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세월 14
세레즈력 371년, 봄.
"전하! "
나는 정원 사이를 거의 달음박질 치듯 다가온 시녀를 가볍게 나무랐다.
"이 무슨 호들갑이란 말이냐. 왕궁에서는 경망스레 움직이지 않는 것이 법도이거늘. "
하지만 그녀는 나의 가벼운 꾸중에도 전혀 수그러든 기색 없이 상기된 얼굴을 돌려 정원 입구 쪽을 가리켰다.
"하오나, 저기 왕비 전하께서···!"
정말로 시녀의 손가락 끝에는, 몇 번 공식행사에서만 보았던 왕비 로제스티나가 맺혀 있었다. 그야말로 요정처럼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가 후궁전의 정원 쪽으로 들어서는 것을 잠시 동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새삼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그 시녀를 돌아보며 나직한 어투로 힐책했다.
"네가 경망스울 뿐더러 무례하기까지 하구나. 윗전을 가리켜 손가락질을 하다니!"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있는 시녀를 꾸짖어 물리친 후에, 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처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마주선 그녀는 멀리서 볼 때보다도 훨씬 더 작고 여린 인상이었다. 기껏해야 키도 내 턱선 가까이에 이를까 말까. 이렇게 작아서야 함께 서있으면 폐하의 어깨죽지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왕비 전하이십니다. 비전하께서도 예의를 갖추어 주십시오."
왕비궁 시녀장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귓전을 어지럽혔다. 그래도 제법 쓸만한 자를 곁에 두고 있구나. 가문도 근본도 없이 자라서 하루 아침에 왕비라는 자리에 오른 여인이라 용모 외에는 눈여겨 볼 것이 없으리라 생각하였는데.
나는 내 뒤에 서있던 시녀들이 발끈하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아선 다음, 한 걸음 걸어나가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이렇듯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요, 줄리에트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늦은 봄, 양 뺨을 어루만지고 가는 실바람처럼 희미하고 가냘픈 음성이었다. 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와 다정하게 이야기할 것을 상상하자 나는 내 입매가 차갑게 굳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민 손을 붙잡지 않은 채 똑바로 서서 냉담하게 대꾸했다.
"전하께서 이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여긴 제 처소입니다만. 설마하니 아직까지도 궁내 지리를 다 익히지 못하였노라 말씀하시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녀는 크리스탈로 만들어낸 조각마냥 섬세한 얼굴 한 가득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투명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오늘은 차비와 함께 다과라도 들고 싶어 이리 찾아왔답니다. "
그녀의 말 속에 담겨 있는 '차비' 라는 말이 날카로운 비수로 변해 내 가슴팍을 파고 들어오는 듯했다. 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순진하게 미소지으며 내게 상처를 주겠다? 내가 밀어준 그 자리에 올라 앉아 이제는 이 나를 업신여기겠다는 것인가.
"우리에게 그럴 만한 정리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어쩌면 나는 그녀를 너무 얕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의 천진난한 얼굴에, 이 천사 같은 미소에 속아 넘어가서 그녀가 보이는 것처럼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 아침에 내 모든 것을 이 여자에게 다 빼앗겼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왕비 전하와 마주앉아 내키지 않는 차를 마시고픈 마음도, 또 대접해드려야 할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어쩌면 전하의 안위를 위해서도 제가 이리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다행일런지도 모르겠지만요. "
"어찌 그런 폭언을···!"
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무어라 항변하려는 왕비궁의 시녀장을 일갈하여 물리쳤다.
"그대는 참으로 무례하구나. 본궁 시녀장이라는 명패가 무슨 대단한 직첩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내 발언을 허락하지도 아니하였는데 어찌 감히 윗전들의 대화중에 끼어들며, 폐하의 비(妃)인 나에게 맞서려고 하는 것인가?"
험악해져가는 분위기 속으로 그녀가 뛰어들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어요. 허니 차비께서도 시녀장의 실례를 너그러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본궁의 시녀장은 충성심이 지나쳐 법도를 모르는군요. 왕비 전하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좀더 신중한 성품의 수하를 두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충고 명심하지요."
그녀는 내 불편한 소리에도 아랑곳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시녀장을 타이르듯 말했다.
"시녀장, 차비와 긴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습니까."
왕비궁 소속 시녀장과 시녀들이 조용히 물러가고 나서도 한동안 그녀가 침묵을 지키고 서있었던 까닭에 내쪽에서 먼저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
나는 턱을 치켜세운 채 도전적인 태도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 폐하를 미워하는 것은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까지 용서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야. 당신이 나를 '차비'라 칭하면서 그리 강조하고 싶어하는 왕비 자리도, 내게서는 나올 수 없는 폐하의 아이를 당신이 가졌기 때문에 양보한 것이었다. 이 나라를 위해, 세레스티아 왕실을 위해, 폐하를 위해서. 이 내가, 당신 따위에게 졌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고.
한참만에, 그녀가 예의 느긋한 어조로 운을 떼어냈다.
"왕비가 될만한 재목은 아니지요, 저는."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이었다. 어쩌면 서서히 깔리는 노을을 등지고 서있는 이 여자의 작고 메마른 어깨가 조금쯤 쓸쓸해 보인다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다들 뒤에서 저의 입후를 가리켜 그리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요."
나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터럭만큼이라도 이 여자를 동정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이 여자의 어려움과 아픔에 냉정해지기 위하여. 부러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제가 전하의 하소연까지 들어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녀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그녀 특유의 부서질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아, 아닙니다. 줄리에트님. 들어 달라 하는 것이 아니에요. 꿈에선들 제가 어떻게 그리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저는 다만······"
확실히 나는 조금, 어렸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 간에 짧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피차 간에 결코 편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 정도는 전하께서도 아실 터이니. "
"한번 쯤··· 인사를 하고 싶었답니다. 감사하다고, 말이에요."
하, 감사라 하셨나요? 무엇에 대한?
"아무리 아무 것도 모르는 저라 한들. 그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국왕이신 폐하를 지켜 주시고 감싸 안아 주시는 것은 줄리에트 님이시라는 것을요."
그리고 그녀는 어른이었다. 비록 나약하고 부서질 듯 가냘픈 몸을 하고 있었지만.
"고맙습니다. 그 분을 그리 아껴주셔서."
이해가 될 듯도 하였다. 내가 아닌··· 그녀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내가 아닌··· 그리고 우리의 시간을 외면하면서까지 그가 그녀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조금은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진심을 액면 그대로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내 사람이 사랑한 그 상대방까지 포용하기엔, 내 마음이 아직 너무나 어렸다.
"전하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세레즈를 사랑하라 하며 배우며 자란 자긍심을 지켜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등 고마워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
나는 그저 화가 나고 슬펐다. 차라리, 멍청한 여인이기를. 아무 것도 모르는, 그저 남자의 사랑을 받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여인이기를 바랐다. 천박하고, 생각없기를. 그리하여 이 아슬아슬한 놀이에 질려버리면 언제든 내게 돌아올 수 있기를, 하고 바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강하고 영리했다.
"그럼 하실 말씀은 끝난 것으로 알고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녀를 정원에 세워둔 채, 돌아서던 순간.
나는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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