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노운
회색빛 빛바랜 도시는 내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았다. 그저 과거 인간이 만든 낡은 유산에 지나지 않을 뿐.
"3023, 특별한 곳이 있는지 점검해줘."
【알겠습니다】
아직은 EEA의 신호가 잡힌다. 처음 생각은 죽음의 숲에서 쇼크웨이브만 테스트해 볼 생각이었다. 혹시나 흰옷의 여인이 나타날까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계속 북으로 올라왔다. 점등된 많은 붉은 점들은 고위 악마종이다.
내가 아닌 평범한 마인이었다면 단번에 악마종에게 둘러싸였을 것이다. 이곳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아니 계산상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선다.
자치령의 모든 마인이 죽음을 각오하고 올라온다 해도 이곳 평양까지는 무리수란 게 느껴질 정도다. 그만큼 악마종이 득실대는 곳이다.
아크 데몬 정도의 능력이 있을지라도 수많은 악마종을 처리하면서 내려와야 한다.
이건 아크 데몬일지라도 고역일 수밖에 없다.
반군에 내려온 아크 데몬은 어떤 루트를 사용했을까? 이것을 찾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내가 없을 때 그런 놈이 내려온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진다. 그 전에 대비책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김동희박사가 만든 매그넘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내가 없는 이상 탄환을 계속 보급하지 못할 거고 아크 데몬에게 통할지도 미지수다.
이왕 올라온 김에 더 북쪽을 조사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3023, 아크 데몬이 내려왔다면 어느 쪽이 가장 효율이 높을지 루트를 계산해 줘봐 가능하다면."
【중국에서 넘어온다면 최적의 루트는 단 한 곳뿐입니다. 지도에 표시하겠습니다】
언노운이 생각보다 빠른 결정을 내려 준다. 표시한 루트는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다.
"그렇군, 이 생각을 못 했어. 바다를 끼고 내려오면 한쪽만 신경 써도 되고 길을 잃어버릴 이유도 없고. 놈은 해안선을 따라 내려왔구나. 그러다 쇼크웨이브에 이끌린 거고."
【그 추측의 가능성 확률은 칠십 퍼센트 이상입니다】
잠시 고민이 됐다. 지금 이대로 서쪽 해안선을 조사해 볼까? 해안선을 따라 북상해 볼까?
아니면 이대로 내륙을 관통해서 위로 올라갈까?
"내 정신 봐라. 셈텍스가 있었지. 3023,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좌표를 셈텍스에 입력해줘."
언노운이 계량한 셈텍스는 좌표만 입력해 놓으면 그 좌표로 이동할 수 있다. 당연히 에너지 원인 에테르가 충분한 경우에 한해서다. 즉 에테르만 있다면 밝혀진 지도의 좌표 내에서는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언노운에게 왜 전체 지도를 작성하지 못하냐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있다. 언노운은 대략적인 지형 검색 범위의 한계를 가지고 있어 범위 내를 제외하면 좌표 산출이 불가능했다. 아니 정확히 좌표 지역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노운이 한 말 중에 이상한 부분도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의 지도와는 침습 범위가 달라 맞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미래의 지도, 그리고 미래의 일 정확히 이틀까지의 일을 제공한다.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라 언노운에게 수많은 질문을 했지만, 대답은 언제나 두리뭉실하게 돌린다. 내가 지쳐 그만둘 때까지 언노운은 우회적 표현으로 직설적인 답은 늘 회피한다.
가끔 내뱉는 말에 큰 의미가 들어 있는 것도 있다. 내가 뭔 미래를 알게 되면 차원의 큰 축이 틀어져 버리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해진다는 이야기는 한 적이 있다.
언노운에 관한 의문점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말하기 그렇다. 그는 백오십 년 전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러니까 그는 우주라는 표현을 쓴다. 하늘 위 암흑의 세상.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기계를 이용한다고 하는데 그걸 인공위성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셈텍스를 개량하여 좌표를 입력하고 이동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이 과거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공위성 미르호 덕분이라고 한다.
좀 더 많은 기술적인 부분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뿐. 대충 설명을 들어 보면 기술적 연동 부분에서 구동 방식의 차이라는 것인데 그때의 전지 연료와 지금 연료인 에테르가 연동이 안 되어서 완전하게 구동하려면 이 세계의 에테르를 완전히 융합해야 한다고 한다.
정크 보이때 언노운이 나와 융합 하면서 했던 말이 있다.
'에테르 융합 0%. 추정시간 26만3천8백 시간 소요'라고.
즉 자신이 완전히 기동하기 위해서는 이차원의 에테르를 융합해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26만 시간이라는 거다. 지금은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으니 줄긴 했을 거다.
정보 대부분에 록이 걸려 있다는 핑계는 이 부분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자신은 차원이 다른 곳에서 이곳 차원으로 넘어왔기에 이곳 차원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습득하기 전까지 록 해제는 매우 더디게 진행된다고 했다.
