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음심淫心(3)
세상은 광대한 무武의 바다, 내 곁엔 아무도 없다
희봉 그녀는 이 곳 사람이 아니다. 이곳과는 풍습과 기후가 사뭇 다른 화북(華北)사람이다. 그녀가 전혀 생소하기만 한 강남에 온 것은 부친 설성서의 배려였다. 설성서가 황진후의 부탁으로 그의 긴 여행에 동참함으로 해서 여식 장기간 홀로 집에 남겨지는 것을 미타하게 생각한 끝에 황진후 집에 식객으로 머물게 한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가 황진후 같은 사람과 교분을 맺게 됐을까?’
황진후는 그녀가 살던 곳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강남의 세력가였다. 강남 땅에 오는 신임 태야(太爺, 지방의 수령)는 임지로 부임할 때 호관부(護官符)를 들고 온다는 풍문이 있다.
호관부는 말 그대로 관리를 보호해 준다는 부적을 의미했는데 호관부의 내용이라는 것이 재미있었다. 부임지의 방귀 깨나 뀐다는 명문가의 순번을 먹여 놓고 이들이 송사에 걸린다든지 위법한 일을 한다든지 했을 때 신임 관리가 이를 미리 알고 지방 세력가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도록 하게 한다는 취지였다. 물론 금릉에 부임하는 태야의 호관부 내용의 첫머리는 황진후의 몫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관리가 두려워 할 정도의 권세까지 쥐게 된 것은 황진후의 부친인 황가채가 각국의 진상(進上)과 조하(朝賀)를 관리하는 직을 맡아 볼 때 외국 사절은 모조리 황진후 집에서 유숙을 했는데 이것을 기회로 삼아 아들 황진후는 광동. 복건. 운남. 절강의 모든 서양 화물을 관리할 수 있었다.
황진후는 그런 발판을 이용해 교역과 유통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더 나아가 조정 관리를 매수하고 돈이 필요하면 투자자를 끌어들였다.
‘이문을 볼 수 있다면 오랑캐하고도 손을 잡는다.’
이렇듯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진후는 거대한 번영을 이룩해 낸 것이다. 그런 와중에 희봉의 부친 설성서가, 황진후의 고질인 창병(瘡病)을 낫게 해 준 이후 부쩍 황진후와 붙어 다니는 날이 잦아졌다. 이제는 아예 그의 장기간에 걸친 길동무까지 하고 나선 형편이었다.
‘하지만 난 싫어.’
그녀는 황진후의 집에 온 이래 은근히 뻐기는 듯한 집안의 위세가 거슬렸다.
‘내가 왜 이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해야 돼?’
하인들도 세전 노비들이 많지 않아서인지 유난히 드센 편이었고 툭하면 황진후의 위세와 가풍을 들먹여서 곤혹스러웠던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첨북함(南甛北鹹,남쪽은 달고 북쪽은 짜다)이라고 음식 맛조차 그녀 입에 맞지 않았다. 또 강남은 앞으론 장강이 가로막고 남쪽으로는 바닷길이 툭 터져 있어 외국과 교류가 많아서인지 이 곳 사람들은 부산스러울 정도로 활달하고 수다스러웠다.
희봉은 그들의 그런 기질에 적잖이 질려 있었다. 아비와 단 둘이 오래 살다 보니 말수가 없어지고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더욱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 황견만 해도 영락없이 파락호의 길을 걷는 주제에 되지도 않게 추근거리는 꼴에 반감을 느꼈던 것이다. 오늘 그녀가 생면부지의 가경을 돕고자 하는 것도 어쩌면 황견에 대한 반발도 포함돼 있었다.
‘네가 무고하게 죽일 사람을 내가 구하겠다.’
희봉은 아버지와 황진후의 변화된 관계가 무엇을 뜻하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이건 좋지 않아.’
아무리 아비와 친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식을 데려다 놓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혼인도 안한 처지에 남의 집 차를 마시게 하다니.’
여자가 ‘남의 집 차를 마신다’는 건 하차(下茶)라고 하며 대개 혼인이 완정됐다는 뜻이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아버지는 내 뜻을 헤아려 주시니까.’
