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ndemonium. Mammon's Tower(101)
내가 보기에 브릔힐드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
이 친구 참을성이 그리 좋지 못하다.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 강한 상대일수록 투지가 끓어 오르는 녀석인데 이런 감칠맛 줄줄 나는 미션 풀이는 아마 극악의 난도일 거다.
브릔힐드의 성격은 올곧다. 얼굴만 쳐다보지 않으면 여성이라고는 일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패기 덩어리다.
왜 여자로 태어났는지 볼 때마다 안타까운 녀석이다. 혁련광도 괄괄한 성격인데 브릔힐드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이 녀석도 지가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전사 그 자체다. 광전사로 변신하면 개무식하게 직선으로 돌격해 대는 스타일.
그런 무식함 뒤에 섬세함이 느껴지는 능력도 겸비하고 있으니···.
일전 우리에게로 넘어온 바탈리언의 기억 데이터를 보면 기계 덩이 바탈리온에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브릔힐드다.
나치가 다른 대륙을 침공할 기본적인 스펙을 쌓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브릔힐드다.
구스타프 총통이 어떻게 브릔힐드를 발견하고 키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철저하게 세뇌된 듯했다.
정통 아리아인. 아리아인이 세계를 지배하고 우등 종족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될 것 같은 허구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브릔힐드는 내 존재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 가장 강한 의구심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다. 머리의 뿔.
자신이 지금까지 품고 있던 순수 아리아인의 자긍심이 흔들리고 있다. 자신은 아리아인이 아닌 인간과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의 출현으로 브릔힐드는 다른 감정을 가졌다. 그것은 동료애랄까? 같은 종족이라는 생각은 브릔힐드에 충격을 준 것 같았다.
다른 인간과는 달리 말도 안 되는 전투 능력. 이것은 돌연변이를 떠나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총통은 모든 아리안의 정점에 오른 자라고 칭송했지만 작은 의구심은 늘 품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만나면서 활화산처럼 터져 오른 거다. 같은 뿔을 지닌 동질의 인간. 그것도 아리안이 아닌 아시아인.
그리고 자신과 힘닿는 데까지 싸워도 비견될 만한 힘을 가진 인물. 브릔힐드의 관심을 끌 만한 상태였다. 거기다 층의 미션을 도와주니 어찌 마음이 쏠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사실 미션의 내용만 알면 스톰트루퍼와 바탈리언 정도만 움직여도 충분히 해결한다. 브릔힐드가 나설 필요가 없다.
"앞으로 이그조틱을 만나게 될 텐데 절대 그들을 죽여서는 안 돼."
"이유를 설명하고 답을 원해야지. 넌 항상 답만 던져 주냐."
"너 나를 믿냐?"
"아니···."
"같은 종족이라는 것은 믿지?"
"음, 그래도 그건 뿔이 있으니까."
갇혀 지냈다. 이 녀석 원래 성격은 순수하다. 구스타프 총통은 브릔힐드에 항상 정점에 오른 자의 권위를 심어 주었을 거다. 모든 이가 우러러보는 가운데 또래의 정을 느낄 상황도 없었을 테고 늘 혼자였을 테지.
다른 사람은 그녀를 신으로 떠받들었을 테고. 그녀의 기본은 아직 순수한 소녀의 감성이 묻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물론 외형을 보면 딱 질리지만.
바바리안도 아니고 어깨가 나보다 몇 뼘은 더 넓다.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는데 그 때문에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었고 어휴 상체도 어마어마하게 크다.
거기다 흰 망토까지 두르고 있으니 이게 진짜 여자인지. 하긴 긴 머리칼과 그래도 가슴이라도 불룩 나왔으니 여자라고 알아보지.
"왜 자꾸 쳐다보냐?"
"진짜 무식하게 생겼다고 생각해서."
"여자에게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지."
"여자, 푸핫핫. 아, 미안!"
"그러지 마라. 상처받는다."
"여하튼 이그조틱이 싹수없게 나오더라도 죽이지 말고 적당히 패주고 살려줘. 다 이유가 있어 그런 거니까."
"알았어."
앞에서 스톰트루퍼와 바탈리언이 쏘아 대는 총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들의 총소리는 화약이 아니라 압축 에테르가 폭발하는 소리라 총소리가 전혀 다르다. 더욱이 화약 냄새가 전혀 없다.
"왜 날 돕는 거지? 이그조틱은 아니라고 말했고 그들을 돕는 이유도 설명했지만, 굳이 나를 도울 필요가 없지 않아? 롱기누스의 창을 찾는 것을 도와 달라는 의미도 아니겠지? 네가 이그조틱을 이끌고 있으면 한창 더 올라갔겠지? 몇 층에 있어?"
