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시작되는 인연(2)
세상은 광대한 무武의 바다, 내 곁엔 아무도 없다
두 여인이 가 버리고 말달리는 소리도 이젠 들려 오지 않는데 사내는 여전히 일어설 줄을 몰랐다. 이미 서아에게 맞은 고통도 사라졌지만 육신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좀 전에 황옥이 놀라는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추악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다.
‘아가씨가 많이 놀랐겠지..’
서아의 칼날에 스친 상처로 개미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비릿한 피 냄새와 개미의 스멀거림이 꽤나 성가셨다. 하지만 더 심한 것은 마음이었다. 황옥과 오늘처럼 가까이 마주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를 우연히 보았던 그날로부터 수 없이 상상했던 장면이었지만 가장 볼품없이 끝장을 보고 말았다.
그의 이름은 가경이었다. 그는 주제넘게 황씨 세가의 외동딸 황옥을 연모하고 있는 처지지만 그녀와 어울리는 데라고는 없었다. 그의 처지를 말하자면 어미 고윤은 이미 남편을 여러 번 바꾼 후에 지금은 약방을 하는 주영감에게로 가 버렸고 그 자신은 이곳 저곳 품을 팔거나 그마저도 불러 주는 사람이 없으면 굶는 처지였다. 거기다 나이, 열 다섯이 넘어서부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허리가 둥그렇게 휘었다. 대나무 끝을 억지로 잡아당긴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었다.
‘나처럼 추한 놈은 없을 거야.’
그는 황옥같이 고귀한 신분 앞에 서면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황옥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세가 있어도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내 머리 속에 든 황옥은 누구도 어쩌질 못한다.’
그는 그제야 일어서서 황옥이 주고 간 점심 보자기를 보았다. 얼른 봐도 재질이며 문양이 예사 보자기 같이 보이지 않았다. 보자기를 풀러 내고 보니 얇게 조각 낸 대나무 가지를 교묘하게 엮어 만든 작은 합(盒) 몇 개가 층층이 포개져 있었다.
‘어떻게 대나무로 이렇게 만들지? 예쁘네?’
합마다 꿀과 계화가루를 버무려 만든 타래 과자와 게살을 발라 넣은 교자가 들어 있었다. 밥도 제대로 못 먹어 본 그는 과자를 알지 못했지만 귀한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합의 맨 위칸엔 연잎으로 싼 밥이 들어 있었다. 합이 포개진 순서 가 곧 먹는 순서인데 모양이 예쁘기도 하거니와 향기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감히 먹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 뜻밖의 선물이 가져 올 봉변은 생각지도 못한 채.
***
황옥은 집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면서도 숲에서 마주쳤던 남자의 용모가 좀처럼 잊혀지질 않았다.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 어떻게 사람이 모습이 그렇게······무슨 업을 지었기에.”
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 부처님께서는 병든 사람을 보고 괴로움을 느껴 출가하실 마음을 냈다던데. 나는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리고 있다. 이래 가지고서야······.’
황옥은 처녀다운 부드러운 마음으로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용서를 빌었다.
“아가씨 이제 들어가시는 거예요?“
서아의 느닷없는 물음에 그녀는 제 생각에서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랐던 것이 짜증스러웠던지,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나오는 대로 받았다. 다혈질인 서아 역시 그런 대답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몇 번을 위험에서 구해 줘도 이 아가씨란 사람은 고맙다는 말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겐 친절하게 대하면서 유독 자신에게는 왜 이런 식인지 몰랐다.
“아가씨, 이런 일이 한 번 더 있게 되면 다시는 말을 타지 못하실 걸요?”
“왜 고해 받치려고?”
“아니요. 하지만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황견 도련님이 눈치채실 수도 있잖아요?”
그녀는 제 주인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이 얌전해 보이는 아가씨의 마음 어딘 가엔 타고난 열정이 숨어 있어 엉뚱한 일을 자주 한다는 것. 부친과 오빠가 그렇게 말려도 말을 타고 쏘다니고 돌아오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이번 승마가 알려지면 외출은 금지될 것이다.
‘얄미운 계집애..’
황옥은 쓴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머리에서 장식 구술을 빼 서아에게 건넸다. 뇌물인 셈이다. 서아는 장신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보다 고집 센 주인을 굴복시켜 흡족했다. 황옥이 그 표정을 모를 리 없었다. 나이는 자신보다 두살 어리지만 머리를 재게 돌리는 서아가 얄밉게 보였다.
“오빠가 알게 만 해 봐. 가만두지 않을 거야!”
