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앙면 전쟁 (1)
*본작은 역사적 고증보다는 상상의 비중이 더 큰 작품입니다.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지난 시대를 배경으로 나올 수 있는 수많은 픽션 중 하나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망자여, 왕이 되어라!>
94화: 앙면 전쟁 (1)
항일군은 진격을 늦추지 않았다.
특히 기계화 부대는 전장을 휘젓고 다니다시피 했다. 관동군의 조악한 대전차무기는 기계화 부대의 단단한 장갑을 뚫을 수 없었다.
기계화 부대를 상대할 수 있는 뚜렷한 전략을 세운 것도 아니었다.
전차와 마주한 지휘관들은 말 같지도 않은 명령만 내릴 뿐이었다.
[중대장님! 적 전차와 장갑차가 방어선을 넘어오고 있습니다!]
[벌써 다 뚫렸단 말이야? 빌어먹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모두 착검해! 폭탄 다 챙기고!]
[모두 착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우리가 가진 무기로는 놈들의 전차를 막을 수 없어. 거리가 벌어진 상태에서는 상대하기 어렵다는 뜻이야. 놈들을 막으려면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야 한다.]
[그래서 무작정 돌격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러면 달려가는 도중에 다 죽을 겁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놈들의 진격을 저지하려면 어떻게든 가까이 접근해서 승부를 봐야 해. 모두 착검하도록!]
전략의 부재는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지휘관은 무사도 정신을 강조하며 병사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었지만, 기껏 생각해낸 전략이 자살돌격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모두 잘 들어라. 가까이 접근하기만 하면 끝난다. 그러면 놈들을 막을 수 있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우리는 천황 폐하의 충성스러운 군인이다! 천황 폐하께서 우리를 굽어살펴주실 것이다! 천황 폐하 만세!]
무리수를 둘 거면 차라리 조용히 두기라도 하지. 관동군은 쓸데없는 만세 삼창으로 자신들의 전략을 노출했다.
오죽하면 항일군 기관총 사수들이 자살돌격 신호를 ‘반자이’로 통일했을까. 기관총 사수들은 관동군들이 벌이는 최후의 의식을 보며 장전 손잡이를 당겼다.
[저 새끼들 또 달려오려고 한다. 사격 준비!]
[쟤들은 뭐만 하면 저렇게 만세를 하고 난리냐? 죽어서 좋다는 거야, 뭐야?]
[알 게 뭐야. 죽고 싶다는 데 죽여줘야지.]
관동군은 기계화 부대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고, 기계화 부대 기관총은 특유의 총성을 내며 총알을 퍼부었다.
총검을 들고 달려들든, 군도를 들고 달려들든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관동군은 항일군의 기관총 세례 앞에서 수류탄 안전핀도 제대로 못 뽑아보고 눈밭에 얼굴을 박아버렸다.
[다 죽었나?]
[예. 다 죽었습니다. 예전에는 칼 들고 달려오는 게 좀 무섭기도 했는데, 이젠 그렇지도 않네요.]
[무서운 건 고사하고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차라리 지뢰를 만들어서 깔아놓지.]
[그러게 말입니다.]
[뒤따라오는 병력한테 무기 확실하게 챙겨놓으라고 해. 이것만 있어도 총기 생산하는 데 문제없겠다.]
[알겠습니다.]
***
흑하 전선을 누비는 항일군의 행보는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요약할 수 있었다.
파죽지세.
그리고 초토화.
상당 기간 개수를 거친 항일군 전차와 장갑차는 관동군이 힘들여 만든 방어선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대전차포 갖고 와! 대전차포 어디 있어?]
[여기 있습니다!]
[저 앞에 전차 보이지?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저놈한테만 갈겨. 어서! 포탄 얼마나 남아있어?]
[얼마 없습니다.]
[다 써도 좋으니까, 저 새끼 없애는 데만 집중해. 나머지는 수류탄 전부 다발로 묶어.]
관동군은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
대전차포를 포신이 망가진 다음에도 쓰고, 수류탄으로 꽃다발을 만들어서 던지거나, 직접 들고 달려가는 등, 관동군은 항일군 기계화 부대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항일군 전차의 대구경 포에 참호 전체가 박살 나고, 가까이 있을 때는 기계화 부대의 기관총 세례에 벌집이 되기 일쑤였다.
