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장 적의 적 4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가
4.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가
오늘도 여지없이 몸이 무거웠다. 시간은 쏘아놓은 화살 같아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 무더웠던 여름이 물러가고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찾아왔건만, 밤새 무더위에 시달린 양 전신에서 진이 다 빠져나가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힘겹기만 하였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에 화려하게 장식된 주신 크세아로드의 조각을 응시한 채로 안타미젤은 정말 일어나기 싫다는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폰다 대공으로서 클레이온 성에 머물렀을 때의 그는 결코 이렇지 아니하였다. 그가 부쩍 게으름을 피우며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하게 된 것은, 왕위 계승을 준비하기 위하여 성도인 다이레비드로 올라온 이후의 일이었다.
어릴 적에 승하하시어 기억조차 희미한 부왕과,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하여도 옥좌에 계시던 모후께서 사용하시던 국왕의 침전이 이제는 저의 소유가 되었건만 안타미젤은 요근래 들어 한층 더 불행해진 기분이었다. 머리는 열이 나는 것처럼 늘 지끈거렸고, 탈력감이 깃든 사지는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였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마음이 무겁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관식을 치르고 보위에 오른 게 불과 보름도 지나지 않았건만, 폐하, 폐하, 배고픈 새끼 새처럼 시종일관 보채며 저를 찾아대는 음성들이 들려올 때면, 안타미젤은 귀를 막은 채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곤 하였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열일곱 살의 소년 안타미젤은 지극히 괴롭기만 하였다.
‘나는··· 단 한 번도 옥좌를 탐낸 적이 없었는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하크스에서 사로잡혔다던 아체프렌이 군사를 일으켜 남부의 세 영지를 점령하였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 바로 어제 오후의 일이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어느 것이 진짜 소식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관식이 있던 그날 아침, 그 또한 모후인 세느비엔느와 함께 로크라테 영주 콜틴의 인장이 찍혀있던 공영문서를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더 믿을 수가 없었다.
모후께서 세레즈 각지에 심어두었던 세작은 모두 재상에 의하여 진즉부터 발각되어 정보가 제대로 전해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알아들었지만, 기실 안타미젤은 아무것도 받아들이고 싶지 아니하였다. 돌아가는 정황은 너무나 복잡하였고, 급보라 하여 전달되는 소식은 하나하나가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이기만 하였다. 로크라테 영주와 도성의 모든 이들을 완전히 속여넘긴 기만책으로 병력 피해 없이 세느비엔느 정권의 가장 주요한 남부 거점인 로크라테 영지를 순식간에 점령한 제 형도 두려웠고, 그를 따라 저에게 반기를 든 남부의 백성들도 무서웠다.
하크스의 로엘 대공이야 원래부터 태자인 아체프렌 편이었으니, 그의 독살 건으로 분노한 채 모후에게서 돌아서 태자 쪽에 선 것이 당연하다 하더라도 로크라테와 펜데스칼은 엄연히 모후의 세력권이었다. 로크라테 영주는 배신치 않았으나 결국 태자에게 투항한 제 가신의 손에 죽었고, 폰다 가와 우호적이었던 부룸가드너 백작은 지난 전란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영내 사정을 운운하며 최소한의 항전조차 없이 바로 태자군에 항복했다. 그리고 도성 바로 아래 위치한 그레안 영주 그윈 재상은 대관식부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더니 결국 아체프렌 곁에 서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이 모두가 로엘 대공이 독을 마시고 급사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들이었다.
‘과연 어머님의 말씀대로, 폰다가, 내가 형님보다 아직도 유리한 위치에 선 것인가.’
한 일은 거의 없다손 쳐도, 그 스스로 남부 영지에 내려가 대대적인 병력으로 세레즈를 침공해온 코네세타군을 상대한 적이 있어 안타미젤도 어느 정도는 남부인들의 성정을 겪어 알고 있었다. 그들은 셈속이 빠르고 약삭빠른 데다 교활한 처세가 몸에 밴 세련된 수도와 중부의 귀족들과 달랐다. 생각이 많고 회의적이며 춥고 거친 대지처럼 냉랭한 성품에 좀처럼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법이 없는 북부인들과도 달랐다. 남부인들은 솔직하고 격정적이며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죽음도 불사하는, 작열하는 태양처럼 뜨거운 심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고, 그렇게나 넓은 대지가 불타오르는 가운데서도 압도적인 적군 앞에서 그들은 꿋꿋하게 불가능에 가까운 항전을 계속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코네세타가 침공해 들어온 경로가 세레즈 남부가 아니었다면, 지난 전쟁은 결코 세레즈의 승리로 끝나지 아니하였을 터였다.