"삼백 층에 다 올라가는 중."
"기운 빠지게 하는 소리군. 이곳에는 강함이 필요 없어. 두뇌가 필요 할 뿐. 총통은 왜 나를 여기 보냈는지 모르겠군."
"롱기누스의 창에 대해 알기 때문이지. 그 창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종족뿐이거든."
"네필림이라고 말한 것 말이냐? 우리가 네필림이냐?"
"그래 네필림이지. 우리말과 둘이 더 있고 앞으로 찾아야 할 네필림이 세 명이 더 있어."
"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디서 온 거지 정체가 뭐야?"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사실이야. 서두를 필요 없어."
"이 망할 탑을 올라야 할 이유를 알려줘. 너희들이 그렇게 앞서가면 창은 네 손에 들어갈 것이 뻔한데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하며 탑을 올라야 하는지···."
"말했잖아. 창은 맘몬이라는 악마가 감추어 두었어. 놈은 쉽게 창을 주지 않을 거야. 사실 탑을 오르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누가 먼저 창에 다가갈지는 미지수야. 꼭대기에 도착했다고 해서 창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가 따라가는 힌트와 네가 가진 레이더 중 어느 것이 빛을 발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
"만약 내가 먼저 창을 발견한다면?"
"그것도 운명이겠지. 단 하나의 부탁만 들어주면 돼."
"부탁?"
"창을 한 번 만져 보기만 하면 돼."
"그 정도야 못 할 것은 없지. 너는 창을 만져 보기 위해 찾는 거냐?"
"그렇다고 봐야지."
"그럼 혼자 탑을 오르는 편이 낫지 굳이 이그조틱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뭐야?"
"후, 넌 생각보다 머리가 둔하구나. 힘만 강하지 머리를 쓸 줄 몰라. 너 사회경험이 아예 없지?"
"···."
"당연히 필요하니까. 탑을 오르려면 순수한 인간의 영혼이 필요해 그것에 반응해서 이벤트가 진행되니까. 최소한의 머릿수가 있어야 이벤트가 발동해. 그게 혼자 다닐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야. 너도 조금 있으면 알 수 있을 거야."
"너는 어떻게 마음대로 층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지? 어떻게 매번 내가 어느 층에 있는지 알고 찾아오는 거야?"
"난, 이 탑에서 주는 가장 중요한 미션을 클리어 했기 때문에 얻은 능력이야. 내가 타는 게이트는 꼭대기 층까지 오를 수 있는 엘리베이터지."
"그럴 수가!"
나는 처음으로 브릔힐드의 놀란 얼굴을 보았다. 사실 브릔힐드는 그렇게 미인은 아니다. 미인은 고사하고 전사처럼 보인다니까···.
첫인상을 말하라면 강직, 우직 딱 이 두 개가 떠오르는 얼굴이다. 서양인이라 아름다운 금발을 가졌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정이 가는 얼굴이 아니다.
"그럼 꼭대기 층까지 가봤다는 거잖아? 몇 층이지?"
"꼭대기는 666층."
"666층이라. 까마득하군. 너는 늘 힘 빠지는 소리만 골라서 하는 재주가 있구나."
"오르려고 치면 금방 올라."
"금방은 무슨. 몇 년이 걸릴지 감도 오지 않아. 솔직히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고민하던 참이야."
"지원이 와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걸."
"그러니까···."
브릔힐드는 멈춰서서 나를 바라봤다.
"왜?"
"이그조틱 따위는 버리고 나와 손잡자. 같은 종족이라며?"
"사나이는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해. 그들과 먼저 만났고 약속을 했으니 지키는 것이 도리지."
"쳇. 이그조틱 따위 그렇게 신용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놈들이지. 우리 아리안이야말로···."
"시끄럽다."
"같은 종족을 먼저 챙겨주는 것이, 참 너는 어떻게 뿔을 감출 수 있지?"
"내 능력이다. 필요할 때만 사용하지. 너는 안돼."
"같은 종족이라도 능력이 다 다른 건가?"
"물론, 네 버서커를 내가 사용하지 못하듯이 내 능력을 너도 사용하지 못해."
"아, 그렇군. 하지만 너는 버서커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던데 처음에는 왜 도망갔지?"
"솔직히 말하지. 처음에는 버서커가 버거웠어. 나는 경험치 보정을 받는데 강한 사람과 싸우면 싸울수록 경험치가 쌓여 전투력이 상승하는 스타일이지."
