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제는 머리를 노린다 (2)
*본작은 역사적 고증보다는 상상의 비중이 더 큰 작품입니다.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지난 시대를 배경으로 나올 수 있는 수많은 픽션 중 하나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망자여, 왕이 되어라!>
81화: 이제는 머리를 노린다 (2)
대성은 대원들과 함께 관동군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깨어 있는 인원 확인.’
‘없음.’
대원들은 관동군 막사가 집처럼 느껴졌다.
문짝에 달린 자물쇠부터 내무실에 들어오는 한기를 다 막아주지 못하는 나사 빠진 난방 시설까지 모든 게 다 익숙했다.
막사 내 경비 수준도 마찬가지였다.
피로에 절인 관동군 병사들은 누가 엎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남은 전차 부대원들을 처리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성은 일을 끝냄과 동시에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밖에 있는 인원한테 일 끝냈다고 전해.]
[네.]
[전차 요원들 다 들어왔지?]
[다 들어왔습니다. 떠나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좋아. 선물 하나만 남겨놓고 가면 되겠군.]
대성은 대원들을 데리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전차 요원들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나오셨습니까? 대대장님.]
[준비 다 했어?]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면 됩니다.]
[사령관이 책임지고 교육한 보람이 있군. 확실히 배움이 빨라.]
[하하하. 아닙니다. 어서 타시죠.]
89식 전차.
요술봉이 없는 항일군한테는 재앙이나 다름없던 존재.
폭격기와 같이 항일군의 목을 옥죄여왔던 지상의 저승사자.
그 저승사자는 이제 항일군의 것이다.
대성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전차 위에 올라탔다.
[대대장님이 작업하시는 동안 놈들 표식도 다 지웠습니다. 괜히 오해받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욱일기는 먹칠해야 제맛이지. 복귀하자.]
주인이 바뀐 전차는 유유히 옛집을 빠져나왔다.
***
전차를 마주한 기술병과 장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대대장님. 장갑열차를 챙기지 못한 게 많이 아쉬웠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오늘부터 고생 좀 하셔야 할 겁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놈은 세계 기준과 맞지 않거든요.]
[하긴 요술봉만 나타났다 하면 털리는 수준이니 틀린 말씀도 아니지요. 어디부터 손을 볼까요?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할까요?]
[네. 일단 주포부터 어떻게 해봅시다. 장갑열차에 달린 놈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에 근접할 수 있도록. 가능하겠죠?]
[적군 부대도 제집 드나들듯이 하는 분도 있는 마당에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기술병과는 곧장 개조 작업에 착수했다.
관동군의 전차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강력한 편이 아니었다.
물론 맨몸이 전부인 게릴라나 서로 땅따먹기 하기 바빴던 군벌을 상대하기에는 그럭저럭 쓸 만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관동군 전차로는 앞으로 등장할 다른 전차를 상대할 수 없었다.
1차 개조 작업은 화력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작업 과정 자체는 순조로웠다. 굳이 어려움이 있다면 자재 조달이 간당간당한다는 정도?
항일군 관계자 대부분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성은 그들에게 자원 개발과 인력 개발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전쟁만 이긴다고 끝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다음을 준비해야지요. 이제부터 인재를 양성해야 합니다. 돈이 얼마가 들어가든지 간에 말이지요.]
[말이야 쉽지. 일본군의 감시가 전보다 더 매서워졌어. 간단한 기술교육도 받기 힘들 졌다고.]
[그래서 돈을 많이 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 근방에서만 교육받으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더 좋은 곳으로 보내면 그만이죠.]
사람들은 대성의 말에 어느 정도 동감했다.
선생이 안 가르치겠다고 버티면 다른 선생을 찾아야 하는 법이었다.
그에 따라 천리군은 인재 육성 기금을 조성하고 배움에 뜻이 있는 젊은이들을 물색했다.
그렇게 선발된 젊은이들은 태평양을 건너갔다.
인재 육성 계획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대성은 연해주에 사는 조선인들에게도 끊임없이 연락을 취했다.
소련에 살게 된 사람 모두가 공산주의를 신봉하지는 않았을 터, 대성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국가의 이야기를 꺼내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조선인을 맞이할 수 있었다.
물론 더 좋은 터전을 약속한 만큼 전보다 더 열심히 관동군을 몰아내고, 벼랑 끝으로 몰아붙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동군한테서 인재를 떼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최대한 많이.
***
피융!
털썩!
전차가 개조 작업을 거치는 동안 특전 대대는 다시금 공장을 공격했다.
총알 한두 발에 익숙해져 있던 관동군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특전 대대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총알은 장교의 머리만 뚫고 지나가겠지.’
어느새 죽음에 익숙해진 병사들은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경비 병력 제거 완료. 사보타주 시작한다.’
‘확인. 확보할 수 있는 문건은 모두 챙길 것. 못할 것 같은 문건은 모두 제거하라.’
‘알았다.’
특전 대대가 마음먹고 공격한 공장은 규모와 관계없이 백이면 백 화염에 휩싸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특전 대대는 목표로 지정한 공장에서 나올 때마다 항상 같은 경고문을 남겼다.
‘우리는 당신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군인이 아니라고 안심하지 마라. 관동군과 일하는 그대도 결국은 관동군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관동군을 살려 보내지 않는다. 그것만 기억해라.’
이미 숱한 저격 사건에 대해 들어봤던바, 일본인 기술자들은 경고문을 보며 마음을 졸였다.
기술 고문으로 초빙된 외국인도 마찬가지였다.
남부럽지 않게 버는 돈도 결국 목숨이 붙어 있어야 의미 있는 법이었다.
