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양이가 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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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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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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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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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 블레이크가의 비밀 (3)

DUMMY

침착하자. 머리색 정도는 같은 사람도 많다.

당장 내가 살았던 세계에서도 검은 머리가 길에 채일 정도 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꼭 정신이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내가 정신을 놓고 있던 사이, 어느덧 경매는 이미 시작되었다.

쉴 새 없이 올라가는 숫자판들에 나는 기가 질렸다.

역시 아까 지체 말고 도망쳤어야 했나.

나는 쉬이 표정관리를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50만. 더 없으신가요? 50만-”


조금 전과 단위가 다른 금액이 들렸다.

내 외형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니.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다.


나는 50만까지 올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해당 금액을 부른 자는 한눈에 봐도 눈에 띄는 몸을 갖고 있었다.

여행 내내 줄곧 마주쳤던 오크 같은 몸이었다.


어이쿠.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상상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진정하자. 마법은 제대로 못쓸지 언정,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몸싸움은 자신 있었다.

틈을 봐서 복부에 발차기라도 꽂고 도망치면 되겠지.


진행자는 경쾌하게 숫자를 연달아 불렀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경매봉이 단상을 내리치기 직전이었다.


“100만”


진행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만 더 크게 뜨면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 역시 내 귀를 의심했다. 여기서 갑자기 두 배를 불렀다고?

나는 해당 입찰가를 부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는 조금 전 내가 쳐다보았던 하늘빛머리를 가진 인간이었다.


“100만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100만-”


진행자는 언제 놀랐냐는 듯 침착한 태도로 웅성거리는 현장분위기를 수습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입찰했던 오크인간은 포기한 듯 자신의 판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인가.

아니, 어쩌면 더 최악의 상황일지도 모르겠군.


“100만-!”


땅-


진행자는 경매봉으로 단상을 내리쳤다.

그리고 나는 나를 무대 위로 끌고 온 자에 의해 무대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그리고 아쉬운 여러분들을 위해, 다음 경매품이 준비되어있습니다.”


진행자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내 팔을 잡아끌고 앞장서던 남자는, 나를 좁은 방에 밀어 넣었다.

경매품은 곧바로 낙찰 받은 자에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일괄적으로 전달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엔 나 이외에도 경매품으로 팔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남자는 문을 잠가버리고 그 곁에 섰다.

흠. 문을 뜯어버릴 생각도 했는데, 보는 눈이 많아서 그건 못하겠고...

무엇보다 경계를 서는 놈부터 기절시켜야 했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내 연기력은 그다지 좋지 않은데...괜찮으려나.


“저...저기요...”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문 옆에 선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지금...배가 아파서...”


나는 없는 연기력을 끌어 모아, 혼신의 아픈 연기를 펼쳤다.

그러자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민망한 나머지 얼굴에 피가 확 몰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정말로 아파보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참아.”

“저..정말...힘들어요...”


나는 숨까지 헐떡거리며 문고리를 잡고 스르륵 주저앉았다.

작은 창을 통해 내 모습을 살피던 남자는, 결국 찜찜한 표정으로 바지춤을 뒤적거렸다.


“망할 애새끼 같으니. 하여간 도움이 안 돼.”


문고리에 열쇠가 들어가고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살짝 열렸다.

놈이 내 팔목을 붙잡았다.

나는 놈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여전히 아픈 척을 하며 바닥에서 질질 끌려갔다.

다리가 거친 바닥에 쓸리는 탓에, 눈물이 찔끔 났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아픈 것을 참아가며, 주변에 다른 인물들이 있는지 확인을 했다.

이번만큼은 행운의 여신이 내 편이었는지, 화장실 근처로 갈 때쯤, 이 근방을 돌아다니는 인간은 우리를 제외하고 없었다.


남자가 나를 대충 화장실에 던져 넣으려 하자, 그 때를 틈타 나는 마력으로 강화된 발로 놈의 등을 세게 내리쳐 넘어뜨렸다.

남자는 짧은 단말마와 함께 바닥에 얼굴을 세게 부딪쳤다.

애새끼한테 이 정도의 힘이 있을 줄은 몰랐지, 이 새끼야.


“이 새끼가- 크헉.”


놈이 더 큰소리를 내기 전, 나는 놈의 목을 강하게 조였다.

놈은 눈을 까뒤집으면서 괴로워했다.


나는 마력을 집중시켜 놈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그러자 놈은 더 이상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죽었나?”


기분이 꺼림칙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천인공노할 인신매매단원인데 내가 녀석의 목숨을 생각할 필요가 있나.

무엇보다 나는 피해자라고.

그렇게 합리화하며 나는 녀석의 주머니를 뒤져 열쇠 꾸러미를 꺼내,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면 어디로 나간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돌아 다녔다간, 아무래도 발각되는 게 빠를 테니, 역시 모습을 바꾸는 게 좋겠지.


나는 재빠르게 본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봤던 이곳의 구조를 떠올리며, 어두운 복도를 살금살금 걸었다.


‘진작 이 모습으로 돌아다닐 걸. 괜히 인간 모습으로 돌아다녔다가 이런 일에 휘말리고 말이야.’


이 모습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인간일 때와 달리 기척을 숨기기 매우 용이하다는 것이었다.

