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사슴 갖옷을 입은 사나이(3)
세상은 광대한 무武의 바다, 내 곁엔 아무도 없다
사슴 갖옷을 입은 사나이(3)
무사망은 가경의 공세에 어깨와 팔을 베어 진이 무너진 틈을 타 동탁기와 추원의 목을 베어 끝장을 냈다.
“안돼!”
악리심은 하얗게 질려 달려오려 했지만 놓아줄 녹구가 아니다.
“개자식아. 싸우다 말고 어디가! 내가 호구로 보이냐!
악리심은 이미 분노의 화신이 된 듯 눈빛이 일변해 녹구의 도망(刀網)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녹구의 엄청난 패도를 무리 없이 받아내며 녹구를 찔러갔다.
”어, 내 칼을 받았어?“
녹구는 그의 검이 요혈을 노리고 파고들자 크게 놀라 뒤로 물러나며 막으려 했다. 한 번 공수가 전환되자 그걸로 끝이었다. 녹구는 막기 급급했다. 녹구의 대도는 공격 시에 파도와 같은 기세로 가공할 위력을 만들어 내지만, 수세에 몰리면 큰 것으로 작고 빠른 것을 상대하자니 번번이 실기할 뿐 뒤로 밀리는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상대는 악리심이다. 고요하게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던 검은 녹구의 참마도가 비켜 막으려 들자 무리 없이 목을 가져가려 했다.
“씨벌, 당했군.”
악리심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아니었다. 빛보다 빠르게 날아온 검이 악리심의 검을 튕겨냈다. 가경이 자신이 든 검을 던져 악리심의 검을 튕겨낸 것이다. 가경은 무의식 상태에서 행한 무심한 동작이지만 이 단 한수로 무사망 녹구 악리심은 일시에 공방을 멈추고 가경을 응시했다.
“이럴 수가!”
악리심의 검세를 뒤늦게 보고 검을 뿌려 악리심의 검을 튕겨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속도와 힘 모두가 악리심의 우위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완벽한 후발제인이다. 그것도 나를 상대로···.’
가경은 그런 것은 이미 의식 너머에 있다는 듯 닥치는 대로 제자들은 이번엔 권각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녹구는 가경은 그런 무의식 동작을 뚫어지라 보더니 표정이 크게 변했다.
“무사망, 저 자식은 누구야?
”내 은인이라네.“
무사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녹구는 호탕하게 웃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어린놈이 엄청 세군. “
희봉은 전장의 한켠에서 가경의 동작을 보며 마음을 졸이다가도 고강한 이들이 가경을 칭찬하자 가슴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 가오라버니는 몇 달 전과는 또 다른 사람 같아.“
녹구는 참마도를 고쳐 잡으며 비아냥댔다.
” 늙은이 암만해도 너 오늘 여기서 뒈지겠다.“
악리심은 제자들의 죽음을 보며 순간 터진 분노는 사라지고 없다. 이미 무심을 유지하며 싸우기에 녹구의 격장은 소용이 없었다. 무심히 상대를 베려는 순수한 살의만 존재했다. 이미 녹구의 도법은 파훼했기에 수합 만에 우위를 가져온다. 사슴 갖옷도 길게 찢어놓았다.
”무사망 나 좀 도와줘. 이 늙은이 더럽게 세. “
녹구는 체면과 예를 중시하는 무림인이 아니다. 아픈 척도 잘하고 뒤에서 치기도 하고 자기 말을 손바닥 뒤집듯 번복도 잘한다.
”이기는 게 장땡이지.“
거친 강호에 나와 혈혈단신으로 거대 세력을 아우르기까지 안 해본 일이 없는 녹구였다. 관군에 포위된 채 고립되어, 사체를 먹으며 버틴 적도 있었다.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소문이 붙은 계기다. 살기 위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녹구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무사망은 이미 슬금슬금 녹구와 합공하고 있었다. 악리심 제자들은 가경에게 맡겨두어도 될 듯했다.
무사망이 예측한 대로 가경은 추원과 동탁기가 목이 잘려 뒹굴고 있는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승용은 춘부동과 관혁 하일연등과 합공으로 가경 하나를 상대하면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어린놈을 상대로 이게 무슨 꼴이냐.’