머리통이 날아가게 생긴 마당에 그까짓 연봉이 중요하랴.
외국인 기술자들은 주저 없이 사표를 던졌다.
동시에 관동군 지휘부의 주름살은 지각을 뚫고 맨틀까지 내려갈 지경에 이르렀다.
[또 그만뒀다고?]
[그렇습니다.]
[그냥 보낸 건 아니겠지?]
[연봉도 올려준다고 해봤고, 상여금도 준다고 해봤고, 한참을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더군요.]
[금화에 눈이 돌아갔을 때는 언제고. 빌어먹을 양놈 돼지 새끼들. 부르는 대로 준다고 그래.]
[자기 나라에서 철수 명령이 내려왔다고 돌아가야 한답니다.]
[정식 외교 관계도 맺지 않았으면서 철수는 얼어 죽을. 지레 겁먹어서 내빼는 거지.]
관동군 사령부의 분위기는 거의 초상집 수준이었다.
겨울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물론 일이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는 법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전쟁인데 오죽하랴.
하지만 계획이 엇나가는 데도 정도가 있었다.
지휘부는 매일같이 전해지는 처참한 전황 소식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휴··· 전선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여전히 좋지 않습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훼방을 놓고 얼마 전에는 전차 부대가 습격을 크게 당해서 경계 인원을 크게 늘렸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전쟁을 하러 나갔으면 앞으로 나갈 생각을 해야지. 경계 인원을 늘려?]
[이번에 올라온 지원 요청이 경계병 증원과 관련된 것입니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해. 우리는 병사를 무슨 흙으로 빚어내는 줄 아나? 전차부대가 당한 뒤로는 특별히 공격받은 적도 없었다면서?]
지휘부는 전선의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전차 부대가 당한 일은 분명 심각하게 여겨야 할 사안이었다.
그러나 지휘부는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었다.
청의 북양함대를 박살 냈던 경험.
시베리아의 호랑이를 종이호랑이로 만들어버렸던 경험.
대륙을 통일하네 마네 하던 수십만 봉천 군벌을 패퇴시켰던 경험.
이러한 과거의 전과는 아편과도 같은 것이었다.
과거는 지휘부의 눈과 귀를 가리는 거로 모자라 머릿속까지 헤집어 놓았다.
[그냥 버티라 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차나 열차나 다시 만들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지금 겨울이야. 대일본제국이 겨울 하나 못 버틸 것 같나?]
[하긴. 우리가 반란군도 아니고. 시간 끌어봐야 반란군만 힘들어지겠지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백날 날뛰어 봐야 놈들은 본진까지 못 들어와. 머릿수가 딸리거든.]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럴수록 멀리 보아야 하는 법이야. 우리의 목표는 중원이지 사람 못 사는 산골짜기가 아니야.]
[잘 정리해서 전하겠습니다.]
[그래. 잘 전하고. 이제 열하 지역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지.]
***
지원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동군 지휘부는 규모가 작은 반란군과의 전투를 외면했고, 그보다 큰 대어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전선에 배치된 일선 장병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냥 버티라고 했다는데?]
[진짜 다 과로로 죽어야 정신 차릴 셈인가. 그냥 버티라고?]
[어차피 겨울이니까 놈들이 먼저 나가떨어지지 않겠느냐는 거야. 그때까지 버티라는 거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차라리 빨리 밀어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몸과 마음 모두 혹사당한 장병들의 상태는 불 보듯 뻔했다.
그들은 버틴다는 명목 아래 공세도 적극적으로 벌이지 않았고, 항일군의 공격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쏘다 보면 자기들 총알이 먼저 바닥나겠지.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자기들 식량이 바닥나겠지.
그냥 오면 오고 말면 마는 것이다.
공세 초기의 맹렬한 관동군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대성은 다시금 전차 부대를 공격했다.
[대대장님. 저놈들 어째 저번보다 더 느슨해진 것 같습니다?]
[사기가 떨어진 거야. 적을 꺾으면서 보람을 얻는 것도 아니고. 계속 얻어터지는데 상부에서는 지원도 안 해주고. 말 그대로 열심히 할 생각이 사라진 거지.]
[그냥 오면 오고 말면 마는 거다, 대충 이런 마음이라는 뜻이군요.]
[그런 셈이지.]
차라리 계절 생각 안 하고 공세를 펼쳤다면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계를 서는 관동군 병사들의 마음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에 갇힌 사람들처럼 공허하기만 했다.
그런 병사를 제압하는 데에는 굳이 많은 힘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특전 대대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날뛰었고, 마음이 꺾인 관동군 병사들은 모래성처럼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기존에 확보한 물량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몇 대 더 가져왔습니다.]
[확실히 대대장님 제안대로 개조한 놈과 이놈을 비교해보니 뭐가 문제인지 알겠군요.]
[문제가 많죠?]
[마음 같아서는 아예 처음부터 새로 만들고 싶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지만.]
중요한 무기를 관리하는 부대가 그 모양인데, 다른 부대는 오죽했을까?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부대는 특전 대대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항일군이 겨울을 버티지 못할 거라는 관동군 사령부의 장밋빛 전망도 이들 때문에 실현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관동군이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대장님.]
[알아. 들었어. 관동군이 기동을 시작했다고?]
[전체는 아니고 일부만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기갑전력 비중이 크다고 하더군요.]
[우리 피해가 꽤 있었겠군. 다른 특이사항은?]
[한참을 공격하다가 갑자기 뒤로 뺐다고 합니다. 더 공격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죠.]
인제야 머리를 좀 쓰기 시작한 것인가?
대성은 곧바로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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