희봉은 별 일 아니라고 스스로 자위해 보지만 서늘한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바짝 긴장한 탓에 피곤한 줄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뜻하지 않은 일로 기력을 소모했던 것이다.
“으음······.”
낯선 남자가 자신의 침상 밑에서 자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달콤하고 깊은 잠이었다.
***
가경은 죽은 듯 깊은 잠을 자다가 눈을 떠보니 온통 어둠뿐이었다. 끊어졌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처음엔 뒤죽박죽 헝클어져 애매하던 것이 차차 진정되며 눈에 잡힐 듯 떠올랐다. 황견에게 매맞고 붙들려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이며 뇌옥에 갇히던 일. 또 황옥이 떠나던 것이며 낯선 아가씨를 따라 방에 들어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혹시 다시 잡힌 것은 아닐까?’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마에 무엇인가 닿는다.
‘어이쿠!’
천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낮다. 마음을 진정하고 보니 옆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손을 뻗어 보니 부드러운 천의 촉감이 느껴져 들춰보니 한층 더 강한 빛이 환하게 새어 들어왔다.
‘방이네?’
그것도 향기가 어려 있는 여인의 방이었다. 가경은 잠시 빛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려 방안을 살펴보니 조그마한 여인의 발이 치마 단에 반쯤 가려진 것이 보였다.
‘아! 알겠다.’
가경은 그제야 희봉을 기억해 내고 침대 밑에서 몸을 굴려 밖으로 나왔다. 방안엔 희미한 등잔불이 켜져 있었고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희봉이 곤하게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희봉은 붉은 빛이 감도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가경은 새삼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아가씨의 정체가 궁금했다.
‘아가씨. 이름도 모르지만, 내생이라도 이 은혜를 갚을게요.’
하지만 은혜는 고사하고 우선 호랑이 굴 같은 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했다.
‘어디 있더라?’
가경은 품속을 뒤져 희봉이 그려 준 지도를 확인하고는 막 밖으로 나가려는데 희봉이 낮은 숨소리를 내며 슬쩍 몸을 움직였다.
“으음······.”
의자에서 자는 잠이라 몸이 불편한 듯했다.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 든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보는데 희봉의 희고 긴 목이며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봉긋한 가슴을 한참보고 있자니 눈을 떼기 힘들었다.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여인이어서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었다.하지만 지금 희봉은 방심한 채 자기 방에서 자고 있는 것이서서 가경으로서는 흡사 미인도를 감상하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꿀꺽!
가경은 자신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가는 몸매를 휘감아 도는 명주의 섬세함도 그렇거니와 몸을 뒤틀던 희봉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하얀 치아가 드러나는 것을 보자 입에 침이 고이고 절로 거칠어지는 숨결을 참기가 어려웠다.
‘이 미친 놈. 은인에게 짐승 같은 생각을 하다니.’
생각만 그랬다. 여전히 그의 눈은 희봉에게 고정된 듯 움직이지 못했다.
‘정말 미치겠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눈은 그녀의 곳곳을 탐하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가까이 갈수록 그녀의 머리에서 나는 냄새인지 향긋한 냄새가 풍겨 왔다.
‘참으로 어여쁘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 선을 만져 보려 했다. 아이처럼 말캉한 희봉의 뺨이 느껴지는 순간 그는 불에 덴 듯 놀라 일어섰다.
‘ 아뿔사!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살아 있는 여인의 피부가 주는 서늘한 충격에 가경은 가까스로 자제심을 회복하고 또 다시 마음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하며 서둘러 그녀의 처소를 멀찍이 벗어났다.
그가 본시 여자와 가까이 있었던 적도 없는 차에 잠든 여인을 보고 순간 숫컷의 본능적인 음심이 동했지만 원래 여자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고 여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스멀거리는 욕정을 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안합니다. 아가씨 용서하세요.’
희봉이 듣고 있다는 듯 용서해 달라는 말만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가경은 마구 달렸다.
사해의 스산한 바람이 멈추질 않아
- 작가의말
한순간의 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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