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장의 주인
수확장의 주인
님프로스는 손을 내밀었다.
"속이는 거 없어. 속여서 득 될 것이 전혀 없거든."
"마찬가지야.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지만 나도 거짓말할 이유가 없거든."
님프로스는 뻘쭘해진 손을 뒤로 뺐다. 놈은 필로모네의 안경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말했다.
"잠시, 기다려."
-번쩍
눈앞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님프로스의 자취가 사라져 버렸다.
이어링 자료실에 올라온 님프로스의 자료를 살폈다.
놈도 태생은 악마는 아닌 모양이다. 몸 전체가 전기 전도체다. 과거 인류가 찬양했던 많은 천둥 신 중 한 명이라는 것도 알았다. 인간의 오만과 방종으로 인해 자신을 섬기던 국가와 종족이 망해 흩어지자 자신의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갔다.
그는 있었는지조차 기억되지 않은 잊힌 신 중 한 명이다. 그리고는 대 숙청의 날에 천사에 쫓겨 도망친 곳이 결국 게헤나였다.
고대신의 특징은 선악을 같이 가지고 있기에 절대선인 천사는 손톱만큼의 악도 악마로 취급하는 특성이 있다. 자연스레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악마가 된 것이다.
"드디어 여길 나가게 되는 건가?"
섹서스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에 설렘을 갖고 있었다. 수만 년?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에 갇혀 있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그 자신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였다.
【스캔 완료되었습니다. 삼천이백팔십이 번 룸입니다】
3,282 룸 앞에 섰다. 비밀번호를 호출하는 신호는 노크 820회. 비밀번호는 338927528426.
방안에는 한 명의 노인이 잠자듯 누워 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노인이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엔드리아 게즈.
2020년 노벨 물리학 수상자. 여성으로서는 네 번째 노벨 물리학 수상자다. 그녀의 연구 대상은 블랙홀.
아인슈타인이 부정했던 블랙홀의 존재를 처음으로 관측한 인물이다.
언노운이 그녀를 찾은 목적은 블랙홀 연구논문 따위는 아니다.
【소멸성 나노봇 투여합니다】
서전 임펙트가 일어날 때 그녀는 NASA에 있었다.
초대질량 밀집성의 연구를 위한 복합 위성인 케이스트 인퀴리의 설계 및 관리 책임자였다. 언노운이 인퀴리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생체 인식권이 꼭 필요했다.
언노운은 그 위성의 사용처를 악마를 찾기 위해서라고만 했다. 그 이상의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다.
왜? 라는 의문부호가 계속 달렸지만,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가 하는 일이기에 반드시 인과의 고리가 있겠지.
【안구, 혈액 지도, 지문, 성대구조를 포함한 생체 인식에 필요한 요구 조건 충족되었습니다】
잠자듯이 누워 있는 엔드리아 게즈를 보았다.
그녀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매우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다.
"내 마음대로 해도 돼?"
【무슨 의미인지 상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여기 인간 수확장 말이야. 내 마음대로 해도 되냐고."
【인간 수확장의 수확물을 회수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어차피 해야 할 일이야.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해 두지."
【불가합니다. 이들 소유권은 피의 교단에 있으며 지금에 와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 수확장의 구조나 운영방식은 수확장마다 다릅니다. 똑같은 구조의 수확장은 없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수확장을 만든 악마의 개성이 들어가 있으므로 수확장의 구조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뭐라고 하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지? 어차피 내 선택을 중심으로 역사가 흐를 거니까. 네 말대로 메인 스토리 위에서만 떨어지지 않는다면야 상관없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권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잘못되더라고 복도 칠백명의 소유권은 내가 가지고 있어. 피의 교단도 그들은 어찌하지 못해. 내 소유라는 것은 달리 말해 파리 교단의 소유물이기도 하니까."
밖으로 나와 케일을 비롯해 핵심 지휘관을 소집했다.
"이곳을 털 생각이야. 사람들 구해야 하지 않겠어?"
케일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 말씀 언제 하실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어때?"
"두말하면 잔소리죠."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다.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이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악마 놈들의 농간이니 당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전에는 몰라서 어쩔수 없었다고 하지만 이제 모든 사실을 안 이상. 놈들과 싸워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우리는 벌써 오늘 열세 명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에 구원의 손길이 닿기를···."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구원의 손길은 영원히 닿을 수는 없을 거다. 이미 내가 포식했으니까. 쩝.