황옥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강남의 남경, 금릉(金陵)은 오래된 서책처럼 그윽한 냄새가 나는 곳이다. 이곳에서 천년 동안 수많은 왕조가 일어섰다 역사의 뒷길로 사라져 갔다.
발길 닿는 곳마다 육조(六朝) 왕국의 흥망과 고사가 숨어 있었다. 지금 황옥이 거니는 계명사 연지정은 남당 마지막 황제 이욱이 애첩 장려화와 함께 숨었다는 곳이다.
“이욱이 누구예요?”
서아는 강남의 풍습도 몰랐고 옛일은 더욱 몰랐다. 황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금릉에 터잡은 마지막 남당(南唐) 황제야. 우리 태조(太祖, 송의 개조 조광윤)께서 남당을 복속시키고 혼일사해(混一四海,천하통일)하신 거야.”
“남당은 또 뭐예요?”
설명을 하려다 황옥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포기하고 말았다.
“그냥······,그런 게 있어.”
황옥의 발걸음은 연자기로 향했다. 비록 위에서 보면 협소한 곳이었지만 강 밑에서 보면 까마득한 절벽 위에 날아갈 듯한 누각은 새가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듯했다. 연자기는 예전 인종 때 명의였던 풍연이 손자를 찾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곳이다.
“풍연이 죽기 전에 황제에게 바치기로한 의서가 있대요. 그걸 찾으려고 아직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곤 한단다.”
황옥은 그렇게 연자기를 설명했지만 서아는 여전히 관심이 없었다. 황옥은 마음껏 금릉의 명소를 구경한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
* * *
오월이라 꽃들은 다 피어나고 바람도 좋다. 하지만 가경은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기분으로 걷고 있었다. 황옥과의 만남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마치 오래 산 부부가 만난 듯도 하고 종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는 서아에게 맞은 고통이 겨우 가라앉고서야 집으로 갈 생각을 하고 숲길을 빠져 나오는 길이었다.
오월이라고 하지만 강남의 오월이다. 제법 달구어진 길은 걷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얼굴 두 군데를 베어 피는 흘러 끈적이고 서아의 발꿈치에 찍힌 어깨뼈는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쑤시고 아파 왔다.
“어구구. 삭신이 쑤신다.”
그의 집은 금릉 남쪽 청량산 밑에 기둥을 받치고 시늉만 해 놓은 띠 집(茅屋)이었다. 가경은 그것도 집이라고 다친 몸으로 찾아가는 자기 꼴이 우스웠다. 차라리 동전 몇 문만 있어도 싸구려 술이라도 사 마시고 크게 취해 아무 데서나 자고 싶었다. 하지만 술은 고사하고 당장 밥을 사 먹을 돈도 없는 처지이다.
‘구걸을 해야 하나.’
구걸도 쉽지 않은 때였다. 강의 범람 이후 농지는 거칠어지고 인심도 따라서 흉악해졌다. 농사꾼의 마음은 한 해 농사에 따라 급변하는 법. 벌써 사람을 해쳐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도 있고 자식을 바꿔 먹는다는 말도 들리고 있었다.
그도 서툰 구걸 질로 봉변을 몇 번이고 치러야 했다. 어머니인 고윤의 집에 찾아간다면 한끼 저녁밥이야 얻어 먹겠지마는 꼴 보기 싫은 주 영감의 눈치를 봐야 했다. 자식 밥 한끼를 빌기 위해 어미 고윤이 주 영감에게 싸구려 교태를 떠는 꼴도 오늘은 보기 싫었다. 그의 의붓아비 주팔은 금릉 남쪽 표수현(漂水縣)이라는 곳에서 약방을 하는 사람으로 그다지 생활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도 가경에게는 쌀 한 톨도 아까워했다.
“왜 나의 부모는 한없이 가난하고 나의 몸은 성하지 못하고 곱사처럼 허리가 휘었는가. 왜 한 가지라도 제대로 누릴 복이 없는 것일까?”
그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비 생각도 하고 수 없이 남자를 바꿔 가며 양식을 얻어 살아 온 어미 생각도 하며 걷고 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그곳은 자신의 집이 있는 청량산 쪽이 아니라 황씨 세가의 영지였다. 저기 황씨 세가의 위세가 한껏 드러나 보이는 대문이 보였다.
'미친 놈'
그는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혼이 나고도 황씨 세가로 향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사해의 스산한 바람이 멈추질 않아
- 작가의말
서아는 비밀이 많은 아가씨. 그녀의 비밀이 가져올 파국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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