그리고 언노운은 필요한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한다. 내게 전천후 병기인 반월륜을 만들어 준 것도 그때 당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 준 차원 무기다.
점점 환경이 바뀌어 갈 때마다 언노운은 나를 강하게 무장시켰다. 반월륜이 통하지 않는 적이 나타나자 스페이스 커터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데빌이라는 더 강한 적이 나타나자 리엑티브 펄스 쉴드와 디멘션 아크 입자포를 해제시켜 주었다.
언노운이 쓰는 무기는 대부분 차원 에너지를 이용한 무기다. 한번은 임페리얼 테크노트리아 마공학의 천재 과학자인 박창규 박사에게 물은 적이 있다. 차원 침습 이후 차원을 이루는 물질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은 지금도 연구 중에 있다고 말했다. 언노운은 차원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이용했다. 언노운이 가진 차원 지식은 이미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녀석은 어쩌면 교묘하게 나를 이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녀석은 무슨 목적으로 나에게 접근했을까? 그리고 나를 묘하게 훈육하는 느낌이 든다. 언노운이 없었다면 이렇게 성장이나 했겠는가? 데드 오어 라이브를 맞은 그 순간 나는 이미 저세상으로 갔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대부분 정직하게 말해준다. 그러나 반드시 적정선을 그어 놓고 있으며 절대 그 선을 넘지 않으려 한다. 내가 가장 많이 부탁하는 것이 미래에 관한 정보다. 언노운은 철저히 이틀 정도까지의 미래만 제시한다.
그 이상은 차원의 축 변형이 올 수 있다는 고리타분한 말로 가드를 쳐 버린다. 언노운은 이것이 다른 차원에서 기록된 과거의 정보들이라고 말하며 이 차원에서 자신이 존재하려면 이 차원의 축이 자신이 왔던 축과 뒤틀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즉 사소한 일 정도는 상관없지만 큰 축이 되는 미래는 반드시 자신이 온 차원과 같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큰 축이 되는 미래를 알고 싶었지만 절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언제나 하는 말은 록다운 걸려 있다는 핑계뿐.
그 외 사소한 것들 솔직히 사소한 것이 아니지만, 임페리얼 테크노트리아의 과학자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엄청난 것들을 척척 만들어 낸다.
아이템 속성 해제 장치인 언프라퍼티 스캐너, 강화 베드인 익스펜드 템퍼드 머신 지금도 임페리얼 테크노트리아 과학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어도 비밀을 풀지 못한다는 기계들이다.
엄청난 과학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딱 필요한 부분만 제공하고 그 이상은 허락지 않는다. 내가 닦달하면 늘 같은 핑계만 댈 뿐. 녀석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지금 이 생각도 언노운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내 뇌 속의 신경 뉴런 다발에 언노운의 나노로봇이 가득 들어 있을 테니. 녀석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스스로 그에 대한 답을 준비해 둔다.
그리고 내가 먼저 묻기 전까지는 절대 먼저 말하지 않는다. 가장 적절한 답을 이미 알고 있어도 내가 묻기 전까지는 함구한다. 이건 언노운의 철칙과도 같은 것이다. 다만 내가 극도로 위험한 순간에 처하면 독단적인 행동을 하기는 했다. 데빌과 싸울 때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능력을 개방시켜 준 것을 보면 녀석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지금 내 생각을 언노운은 벌써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가장 적절한 답을 이미 찾아 놓았을 거고. 그렇게 언노운 생각만 한 채 달렸더니 주위 풍경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서쪽 바다가 나올 때까지 쉼 없이 달릴 뿐이다. 가끔은 멈춰서 주변 악마종을 구경하기도 했다. 여기도 세슬로이드와 레더 스컬이 끝도 없이 돌아다닌다.
남쪽과 다른 점은 상위 악마종의 개체수가 월등히 많다는 것 정도이다. 그리고 가장 궁금했던 것이 데빌의 존재인데 북쪽에 와서 언노운이 검색한 지역에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데빌은 재앙급, 멸살급, 파멸급 이 세 종류로 분류한다. 사실 이 분류도 언노운이 말해 준거고 내가 연합과 자치령에 퍼뜨렸다.
재앙급은 두 번 봤고 멸살급은 지금부터 이십 년 전 한 번 파멸급의 데빌은 언노운이 있다고 존재를 말한 것이 다였다. 데빌은 리젠이 되는지 어떻게 나타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언노운은 데빌이 나타나는 것은 불규칙한 확률에 의해 차원의 틈이 벌어지면서 기어 나온다고 하기는 했다. 불규칙한 것에는 규칙성을 부여 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하여튼 검색 범위가 좁아서인지 지금까지 내 경로상에는 데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짠 내가 난다. 며칠을 달렸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다. 내가 이럴진대 아크 데몬도 비슷한 수준으로 내려왔을 거다.
시계가 확 틔고 바다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수평선을 보니 마음이 확 트인다.