온몸에서 용솟음치는 권능의 소용돌이가 그 증거니까.
님프로스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여러 가지 대응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가장 큰 문제는 꿈꾸는 자들을 깨우는 것이다. 당연히 보통 일이 아니다. 이들은 방대한 악마의 네트워크상에 깔려 있은 셈이다.
셧다운시키고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서는 언노운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곳 인간 수확장에는 가드가 없다는 것이다. 왜 현실과 맞닿은 차원에 인간 수확장을 건설한 것인지 그 이유는 알수 없지만, 자칫 잘못해서 왓쳐의 눈에 띄기라고 하면 여긴 말 그대로 끝장나는 셈이다.
하긴 하나밖에 없는 왓쳐를 내가 쫓아 버렸으니 이제 이곳을 내려다보는 천사는 아무도 없다.
사흘이 지나고 나서야 38번 방에서 님프로스가 튀어나왔다.
여기서 사흘 지났으니까 저쪽에서는 3시간이었다는 소리다.
님프로스는 손에 쥔 두루마리를 흔들어 보였다.
"진짜 인지 아닌지 어떻게 증명할 거지?"
"이건 파피루스로 만든 두루마리다. 암미트가 직접 만든 것이다."
님프로스가 두루마리를 펼치자 가장 밑 문장 하나가 빛을 발했다. 그건 인간의 심장 문양 낙인이었다.
【암미티의 문장과 그의 피로 찍힌 오리지날 낙인입니다】
"에? 여기 수확장은 암미티가 만들었나 보네."
님프로스는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암미티님을 알면 그가 얼마나 무서운 신인지도 알겠네? 여길 건드리면 네 녀석의 심장을 삼킬 것이다."
"아. 나 보다 네 녀석이 먼저지. 넌 여기 관리자인데 엉망으로 만든 죗값은 치러야 하니까."
"흥, 네 녀석도 내가 아니면 절대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할 거다. 게헤나에서 이것만 가져왔다면 오산이지. 필로모네의 안경으로도 볼 수 없도록 차원 입구를 봉쇄해 놨으니까."
"그래서?"
"간단한 이야기 전개다. 넌 이 두루마리 증명서를 가지고 내가 열어준 차원 문으로 조용히 나가는 거지."
"나 혼자만?"
"이곳에 들어온 직후 소유권은 모두 피의 교단에 속해진다. 너는 규격 외품이니까 예외지만."
"호오? 손해 보는 짓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득까지 챙기시겠다?"
"이곳에 들어온 너희 잘못이지 네 잘못은 아니거든. 어디까지나···."
"멍청한 놈. 더는 들어줄 가치도 없네. 꺼져!"
순간 님프로스 다리 밑바닥에서 밝은 빛이 솟아 올라왔다.
"이런 제기랄!"
-파악
순간적으로 터져 오른 신성력에 섹서스는 고개를 돌렸다.
"하. 어떤 미친놈이 악마 추방진을 신성력으로 그리나? 그건 날개 애들도 안 하는 짓이야."
나는 번개같이 두루마리를 낚아채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설치된 덫 위에 님프로스가 걸려들었던 것뿐이다.
"가서 고생 좀 하겠군. 신성력에 맞았으니 며칠 움직이기도 힘들겠지. 어이. 시작들 하자. 암미타가 오기 전에 후딱 처리하고 떠나자고."
이미 계획된 대로 뮤턴트는 각자 맡은 방 앞으로 가서 비밀번호 키를 소환하고 난 다음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활짝 열었다. 방은 모두 4,850개이니 한 사람당 네다섯 개의 방문만 열면 된다.
열린 방문으로 소멸성 나노봇이 투입됐다. 한 마리만 투입해도 자가 복제 기능으로 초당 1억 마리씩 늘어났다. 차원 에너지를 흡수한 덕분에 거의 무한대의 에너지원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각 방에서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랜 잠으로 신체가 굳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이 뮤턴트가 아니었다면 아예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입구를 찾아야지.'