승용은 무사망을 상대로는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웠다. 상대가 고명하기에 밑져도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지고 있는 실력보다 더 형편없었다. 상대를 얕잡아본 것이 첫 번째 실수였다. 또 사형제들의 죽음에 평정심을 잃자 격동해서 실수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다 가경은 이미 무의식의 경계에 떨어져서 오직 적의 숨결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다. 악리심이 인위적으로 무심을 유지하며 싸우고 있다면 가경은 무의식 자체였다. 거기다 승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싸울수록 가경의 검법은 자신들의 검법과 닮아있었다. 아니 점점 똑같아졌다.
가경은 처음엔 떨어진 춘부동의 검과 동탁기의 검으로 쌍검을 쓰더니 이젠 두 손으로 각기 다른 검술을 쓴다. 오른쪽은 승용 자신이 방금 선보인 쾌검을 흉내 내더니 왼손으론 무사망이 자신과의 승부에 보여준 배중사영으로 베어온다. 딱 한 번 본 무사망의 좌우 공방식을 완벽하게 무의식에서 꺼내 끄집어내어 각기 다른 문파에 검술을 양쪽 손으로 구현한 것이다.
“아름다워!”
희봉은 검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가경이 피를 뒤집어쓴 채 고요하게 빛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미의 한 형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악리심은 여전히 무심하나 오늘 이 싸움에서 자신의 문파가 전멸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녹구와 무사망은 완벽한 합겁으로 자신에게 우위를 내주지 않았다. 이제는 반격도 간간이 해온다. 젊은것들답게 칼끝이 힘차고 날래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름도 모를 청년 가경이었다. 설성서가 당부해서 감금은 했지만, 관심은 없었다. 무사망에게 말벗이라도 되란 심정에서 붙여놓았다. 악리심의 제자들은 그 젊은 놈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
‘저놈은 먼 도깨비지? 저런 놈이 내 제자여야 했는데···.“
다소 어색하던 젊은 놈의 검법은 어느덧 악리심 자신의 검법도 흡수하며 이젠 악리심의 눈에도 얼핏 파악이 안 되는 검들을 섞어 쓰고 있었다. 그러니 제자들이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저건 또 뭐야?“
방금도 하일연이 가슴에 긴 핏자국을 뿌리며 쓰러져 갔다. 흥분한 춘부동은 가경에 대한 맹렬한 적의를 드러내며 쪼개고 들어갔다. 정수리부터 반으로 가를 듯한 기세였지만 환영처럼 가경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디지?‘
정수리가 화끈해지더니 끈적한 피가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그것이 춘부동이 생애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무···. 무섭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오는구나.‘
승용은 두려움이 움츠러들었다. 이미 악리심도 무사망과 녹구와의 싸움에서 평수다. 자신들은 무명의 청년 하나에 당하고 있는데 상대가 쓰는 검법조차 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검법으로 베어오는가 싶으면 이내 모습을 바꾸어 그어온다.
’저놈에게 당한 건 평생의 수치다!‘
제자들의 연이은 죽음을 본 악리심은 물같이 가라앉았다. 위기일수록 침잠한다. 힘과 빠르기만으론 젊은 녹구와 무사망을 이기긴 힘들었다. 그들보다 앞서는 것은 내력이었다.
악리심을 분신(分身)을 뽑아낸다. 분신을 쪼개 각자 공세를 취하며 무사망과 녹구를 벤다. 무사망은 파랗게 질려 탄식을 내뱉었다.
”금강신(金剛身)!“
금강불괴라고도 알려진 이것은 몸뚱일 단단하게 도검불침으로 단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타고난 육신을 단련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육신에 도검불침은 있을 수 없다. 말랑한 피부를 아무리 단련해봐야 달라질 것은 없다. 피부를 뚫지 못하는 도검이 어디에 있을까. 저잣거리의 싸구려 차력인들의 허황한 말에 불과하다.
자신이 소림 출신이라며 저잣거리에서 약을 팔던 차력인 하나는, 무딘 창을 신체의 특정한 부위에 받쳐 놓고는 창에도 끄떡없는 것으로 금강불괴라고 떠들다가 구경꾼 하나가 창을 바꾸어 아무 데나 찔렀더니 피부가 벌집처럼 뚫렸다는 이야기는 강호에 널리 퍼진 이야기다. 제아무리 고강한 자라고 해도 칼로 베면 잘리고 찌르면 뚫린다.
