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양이가 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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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반
작품등록일 :
2019.04.0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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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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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20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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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87화 - 연기하는 고양이 (2)

DUMMY

옷을 갈아입고 난 뒤, 나는 영 어색해 어정쩡한 모습으로 대기실에서 서있었다.

반면 로니는 제가 입은 것이 날개옷이라도 되는 것 마냥 치맛자락을 펄럭거리며 신나하고 있었다.

급기야 그는 중앙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우와. 그림이랑 똑같아!”

“그림?”

“응! 일라이가 가끔 그림들을 갖고 올 때가 있었는데, 거기에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그려져 있었거든.”


일라이의 취미는 그림 수집이라도 되는 건가.

그의 성격을 보면 꽤나 어울리는 취미였다.


똑똑-


우리가 대화하고 있을 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에 우리에게 옷을 건네주었던 그 여성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살피더니, 주름져있는 부분을 곱게 펴주며 말했다.


“잘 갈아입었네. 그러면 바로 분장실로 가자.”


으음. 생각할수록, 이베네 교육원에서의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지금과 비교하면 그 때가 차라리 낫지 싶었다.

적어도 그 때는 소설의 남주인공을 맡았던 거니 말이다.


불안함으로 가득한 마음을 안고 나는 분장실에 들어갔다.

안쪽에서는 다른 배우들을 분장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붓이 얼굴 위로 스쳐지나가는 느낌은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얼굴 위로 무언가가 얹어지는 감각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새삼스레 화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길 무렵, 화장이 끝났다.


“좋아. 다 됐어. 후우.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분장사가 내 머리 위에 갈색 가발을 씌웠다.

나는 거울 안에 있는 내 모습을 살피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머리 스타일까지 달라져서 그런지, 거울에 비춰지는 내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분장이라는 건 역시 대단하구나.

비록 여장이라는 것이 못내 거슬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기도 하고...


나는 옆에 앉은 로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헐.”

“어때?”


로니가 방긋 웃었다.

그는 제 머리색과 같은 가발을 쓰고 있었는데, 어깨까지 내려오는 것이 정말로 그와 어울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를 귀족가에서 일하는 귀여운 꼬마 시종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원래도 성별이 모호하게 보일 정도로 곱상한 애긴 했다만 아예 작정하고 꾸미니까... 침착하자. 저 놈은 남자다.


나는 자꾸만 인지부조화가 오는 것을 막느라 부단히 애를 써야했다.


“와. 에디도 다른 사람같아!”

“어..으응. 너도 그렇네.”

“헉. 그런가? 일라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글쎄. 적어도 네가 연기를 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는 원래 있던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로니가 자꾸만 제 얼굴을 만지려 하는 것을 계속 제지해야 했다.


“로니. 그거 건드리면 다 망가진다.”

“우으. 그래도 뭔가 불편해.”

“원래 그래. 참아.”

“에디는 안 그래? 에디 전에도 이런 거 해본 적 있어?”

“해본 적이 있겠냐.”


정확히는 지금처럼 분장 비스무리 한 걸 한 적은 있지만, 나는 구태여 그것을 로니에게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안 그러면 그 이야기로 또 한참 로니에게 시달릴 것이 분명했으니까.


“이제 시작하기까지 얼마 안 남았나.”


나는 창문에 쳐진 커튼을 걷어냈다.

바깥쪽엔 연극을 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다.

생각보다 수가 많은데.


이윽고 바깥에서 입장을 시작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드디어 공연 시작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덜컹-


대기실 문이 열리더니 로완이 들어왔다.

그는 남자주인공답게 말끔하면서도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저렇게 있으니 어느 나라의 왕자님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제 곧 시작이니까 무대 아래쪽 대기실로 가자.”


우리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는 우리를 비롯한 여러 단역 배우들과, 한 여성이 서 있었다.

우리가 극단에 올 때, 로완에게 말을 걸었던 바로 그 여성이었다.


“이자벨. 오늘도 잘 해보자고.”

“나는 언제나 준비 완료야.”


이자벨이라 불린 여성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급하게 데리고 온 대역들이 이 아이들인 거지? 안녕.”


이자벨이 허리를 굽혀 우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부탁드려요.”


이자벨은 살짝 웃으며 나와 로니의 손을 마주잡았다.

로완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주변을 환기시켰다.


“자, 오늘도 멋지게 해보자고.”


로완의 말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짧지만 크게 대답했다.

로완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때 바깥에서 관객들의 입장을 돕던 스태프가 안으로 들어왔다.


“관객들 전부 들어왔습니다.”

“좋아. 손님들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가자.”


우리는 로완의 뒤를 따라 대기실에서 나와 무대 아래로 향했다.


***


첫 스타트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우리는 이자벨의 곁에서 배경처럼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로니 역시 걱정과 달리 무난하게 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제, 한 차례 여주인공이 가문과 갈등에 부딪히는 장면이 나올 차례였다.


우리는 이자벨을 따라 무대 위로 올라갔다.

나와 로니의 목표는 이자벨의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시종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로니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뭐야, 벌써 연기하는 거야? 대단하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찜찜한 기분이 들지.

나는 애써 그 기분을 묻고 역할에 몰입하기로 했다.