관동군은 속절없이 뒤로 밀려났다.
공들여 건설한 참호는 항일군에게 거저 넘어갔고, 참호에 남은 군수물자는 인수인계 절차 없이 항일군의 소유가 되었다.
흑하 전선 관동군은 그야말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항일군의 세력권은 날이 지날 때마다 늘어났고 관동군의 세력권은 날이 지날 때마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관동군은 점점 벼랑 끝으로 몰렸다. 물론 흑하 전선만 봤을 때 이야기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흑하 전선의 연이은 패배가 열하 전선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흑하 전선 항일군의 승전보는 관동군 사령부를 넘어 열하 전선의 봉천 군벌과 국부군에도 전해졌다.
1932년의 훙커우 공원 의거가 많은 사람의 항일 의식을 고취했던 것처럼, 흑하 전선의 대(對)일전 승전보는 군벌과 국부군의 저항의식을 한껏 끌어올렸다.
사기가 꺾긴 이들은 도리어 압도적인 물량과 장비로 전장을 주도하고 있던 관동군이었다.
흑하 전선 생존장병들로부터 전해진 살벌한 경험담은 일선 병사들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고, 갖가지 유언비어의 원천이 되었다.
[이야기 들었어? 흑하 전선에 돌아다닌다는 괴물 말이야.]
[전차 타고 다니는 놈들?]
[그놈들 사람 아니래.]
[사람이 아니면 뭔데? 귀신이라도 되는 거야?]
[비슷해. 오래전 우리 군인한테 죽은 귀신들이 붙었다고 하더라.]
흑하 전선의 항일군은 예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귀신으로 불렸다.
물론 흑하 전선의 관동군은 항일군과 실제로 마주쳤기 때문에 이름만 그렇게 부른 것이었지만.
열하 전선의 신병들은 거기에 살을 붙여 실제 괴담을 만들어냈다.
[조선인도 많이 있대. 삼촌이 이야기해주셨는데, 어디더라, 간도 지방인가? 거기서 조선인 많이 죽었다고 했거든?]
[왜 죽었는데?]
[왜 죽었기는. 우리랑 싸우다가 죽었지. 어쨌든 많이 죽었대. 그때 죽은 귀신이 또 많이 들러붙었다고 하더라고.]
[확실하냐?]
[걔들은 잠도 안 잔다고 하더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한다잖아. 새벽녘에 나타나는 경우도 많대. 해가 뜨기 전에 죽이고 저승으로 돌아간다나.]
[아, 좀 그런데. 여기로 넘어오지는 않겠지?]
[모르지. 사령부 근처에도 나타났다는데, 여기라고 못 넘어오겠냐? 벌써 넘어왔을지도.]
병사들은 자기네 정부가 그토록 감추고자 했던 더러운 역사를 꺼내 가면서 항일군을 전설에서나 볼 법한 초자연적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
유언비어는 교착 상태에 빠진 전선 곳곳으로 퍼졌다. 나중에는 하급 장교까지 사병들의 이야기에 동참할 정도였다.
[정말입니까?]
[진짜야. 소대장 직위까지 걸 수 있어.]
[그럼 지금 항일군을 이끄는 사람이 귀신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귀신 들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쨌든 이 세상 사람은 아니라고 했어.]
장병들이 모인 곳에 가면 백이면 백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흑하 전선은 저주받은 지역이다.
흑하 전선의 반란군은 귀신들린 자들이다.
반란군의 지휘관은 옛 중국 군벌이 아니다. 군벌 몸에 들어간 악귀다.
악귀는 천황을 죽일 때까지 살육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관동군 사령부는 유언비어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단속 작업을 벌였다.
사령부는 장병들의 사상을 검증하고 통제하는 인원을 새로 편성하고 일선 부대에 파견했다. 그들은 전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병들의 눈과 귀를 막았다.
[다들 흑하 전선에 떠도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나?]
[예. 그렇습니다.]