브릔힐드는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늘 싸움을 걸어 왔던 거군. 지금은 싸움을 걸어 오지 않을 것을 보니 내 버서커를 따라잡았다는 이야기고?"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네 능력이 또 하나 있잖아? 우리는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하나는 악마의 권능. 또 하나는 천사의 은총이지. 악마의 권능으로 버서커를 사용하고 천사의 은총으로 바탈리온 같은 무생물에 생명을 입히잖아."
"어떻게 알고 있지?"
"바탈리온의 기억 저장 장치를 해킹해 봤거든."
"끙."
"잘 생각해 봐야 할 거야. 우리가 네필림이라면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강하다면? 그 결과에 대한 반대급부를 생각해야 해. 우리는 우리의 힘에 걸맞은 상대가 준비되어 있어.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악마가 있으면 천사가 있다고. 우리는 그 중간에 걸쳐진 존재야 악이 될 수도 선이 될 수도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 존재들이지. 한낱 아리안이나 나치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우리는 우리 역할에 맞는 일을 해야지. 안 그래?"
"그래서 너는 무슨 목적으로?"
"세상을 이렇게 만든 존재들을 지옥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세상을 바로 잡고 싶을 뿐이야."
"왜 그래야 하지? 어차피 그 전 세상이나 지금 세상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고통은 같아. 오리 혀 지금 세상이 살긴 더 편할지도 모르지. 질병 따위에 고통받을 필요가 없으니."
"병신아. 죽으면 끝인데? 종족 번식도 못 하는 데 무슨 소용이야? 힘을 얻는 대가로 생식 능력을 잃었어. 지금의 인류는 멸종을 향해 가고 있다고."
"우리도 못 하냐?"
"내건 강해. 일반인이 견디질 못하지."
"뭐가?"
"뭐긴 뭐야 정자지."
"같은 종족이라면?"
"몰라 시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 아마도 안 될걸. 네필림은 특별한 존재니까. 함부로 번식하지 못할 거야."
"그렇군. 시험해 본 적이 없다고?"
"아서라."
"너 설마 내게 접근하는 이유가?"
"이기 미쳤나? 야 깔려 죽을 일 있냐?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김칫국 마시지 마라."
"김칫국? 무슨 소리냐? 성스러운 성녀인 내가 근본도 모르는 동양인과? 차라리 자결하겠다."
"성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설마 아직 처녀냐? 남자하고 응응 한 적 없지?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추한 언어로 나를 모독하지 마라."
"와! 너 나이가 어떻게 되냐? 아직 처녀구나. 으하하."
"그게 왜 웃기지? 성스러운 몸은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순수 아리안 혈통을 가진 완벽한 자만이 나와 맺어질 수 있다."
"지랄은 그만 하세요. 너 시도도 안 해봤지? 미친 것아. 어느 놈이 쑤셔도 네 질벽을 벌릴 수 없을 거다. 들어가야 피스톤 질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으하하."
브릔힐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이런 음담패설을 난생처음 듣는다. 그녀의 몸은 네필림이고 더군다나 전사형이다.
기본적인 신체 밸런스가 혁련광을 넘어선다. 솔직히 버서커화가 되면 혁련광은 한주먹에 나가떨어질 정도다.
그녀가 아무리 힘을 뺀다 해도 기본 완력이 네필림인 상태다.
전투력 천 이하짜리가 들이대 봐야 그녀의 그곳을 벌일 수조차 없을 거다. 물론 언노운이 말해준 정보지만···.
그녀와 잠자리를 하려면 최소 그녀 수준의 전투력을 가진 신체여야만 한다는 뜻.
브릔힐드는 그래도 이런 내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같은 뿔을 가진 동류의 동족을 만났다는 것에 깊은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다.
총통의 보호 아래 평생 성녀로서 품위를 지키고 살았던 그녀다. 그녀가 나서면 모든 스톰트루퍼들이 나치 경례를 부치며 존경해 마지않는다. 남성을 이성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녀는 비상식적으로 강하다. 그런 힘이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여자라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을 여성으로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음담패설을 재미있어했다. 심지어 욕도 들은 적이 없다. 누가 자신보고 병신, 지랄이라는 단어를 쓸까?
나와 이야기하면 전혀 생소했던 감정이 솟구치고 저절로 이야기가 술술 통하는 것이다. 총통과 이야기 할 때도, 다른 그 어떤 이와 이야기할 때도 전혀 느끼지 못한 감정들이 브릔힐드를 들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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