무대에 불이 들어오고, 이자벨은 아버지 역할을 맡은 자와 말다툼을 격렬하게 벌이기 시작했다.

우와. 실제로 눈앞에서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는 것을 보니, 박력이 어마어마했다.

역시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자벨의 뒤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제나. 작위는 대대로 첫째 아들들이 이어왔단다. 그렇기에 너는 차기 백작이 될 수가 없어.”

“그런 게 어딨-”


내 이럴 줄 알았다.

나는 급하게 로니의 옆구리를 찔러 헛소리를 하려는 것을 막았다.

대본에 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몇 번을 말했는데 한 귀로 흘려들었구만, 이 자식.


그러니까 다음 씬에서 제나가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고 저택을 뛰쳐나갔던가.

그리고 우리는 그냥 아가씨의 이름을 부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면 됐다.


이사벨은 프로답게 흔들리지 않고 제 연기를 이어나갔다.


“아버지. 저는 가문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줄곧 노력해왔어요. 당신의 자식들 중에서 누구보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단지 가문에서 여성이 작위를 이은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원하지도 않는 사람과 약혼을 시키시겠다고요? 가문의 첫째는 버논이 아니라 저예요.”

“말 조심하거라. 그 자는 인품이 좋은 사람인데다 왕에게 총애받는 자야. 네가 그 자와 결혼한다면 우리 가문 역시 이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가 있는 것인데-”

“결국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희생하라는 뜻이군요. 잘 알겠습니다. 아버지.”


이사벨이 싸늘하게 몸을 돌려 무대 너머로 사라졌다.

이 때다. 나는 극에 몰입한 나머지 맹하니 서 있는 로니의 등을 두드렸다.

로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가씨!”


그리고 이사벨이 사라진 무대 너머로 우리 역시 종종 걸음으로 달려나갔다.

무대 아래로 내려온 나는 로니를 노려보았다.

로니는 모른척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후우. 로니. 거기서 왜 뜬금없이 말을 하려고 했던거야?”

“그치만 너무하잖아. 그 사람 나빴어!”

“이건 연극이야. 진짜가 아니라고.”


나는 이사벨쪽을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이사벨은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의 대사가 끝나고 난 뒤, 다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로완도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는 여유롭게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후후. 어때. 할 만하지?”

“할 만 해!”


네가 할 소리냐. 나는 로니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엄청 재밌어! 연극 하는 사람들은 매일 즐겁겠다!”

“하하. 나도 처음 연극을 했을 때 그랬어. 대중 앞에서 연기를 선보일 때의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 현실과 또 다른 모습을 내 안에서 꺼내서, 사람들 앞에 보여줄 때, 비로소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거든.”


로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


“응응, 알 거 같아!”

“오, 로니스는 완전 연극 체질인가 본데? 이참에 극단에 들어가보는 건 어때? 우리쪽도 때마침 몇 명이 나가서 인원 충원이 필요하거든.”

“좋..”

“안 돼. 일라이가 허락 안할 거야.”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로니가 입을 쭉 내밀었다.

로완은 키득거렸다.


“그럼. 부모님 허락을 받으면 한번 테스트 받으러 와봐.”

“정말?”

“그렇다고 꼭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야.”

“어째서!”

“이번은 특이 케이스니까. 원래라면 대역을 세울 때도 간단한 테스트를 보고 투입했는데, 이번 같은 경우는 우리도 워낙 급했던 탓에 연기고 뭐고 제대로 너희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없었으니까.”

“우우. 자신 없어졌어.”


로니가 시무룩해하자 로완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했다.


“인생이 마냥 쉬운 것도 재미없잖아?”

“응. 그렇지!”


정말 쿵짝 하나는 잘 맞는 인간들, 아니 인간과 드래곤이었다.

나는 멀거니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로완은 인생이 쉬운 건 재미없다고 했지만, 나는 적어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인생이 어려워도 재미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극복하고 위에 서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였다.

평범한 사람들은 삶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도전의식이 생기기는커녕 무기력해지고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적어도 예전의 나는 그랬으니까.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언제 돌아온다고는 말을 안 했었지.’


일라이가 텔레포트로 사라질 때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은 따로 안 했었다.

하지만 가능한 헬리그에 빨리 도착하길 바랐으니까, 에드를 그리 오래 붙잡아 두진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일라이가 에드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오느냐였다.

일라이가 검술을 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고, 드래곤이니까 아무래도 마법 관련 실력을 더 키워주고 오려나?


그러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일라이는 마법에 통달한 드래곤이니까, 이번에야말로 내 마법실력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마력은 무식하게 넘치는 몸이었건만, 내 마법 실력은 여전히 초짜 마법사만도 못했다.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피지컬이 좋은 사람이 운동을 지지리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내 인생은 왜 이러나 몰라.”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어느새 로니는 내 곁으로 돌아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완은?”

“다음에 나가야 해서 갔어! 이제 기다리면 돼!”


로니는 무대 위를 가리켰다.

과연 로완은 무대 위에 올라서 제 연기를 마음껏 펼치고 있었다.

열정적으로 대사를 뱉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가슴 한편이 찌르르 울렸다.

이래서 사람들이 연극을 보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가 보다.


우리는 아래에서 연극이 계속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연극은 점차 클라이막스를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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