부드러운 발 덕분에 움직일 때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다시피 했다.

뿐만 아니라 털색 또한 검다보니, 어둠속에 있으면 웬만큼 밤눈이 좋은 사람이 아닌 이상, 내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찾았다.’


출구는 복도 끝 우측에 있었다.

아무래도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인신매매를 벌이는 놈들이라 그런지, 방비가 생각보다 허술했다.


이대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 순간, 방금 전까지 그 방에 있었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사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이 아이들을 풀어주고 도망치게 해주고 싶었다.

상품처럼 팔리는 애들이 과연 어떤 삶을 살겠는가.

거기서 좋게 풀려봐야 평생을 낙찰자에게 묶여 살아야하는 노예 일테고, 그것이 아니라면 저 아이들은 입에 담기도 싫은 일들을 경험해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탈출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에게는 그런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가족이었다면 모를까, 나는 그들과 생판 남이니까.


무엇보다 내가 짊어져야할 리스크가 너무도 컸다.

저 아이들을 어떻게 짧은 시간 내에 안전하게 탈출 시키겠는가.


그 순간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작은 꼬마 아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그래. 꾸물거릴 바에야 확실하게 일을 치는 게 낫지.’


나는 눈을 감고 이곳의 기척을 느꼈다.

아직까지는 이 근방으로 별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 아이들이 갇혀있는 방으로 갔다.

그리고 남자에게서 가져왔던 열쇠꾸러미에 있는 열쇠들을 하나하나 문고리에 넣었다.

이윽고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홀로 돌아온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빠르게 말할게. 나는 지금 이곳에 소란을 피울 생각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도망가고 싶은 녀석들은 바깥이 요란스럽다 싶으면 얼른 도망가. 여기서 나와서 복도 끝으로 내달려. 출구는 거기 있어.”


뜬금없는 내 설명에 아이들은 혼란스러운 듯 나에게 무어라 물어보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방에서 나갔다.

이 이상으로는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재빨리 다시금 고양이로 모습을 바꾸고는 아까 이곳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뛰어갔다.

경매가 벌어지던 곳에 가까워질수록 이리저리 움직이는 인신매매단원들의 수가 늘어났다.

곳곳에는 어두운 밤을 밝히기 위해 등불들이 다수 걸려 있었다.

나는 물건과 물건 사이를 넘나들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납치당했을 당시, 원래 있던 곳의 문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문을 슬쩍 밀어보자, 운이 좋게도, 문은 열려있었다.

하긴, 그곳은 철창까지 있으니까 구태여 문을 잠가둘 필요는 없나.

나는 주변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


눈을 감고 있던 아이는 철커덩 거리는 소리에 슬쩍 눈을 뜨더니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과 달리 그 아이 이외에도 눈을 뜬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철창문을 열며 말했다.


“딱 숫자 30까지 세고 있어.”

“무슨 소리야...?”

“다 세고 나면 펑하는 소리가 들릴 거야. 그러면 빨리 여기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뛰어. 그러면 복도 끝에 도달할텐데, 거기서 다시 오른쪽으로 달리면 출구가 나와.”

“오빠?”

“친구랑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랄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방에서 나왔다.

안 하던 짓거리를 하려니까 심장이 벌렁거려서 죽을 맛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뭐야, 여기 왜 이래!”


내가 쓰러뜨린 놈을 누군가가 발견한 모양이다.

고함소리에 인신매매단원들이 사방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이런, 조금 이르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뭐야?!”

“여기 왜 고양이새끼가 있어? 관리 제대로 안 해?”


나는 놈들을 약 올리듯 이리저리 놓여있던 물건들을 넘어뜨리며 돌아다녔다.

놈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자 나는 높이 쌓여있는 물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천장에 매달려있던 램프와 램프를 넘나들며 선을 하나씩 물어뜯었다.


쨍그랑- 하고 경쾌하고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램프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램프 안에 들어있던 불씨는 나무바닥과 하나가 되어 크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야 야. 물 가져와!”

“저 새끼 잡아!”


우왕좌왕.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엉켜 난리법석이었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자 몇몇 놈들은 도망치고 있었다.

어허. 그렇게 도망가면 쓰나.


“크악.”


나는 물고 있었던 작은 기름병을 그들의 앞에 내던졌다.

그러자 불과 만난 기름병은 폭발을 일으켰다.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비규환. 이보다도 이 상황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거다.


새까만 연기가 천장을 자욱했고 나는 몸을 낮추었다.

슬슬 나도 나가야할 때였다.

이 이상으로 여기에 머무르다간 나 또한 유독가스로 죽게 생겼다.


나는 벽을 디딤 삼아 높이 점프해 구석에 나있던 작은 창문에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바깥으로 사뿐하게 착지했다.


바깥에서 보니, 까만 연기가 창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나오고 있었다.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마 경매장 쪽의 인간들이 대피하느라 내는 소리이리라.


나는 불타는 건물을 슬쩍 쳐다보고는 여관을 향해 내달렸다.

안에 있던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무사히 잘 탈출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는 죽었을지도 모르고, 또 누군가는 도망치는 걸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저 각자 알아서 잘 도망쳤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영웅이었다면 모두를 안전하게 구해, 행복한 엔딩을 이끌어 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 볼일 없는 존재다.


그러니까 이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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