁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친위 기사들과 시종 시녀들을 이끌고 태자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를 벗어난 이후에도 한참을 그리 서 있던 슈레디안이 문득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몸을 돌렸다. 조각처럼 단정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 그의 하얀 얼굴에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느릿하게 걸음을 떼어내는 그의 뒷모습 어딘가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위태로움이 절로 묻어나고 있었다.
미드프레드. 미드프레드 그론레이.
외관상으로는 전혀 변화가 없어 보였을지 몰라도, 에스피아에게서 이 이름을 듣는 순간 슈레디안은 한순간 시야가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심히 동요했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그녀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질 때면 바짝 긴장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었기에, 간신히 평소와 엇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었지만. 자기 암시 끝에 어렵사리 평정을 지켜가던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탐색하는 듯한 표정에, 식은땀이 절로 배어드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던 슈레디안이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가장한 무표정으로 그녀가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도, 슈레디안은 단단히 조이고 있던 긴장의 고삐가 흐트러질까 싶어 그녀의 모습이 두 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시 홀로 남았다는 인식과 함께 긴장이 풀리며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평소답지 않게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정자까지 되짚어 돌아온 슈레디안은, 가슴 언저리에 뻐끈한 통증을 느끼며 대리석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깊숙히 기대어 앉은 돌의자의 서늘한 기운이, 옷깃 속 피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며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격하게 고동치는 심장을 조금 진정시켜주는 듯했다.
그는 저절로 새어 나오려 하는 한숨을 의식적으로 자제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자의 하얀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양각 조각들이 자연스럽게 시야를 메운다. 슈레디안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며, 아까부터 자신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이름을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미드프레드."
작은 달싹거림 끝에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겨우 그 자신에게만 닿을 만큼 희미한 울림을 하고 있었지만. 마치 신음처럼 새어 나온 그 가냘픈 목소리가 허공에서 부서지던 순간, 슈레디안은 다시 한번 가슴 언저리가 온통 욱신거려 올 만큼 깊은 그리움을 느꼈다.
그에게 있어 미드프레드는 부왕의 피를 나누어 가진 아우 안타미젤보다도 더 가까운 형제이며 벗이었다. 그는 미드프레드의 조부인 유그스트에게 생명의 빚을 졌고, 아체프렌과 로제스티나 왕비를 비호하다가 그론레이의 가문은 오명을 뒤집어쓰고 멸문당하였다.
아체프렌이 부왕을 찾아가 미드프레드를 구명하고 그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하여 제 곁에 둔 것은 세간에서 말하듯 은사 따위가 아니었다. 아체프렌은 그리함으로써 미드프레드와 그론레이 일족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었을 뿐이었다. 미드프레드와 그의 일가에게 생명을 빚진 자신이 어찌 높은 위치에 올라 그를 아랫것 대하듯 내려다보며 은혜를 베풀 수 있을까. 그 사건으로 모후를 잃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은 그였기에, 같은 일로 가족 모두를 잃은 미드프레드 앞에서 그렇게까지 몰염치해질 수 없었다.
아체프렌은 언젠가 미드프레드가 혼자서도 반듯하게 설 수 있게 되거든, 그와 그의 가문에 입은 은혜를 어떤 식으로든 갚으리라 결심했었다. 어차피 유그스트가 아니었다면 모후와 함께 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을 생명 따위 미드프레드가 원한다면 언제 되돌려주어도 아쉽지 않으리라 여겼으나, 파란 많은 왕궁에서 무수한 위기를 거쳐 성장하는 동안 정작 그를 지켜온 건 미드프레드였다. 자신을 지키고자 하지 않았다면 그론레이 일가가 그토록 끔찍하게 제거당할 일도 없었을 테니 미드프레드를 치욕과 고통 속에 몰아넣은 것은 필시 자신이라 할 만한데도, 미드프레드는 그런 저를 주인이라 부르며 지혜가 필요할 때는 지혜로, 마음이 필요할 때는 마음을 다하여 지켜내었다. 때가 되면 제 생명을 거두라 가르친 무예로, 미드프레드는 위태로운 왕궁에서 기꺼이 아체프렌을 위한 방패가 되고 검이 되어 무던히도 그를 대신하여 다쳤다. 눈물 어릴 만큼 한결같은 헌신이었다.
“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러하였던 것 이상으로 자중자애하여 스스로를 지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게 찾아올 기회를 붙잡겠습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주인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실 그 날을 예비하겠습니다. 하오니 주인님께서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음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약조해주십시오.”
코네세타로 떠나기 전날 밤, 미드프레드가 했던 말이 방금 일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 충직한 벗은 언제나 그러하였듯 이번에도 자신에게 했던 약조를 최선을 다하여 지켜주었다.
‘미드프레드, 너는 대체······.’
저를 적대하는 여왕 일파의 삼엄한 감시 아래 고작 1년 반 만에 적국인 코네세타의 왕위계승자인 에스피아의 귀에 들어올 정도로 굉장한 무훈을 세우기까지 미드프레드는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나들었을까.
마땅히 쓸만한 말이 없어 기회라 하였지만, 미드프레드에게 주어진 것이 제대로 된 기회였을 리 없었다. 필시 사지로 떠미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 속에서 너는 얼마나 막막하고 고통스러웠을까.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그가 걸어왔을 피투성이 가시밭길이 눈에 그리듯 훤히 보여 마음이 저렸다. 팔을 들어 올려 가슴께를 내리눌렀지만, 그래도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날카로운 아픔은 조금도 줄어든 기미 없이 그대로였다.
숨도 제대로 내쉬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도 심장이려니와, 자기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와 낙인이 찍히듯 머릿속에 다시 각인되는 그 이름이 주는 절실한 그리움 때문에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슈레디안은 손을 들어올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눈가를 가렸다.
여간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미처 알아챌 수 없을 만큼의 미미한 움직임이었지만, 분명히 눈가를 덮고 있는 그의 흰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미드프레드에게로 가고 싶었다. 아니,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그에게 가야만 했다. 슈레디안은 길게 숨을 들이켜 격앙된 감정을 내리누르고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곧장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이 북쪽 별궁이 겉보기에만 한산한 곳이라는 것을 슈레디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 유폐된 지 일년여, 그간 자신을 따라붙는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수십번이나 감지해 냈다. 설혹 별궁을 무사히 벗어난다손 치더라도 경비가 삼엄한 왕궁과 도성을 무난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지금처럼 아무 준비도 없이 여기서 도망치면 얼마 못 가 도로 잡혀 올 게 틀림없었다. 자신에 대한 일이라면 기이할 정도로 강한 집착을 보이는 에스피아가 자기가 그녀의 수중을 벗어나는 것을 수수방관할 리 만무했다.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뿐이었다. 에스피아의 시블리스 행을 이용하는 수밖에. 도성을 벗어나면 그만큼 활동에 자유가 생길 터였다. 이번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슈레디안은 마디 마디가 하얗게 변해갈 만큼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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