태자 아체프렌은, 어렸을 때부터 세레즈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맹목적이며, 가장 뜨거운 이들에게 줄기찬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남부의 주요 영지의 주인이 세느비엔느 정권의 주요 인사로 교체된 작금에도 거침없는 진군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나라면, 내가 형님의 입장에 있었다면, 이렇게 빨리 남부인들의 마음을 돌이키지는 못했을 것 같아.’
안타미젤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믿지 않았다. 저는 폰다 대공일 적에도, 세레즈군 총사령관이었을 때에도, 그리고 국왕이 되어버린 지금 역시도, 여전히 안타미젤이란 이름의 평범한 소년일 따름이다. 만일 저에게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변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지난 전쟁에서 미드프레드를 저를 대신할 총참모장으로 발탁하지도 아니하였을 것이고, 지금도 이렇듯 고뇌하지 않았으리라.
‘내게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 기회를 알아볼, 혹은 알아본 기회를 잡을 능력이 없었을 뿐.’
슬픈 일이지만 안타미젤은 주변 정황에 대한 분별이 빠른 편이었고, 스스로의 한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현재의 아체프렌처럼, 중요한 전쟁에서 자리를 비웠다는 장애요소도 없었다. 계모의 핍박 아래 고통받는 태자란 인상 때문에 세레즈 백성들이 태자에게 묘하게 기울어져 있는 상황이었으나, 세레즈 남부로 부대를 이끌고 내려갈 때의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을 뒤엎을 만한 정치적 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적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난 세레즈의 적통 왕자라는 점, 안타미젤에게 미드프레드나 뮤켄과 같은 군사적 능력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아니 하다 못하여 어미인 세느비엔느와 같이 본인의 위상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정치적인 감각이나 태자처럼 어린 나이에도 신료들을 장악할 수 있는 지배력이 있었다면, 안타미젤은 이미 이년 전에 세레즈 남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터였다. 모후인 세느비엔느가 꿈꾸었던 것처럼 세레즈의 구국영웅이 되어 만인의 축복 속에서 사랑받는 국왕이 되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결국 저에게 주어졌던, 어찌 본다면 저를 위하여 어미가 오랜 고심 끝에 어렵사리 만들어준 천혜의 기회를 결국 놓쳐 버렸다.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정황 속에서 자신이 잡지 못한 기회를, 아체프렌은 거듭되는 암살 위협을 받으면서도, 저를 적대하는 세력에 의하여 포위된 채로도 성공적으로 붙들었다.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을뿐더러, 폰다 가와 오랜 협력 관계에 있던 귀족들조차 제 편으로 거두었다. 아체프렌이 얻은 것은, 겨우 세 개 영지가 아니었다. 그는 세레즈에서 가장 맹목적이고 가장 열정적이며, 그리하여 가장 무서운 백성들을 뒤에 업었다. 그들이 아체프렌의 양 날개가 되어 지금 이 순간에조차 시시각각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내란은, 어찌 본다면 이미 결론이 나버린 싸움일지도 몰랐다.
‘차라리, 형님이 어서 빨리 도성에 닿았으면 좋겠다···.’
결말을 알면서도 그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미젤을 한없는 절망 속에 침잠하게 만들었다. 백성들이 이득 없는 싸움으로 죽고 다치기 전에, 그 스스로 왕좌에서 내려와 저를 힘들게 만드는 호화롭기만 한 왕관과 왕홀 따위 아체프렌에게 건네주고 홀가분해지고 싶건만··· 안타미젤에게는 그 스스로 관둘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본인이 끝낼 수 없는 싸움이라면, 차라리 아체프렌이 저를 대신하여 끝내주기를. 지금 바라는 것은 그 하나 뿐이었다. 안타미젤이 괴로운 숨을 토해냈을 때,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국왕의 침전이 무례하게도 활짝 열렸다.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껏 침전에 계신단 말입니까, 황상!”
황망한 기색의 병사들과 궁내부 시종 시녀들을 뒤로 한 채 모후인 세느비엔느가 씨근덕거리는 숨을 삼키며 서 있었다. 안타미젤은 차오르는 한숨을 간신히 삼킨 채 느릿느릿 일어났다. 아침부터 모후가 격노한 채 찾아온 것을 보니 그새 또 좋지 않은 소식이 성도에 닿은 모양이었다.
“송구합니다. ···어머님께서 소자의 침전까지 친히 찾아오신 것으로 보아하니 급전이 닿은 모양이오니 다소 무례할지라도 의관을 갖추기 전에 듣겠습니다. 허니 말씀하세요.”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길고 힘겨운 하루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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