님프로스가 필로모네의 안경으로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하지만 내게 안경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일단 안경을 썼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됐다. 차원 투 과기답게 안경 너머의 세상은 오직 차원의 경계만 보여졌다. 즉 이 차원의 구조적 뼈대와 차원 경계의 벽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차원을 투과하면 당연히 차원과 차원을 연결해놓은 구멍도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님프로스의 말대로 차원의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그걸 찾는 것이 언노운의 역할이다. 더군다나 이런 일을 예상해서 차원 투과기의 성능을 업그레이드시켜 놓았다.
【공간의 일그러짐을 발견했습니다. 투과율 상승합니다. 안압의 상승에 주의하십시오】
한 곳에서 공간의 일그러짐이 발견되었다.
"케일 입구를 찾았어요. 모두 데리고 사번 방으로 들어가요."
이곳 차원 게이트는 변화무쌍이다. 즉 랜덤하게 무작위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동하기 전에 문을 열어야 한다.
4번 방으로 뛰어들어 오른쪽 벽면에 손을 대었다.
【님프로스의 전력량과 같은 암페어 수치를 흘려야 게이트가 열립니다. 지금부터 제가 신체 제어권을 가집니다】
'알았어. 빨리 해.'
전기 생성 장치를 만들어 놨다. ITB에는 온갖 것이 들어 있으니까 발전기 하나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님프로스의 전기를 정통으로 한 번 맞아 봤기에 그의 전격에 대해서는 이미 해석이 다 된 상태였다.
벽면에 강한 전류가 흐르자 게이트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됐다."
다행히 한 번 열린 게이트는 닫히기 전까지 이동하지 않는다.
그때 방안으로 뮤턴트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서 서둘러.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
방이 4,850개라는 뜻은 관리자인 님프로스를 제외하면 뮤턴트가 4,849명이라는 뜻이다. 악마 처지에서 보면 특히 피의 교단에서 보면 까무러칠 숫자다.
교단 소유물 인간 영혼 4,849마리를 도둑맞는 셈이니까. 아마 게헤나 역사이래. 손꼽히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인간 영혼 하나가 가지는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직접 경험해 봐서 더더욱 잘 안다.
난 단지 13명의 영혼을 포식하는 것만으로 더는 포식할 수 없을 만큼 한계치에 달했고 노말 상태의 바알 전투력을 넘어섰다.
복도는 좁고 더군다나 게이트 또한 작아서 한 번에 두 명이 나란히 들어가기도 힘든 상태라 금세 병목 현상이 일어났다.
"서둘러 과격해도 좋으니까 욱여넣어. 빨리빨리 빼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피의 교단에서 가만 있을 리가 없겠지. 여기서 한 시간은 저쪽에서 1초다. 원래는 님프로스를 소멸시키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추방하는 것이 한계다.
물론 전력을 내면 소멸시킬 수는 있겠지만 이 좁은 곳에서 놈과 싸우면 뮤턴트의 피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처리 방법을 선택한 거였다.
그 순간 이어링에 어마어마한 붉은 점등이 사라짐과 비명이 터진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아악."
"아악."
나는 즉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나갈 수도 없었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뮤턴트 때문에 복도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달렸다.
비명은 맞은편 복도 끝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가는 중에도 점등 수십 개가 한꺼번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쳇. 더럽게도 빨리 처 왔네."
복도 끝까지 거꾸로 달려가는 데 몇 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동안 많은 수의 뮤턴트가 죽어 나갔다. 나는 거대한 악어가 인간을 물어 반토막 내는 것을 보았다. 대부분 죽어 나간 것은 꿈을 꾸던 뮤턴트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디자인의 환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쪽 뮤턴트는 그들 때문에 사격하지 못했다. 좁은 복도로 꿈에서 깨어난 뮤턴트들이 모두 쏟아져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뚱이를 껌처럼 씹어 대는 악어 머리를 보고 그가 바로 이 인간 수확장의 주인 암미타임을 알았다. 나는 그가 씹어 대고 있던 뮤턴트를 보고 경악했다.
그는 바로 엔드리아 게즈였다. 암미타는 양질의 고기를 음미하듯 몇 번 쩝쩝거리더니 엔드리아 게즈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
- 작가의말
거듭 죄송합니다.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아예 푹 쉬었습니다만.
지금도 컨디션이 완벽히 회복된 상태는 아닙니다.
추웠다 더웠다 하니 몸이 풀렸다가 땀이 식으면서
또 한기가 돌고 골골 거리고 이러면서
벌써 일주일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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