[모두 밀정이 퍼뜨린 헛소문이다. 앞으로 듣지도 퍼뜨리지도 말도록. 유언비어를 퍼뜨리다가 걸리면 밀정과 협력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반역죄로 다스리겠다 이 말이야.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흑하 전선에 있는 군대가 패배했다는 소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금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고 있고, 역사에 길이 남을 전과를 세우고 있다.]
[······]
[패배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놈도 밀정으로 간주하고 처벌하겠다. 주의하도록.]
관동군 사령부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령부는 보도 지침을 내림으로써 지역 언론의 전쟁 관련 보도를 원천 차단하고, 지침을 어기는 기자들을 철저하게 단속했다. 지침을 어긴 기자들은 국적과 관계없이 전부 밀정으로 몰아갔다.
[잘못된 전쟁으로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죽어 나간다. 이 기사, 당신이 쓴 거야?]
[그렇습니다. 내가 썼습니다.]
[왜 썼지?]
[내 조카 두 명이 죽었습니다. 근데 전사자 대우는 고사하고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대접을 받고 있더군요. 죽은 동료들과 함께 말이에요.]
[반란군이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던가?]
[뭐라고요? 난 언론인으로서 진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반란군이 거짓을 퍼뜨리라고 시켰겠지. 이 불순분자 자식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퍽!
[크윽!]
[어떤 놈이 시켰지? 누구의 지시를 받았나? 바른대로 말해!]
[큭···!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난 누구의 지시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네놈 기사가 나가도록 허락한 놈이 누구야? 편집장인가?]
[편집장님도 진실이 알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허튼짓할 생각하지 마십시오!]
퍼억!
[커억!]
[편집장이 시켰다. 네 입으로 말한 거야.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편집장 끌고 와!]
[당신들 미쳤어? 일본인이 일본인으로서 일본인에게 진실을 알리겠다는데 뭐하는 짓이야?]
[네놈은 일본인이 아니야. 불순분자지. 영장 갖고 와!]
***
불순분자 색출은 만주국 전 지역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관동군 사령부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들을 불순분자로 규정하고 밀정 혐의를 덮어씌웠다.
그리고는 총알이 빗발치는 흑하 전선으로 보내버렸다.
진실을 알리고 싶었던 자들이 마주한 진실은 생각보다 더 참혹했다.
[여기 있을 동안에는 허리 펼 생각 하지 마라. 머리 내미는 순간 무조건 죽는 거야. 다들 총 쏘는 법은 배우고 왔나?]
[예···]
[앞으로 총 쏠 일 없을 테니까 잊어버리도록. 너희 신병들이 기억해야 할 건 단 하나다. 목소리를 키울 것. 알았나?]
[예···]
[목소리 봐라. 알았나?]
퍽!
허리를 한 번이라도 폈다가는 곧바로 머리에 구멍이 뚫릴 수 있는 그곳.
멋모르고 깊은 잠에 빠졌다가는 무한궤도에 깔리거나 갑자기 날아든 폭탄에 걸레 조각이 될 수 있는 그곳.
괜히 멍하게 있다가 순식간에 통구이가 될 수 있는 그곳.
멋모르고 나섰다가 벌집이 될 수 있는 그곳.
흑하 전선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예민해진 지휘관들은 사병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병들을 잠깐 쓰고 마는 소모품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 만큼 사병들을 막 대하기 일쑤였다. 불순분자 명목으로 끌려온 자들에게는 더했다.
지휘관들은 불순분자 신병을 일회용 인간 망원경처럼 취급했다.
몇 대씩 맞아야 작동하는 망원경 말이다.
퍼억!
[으윽···]
[일어나. 저 앞에 가서 전차가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해.]
[하지만 아까 고개 들지 말라고···]
짜악!
[잠깐 들고 마는 거는 괜찮아. 그냥 슬쩍 보고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 한 번에 전해야 하니까 목소리 크게 해라. 알겠냐?]
[알겠습니다.]
[빨리 가.]
[전방에 적 전차-]
탕!
[적 전차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모두 수류탄 꺼내도록.]
지옥 속에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흑하 전선의 관동군은 거짓으로 장식된 장막 속에서 서서히 말라죽어 갔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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