갑갑한 내륙보다는 이런 바다가 너무 좋다. 그리고 바다 근처에는 악마종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모래사장을 따라 한참 북상했지만 악마종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해 간다. 해안가를 따라가면 악마종과 부딪힐 확률이 내륙보다 훨씬 적군. 아마 아크 데몬도 분명히 이길을 따라왔을 거다."
모래사장을 따라 걷다 보니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그동안 달리기만 죽도록 했고 며칠째 먹은 것이 전혀 없었으니.
ITB에서 캠핑 도구를 꺼내고 간만에 음식을 차렸다. 모래사장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고기를 구웠다. 포도주 한잔을 곁들이니 고기 맛이 훨씬 살아난다.
파도 소리가 너무 즐겁다. 혼자인 것이 너무 아쉬울 정도다. 현희 누님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컷 먹고 대자로 드러누워 잠을 잤다.
깨어나서 기지개 한번 켜 주고 다시 달렸다. 곧 밤이 찾아왔지만, 야간에도 문제없다.
달빛 정도만 있으면 대낮과 똑같이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며칠을 갔을까 드디어 EEA의 수신이 차단됐다. 자치령 수신기와 거리 차이로 인해 통신이 끊겼다.
나는 지도에서 내 위치를 확인했다. 언노운이 옛날 인간의 나라였을 당시 국경선을 표시해 주었다. 그 국경선 너머가 중국이다.
"하루 정도면 중국에 도착할 수 있겠다."
거의 다 왔다. 압록강이라고 표시된 강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3023, 지도 검색 범위를 넓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방법이 없어? 중국 땅이 너무 넓어서 혹시라도 살아 있는 인간을 찾으려면 너무 방대해."
【현재 검색 가용 범위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침습 차원에서 발생하는 역장 에너지는 검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까 방법이 없다는 거냐?"
【인공위성 미르호와 완전히 연동되면 GPS를 기동시킬 수 있습니다】
"인공위성인지 뭔지 백 퍼센트 연동되려면 얼마나 걸리는데?"
【현재 조건으로 최소 6년 정도 걸립니다】
"아니 육 년이 되어야 검색 범위가 넓어진다는 거냐? 아니면 조금씩 넓어져서 육 년이 될 때 전체 검색이 가능하게 된다는 거냐?"
【조금씩 지도 검색 범위는 넓어지고 있습니다. 육 년 가까이 가면 대륙 전체 스캔이 가능할 정도로 활성화됩니다】
"육 년이라. 그럼 대륙 안에 어떤 놈이 있는지 다 알 수 있다는 이야기냐?"
【대상을 찾는 것은 별개입니다. 지도만 활성화 가능합니다】
"어휴, 이러나저러나 사람 찾는 것은 바닷가에서 모래알 속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잖아. 아크 데몬 같은 놈들이 분명 더 있을 텐데."
그리고 머지않아 압록강이 보였다.
"이야. 이거 이 해변 루트 정말 조심해야겠는 걸 마인은 몰라도 아크 데몬은 쉽게 들락날락하겠어. 중국 땅이라. 이곳에도 사람이 살기는 할까? 조선 뭐 인민이라는 나라의 사람은 완전히 사려져 버렸네."
언노운이 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곳은 인간은 완전히 멸족되고 없는 분위기다. 물론 내가 이동한 서쪽을 기준으로 했을 때고. 동쪽은 더 황폐할 테니 사람이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다. 남쪽에서도 동쪽은 대부분 저쪽 세계에 침습 당하고 있으니까. 침습한 곳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확률은 없다.
이쪽 땅은 완전히 저주받은 땅이다. 사람이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하늘이 정해 준 운에 따라 살아 남았을 뿐. 운이 미치지 않은 이곳은 저주받은 대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압록강 물을 차고 뛰었다.
"최초로 중국 땅 입성 자가 되었군. 자 어디로 가 볼까? 3023, 네가 루트를 한번 짜 볼래? 너도 운이란 게 존재하는가 보자. 네 행운을 기대해 볼게. 목표는 아크 데몬이 있는 곳이라야 하나?"
나는 겁도 없이 들떠 있었다. 지도를 밝히는 재미와 셈텍스가 있으니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무작정 움직였다.
물론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무리해서 이곳까지 온 것은 네크로폴리탄에 가장 위협이 되는 아크 데몬의 출저를 밝히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그리고 우리 외에 살아남은 인간이 있는지 조사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고.
지도위에 굵은 노란선이 그어졌다. 언노운이 검색한 루트다.
"그럼 3023이 검색한 길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한번 가 볼까?"
- 작가의말
어제 오늘은 잠시 쉬어 가는 회차입니다. 다시 본격적인 사건 진행을 위한 숨고르기용 회차입니다. 언노운에 대한 진실도 조금씩 밝혀야 되는데 그 부분의 클리셰도 걱정입니다. 반전이 너무 강하면 엇박자 느낌이 들기 때문에 고심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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