악리심이 펼친 금강신은 기화신에 이른 자만이 펼칠 수 있다. 악리심의 순정한 기력으로 일종의 기(氣) 덩어리인 분신(分身)을 만들어 동시다발로 이동할 수도 있고 상대를 공격할 수도 있다. 환상 같지만 실제로 상대를 벨 수 있다. 환상이 아닌 엄연한 실체다.
물론 기체(氣體)이니만큼 상대는 검으로 찔러도 허공을 찌른 듯 아무런 손상을 입힐 수 없다. 도검으로도 벨 수 없으니 도검불침이다.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는다고 해서 불가에서는 금강으로 된 몸뚱이라 비유하는 것이다. 밀교 계열의 금강불이 바로 이것이다. 살아서 불생불멸의 부처의 몸뚱이를 갖는 것. 모든 수행 인들의 궁극의 이상. 금강불괴는 이것이 와전된 것이다.
금강신. 기체가 완전히 연성이 되면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끝까지 갔다고 볼 수 있다. 악리심은 그 단계까지는 아니고 일시적으로 분신을 나누어 쓸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 정도의 연성도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취의 정도는 나눌 수 있는 분신의 개수를 보면 된다. 태극 분신은 처음 분신을 나눌 때의 형태로 음양의 속성을 한몸에 가진 단 1개의 분신이고 음양을 두 개로 갈라 쓰며 각각의 분신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 음양 신.
천. 지. 인의 삼재 분신. 그리고 여기에 화신(행위자의 진신 육체를 뜻함)을 더해 사분신. 5개의 분신인 오행 분신.
동서남북 네 방향에 띄우고 하늘 땅 두 개의 방위에 2개의 분신을 더 띄울 수 있으면 육합 분신.
7개의 분신인 북두 분신. 이 북두 분신은 각각 진신 육체 못지않게 강한 힘까지 있어 각각 이름도 있다. 천추, 천선, 천기, 천권, 옥형, 개양, 요광이 그들 분신의 이름이다.
그다음 단계인 팔괘 분신은 수효가 폭발하듯이 늘어나 64괘를 뜻하는 64개의 분신을 띄운다. 역시 분신의 이름이 있어 건, 태, 이, 진, 손, 감, 간, 돈으로 이 팔 분신이 각각의 분신을 낳으니 그 수효가 64개에 이른다.
그리고 궁극의 구궁 분신이 있다. 구궁이란 동서남북에 북서, 북동, 남동, 남서를 합한 9개의 방위를 뜻한다. 궁극의 경지로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전인미답의 경지다. 상대하는 자가 있다면 분신의 장막에 완전히 가리게 된다.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강호인들은 이런 성취가 그저 이야기 속으로만 전하는 허구라고 여겼다. 그러니 무사망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악리심은 지금 두 개의 분신. 음과 양의 2개의 분신을 주로 운용하고 최후의 내력까지 짜내면 천·지.인 삼재 분신까지는 가능하나 기력 소모가 너무 심해 실전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음과 양의 이 분신 역시 수십 년전 후계자 자리를 놓고 관옥과 대결할 때 시전하고는 처음이었다.
그나마 무사망과 녹구는 최고수들답게 음양 분신의 수에 당하지 않았지만, 음과 양의 분신을 각기 상대하는 틈에 악리심의 끌어올린 장세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헉!“
녹구와 무사망은 꼴사납게 처박힌 후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오히려 둘 다 검붉은 선혈을 토해 내고 주저앉고 말았다. 심각한 내상으로 기력이 뒤흔들려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무사망은 가슴팍에 악리심의 장세가 뚜렷하게 새겨진 것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이미 살빛이 흑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녹구 움직이지 말게 내력을 조금이라도 썼다간 그대로 절명이야.“
녹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도 없었다. 피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서 피가 끝없이 울컥울컥 솟구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악리심은 무사망과 녹구를 눌러 제압해놓고서야 살기를 쏟아내며 가경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였다. 하늘에 수많은 꽃 화살이 날아올랐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하늘에 불꽃이 수놓아졌다.
피유웅~
악리심도 그 불꽃들을 봤다. 수십 척의 배가 에워싸고 있었다.
사해의 스산한 바람이 멈추질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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