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수적으로 산다는 것(3)
세상은 광대한 무武의 바다, 내 곁엔 아무도 없다
가경은 의식을 잃고 헛소리까지 하며 깊은 혼곤의 늪을 헤맸다. 나흘 째 되는 날. 가경은 홀연히 깨어났다. 그 후로 장강을 헤매고 다니며 희봉의 흔적을 찾았으나 소용없었다.
“부채주님. 그만 돌아가시죠. 관군들이 올 시간입니다.”
가경은 수적채로 돌아온 후, 희봉을 도와 배를 내주고 탈출을 도운 수적 둘을 끌어냈다. 이들이 희봉과 황견 일행의 탈출을 도운 것이다.
“희봉에게 배를 내준 게 너냐?”
가경은 어느새 수적들에게 하대하고 있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수적들은 희봉이 가경의 연인임을 알고 은근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희봉이 그들에게 건넨 돈도 유혹이었다.
“사랑싸움 그거 오래가겠어? 오히려 희봉 아가씨 말을 무시했다간 나중에 경을 칠라.”
그렇게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그들은 황견 일행을 풀어주고 배의 방향을 잡았다. 마침내 소굴을 벗어나 희봉과 황견 일행을 뭍에 내려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희봉까지 작별을 고하고 떠날 줄은 몰랐다.
”저는 안 돌아가겠어요. 가 오라버니에게 전해주세요. 우리의 맹세는 끝났다고. “
그들은 희봉이 떠나는 것은 정말 큰일이라고 여기고 제지하려했지만 장사령과 무사들의 주먹이 맵다는 것만 확인했다.
”용서하세요. 부채주! “
가경은 두 사내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용서? 내 마음은 이렇게 찢어지는데 용서를 해달라고!”
그들을 찢어 죽이고픈 마음이었다. 가경이 손아귀에 힘을 가하려할 때였다.
"경아 안 된다. 멈춰!"
가경이 보니 무사망이 급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희봉의 청으로 도왔을 뿐이야. 수적의 규칙을 어겼다면, 그에 따른 벌이면 충분해. “
가경은 존경하는 무사망의 제지에도 살심을 거두지 않았다. 푸른 안광은 더욱 짙어졌다. 걸걸한 녹구의 음성이 들려왔다.
“찢어라. 경아. 죄 지은 놈들은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해. 그래야 딴 놈들도 딴 생각을 못한다. 어서 찢어!”
수적들은 공포에 질려 빌기를 멈추지 않았다.
“부채주님 살려주세요. 희봉 아가씨는 저희가 꼭 찾아내겠습니다.”
가경은 손아귀에 틀어 잡힌 수적을 바라본다. 무사망은 한숨을 쉬며 가경 앞에 선다.
“경아, 넌 이미 악성으로 기운 거 같다. 악성이 널 먹어치우지 않도록 희봉을 생각해. 아직도 한 가닥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희봉이가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해. 그래야 다음에 희봉일 만나도 부끄럽지 않을 거야. 어떤 경우에도 선을 택해야 돼. 악을 행하고 싶을 지라도."
가경은 들끓는 살심을 억누르며 희봉을 떠올렸다.
”착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요? 음 내 생각엔요. 자신 안에 추악한 부분이 있다는 걸 알고 고치려는 사람이요. “
”희봉 마음속에도 추악한 것이 있나요? “
”그럼요. 있죠. 나쁜 생각도 많이 하고. 하지만 그게 잘못된 것인걸 알고 고치려 한다면. 저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선하다는 것은 그런 사람을 말해요. “
희봉은 선하고 부드러운 눈웃음이 눈에 잡힐 듯 생생했다. 가경은 희봉과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해내고 찢어 죽이려던 살심을 겨우 누르고 두 사내를 내려놓았다.
”이자들은 무단으로 인질을 빼돌렸으니 가두고 삼 일간 굶겨라. “
수적들은 가경의 명을 따르면서도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채주님은 채주하고 달라. 채주였으면 여럿 죽어 나갔을 텐데. 따듯한 분이셔. ‘
수적들은 수많은 전장을 누빈 오랜 동료들을 그만한 실수로 잃기에는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죽여 버리지 그걸 왜 살려놔! 쓸데없는 인정은...”
녹구는 투덜대면서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무사망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가경의 어깨를 쳐주었다.
"잘했네. 어렵겠지만 노력하게. 악한 생각이 나더라도 참아내게."
가경은 희봉을 잃은 상실감에 바다로 수적질을 나갔다. 처음에는 수적들이 권해도 사양했었던 길이었다. 이제는 한번 나가면 가경은 해가 져 완전한 어둠이 드리워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탄 배에서는 사람을 이유 없이 해치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 강간 절대 용서 못한다. 내 눈 앞에서가 아니라면 나머지는 마음대로 해도 좋아. “
가경이 말은 새로운 법이었다. 수적들은 가경의 명에 따라 반항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이지 않았다. 여자들은 겁탈을 면했다.
”사람 죽이고 강간하는 재미는 없어졌지만 수입이 늘었으니 더 좋지. “
가경이 탄 배는 실적이 좋았기에 불만이 없었다. 가경이 노략질에 참여하면서부턴 싸움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배마다 선주가 세운 사적 호위들은 가경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호위 수십 명을 고용한 배라도 가경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경의 명성이 장강을 떨쳐 오를수록 수적이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은 더 모여들었다. 농사꾼이 땅을 떠나면 화적이 되고 수적이 되던 때였다.
서하의 침공과 7년간의 전쟁으로 나라는 갈수록 피폐해졌다. 문약한 사회 기풍은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누적된 문치 정책으로 군사력이 약해져 외적을 물리칠 군사력이 되지 못했다.
”나라 꼴 잘 돌아간다. “
자존심도 버리고 서하에게 신하의 예를 취한지 오래였다. 시늉뿐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없는 살림에 매년 비단 13만 필과 은 5만 냥, 차 2만근을 보내야했다. 또한 거란에게도 화의를 주선한 대가로 비단과 은을 뺏겨야 했다. 전쟁을 치르다보니 급조된 병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나, 질은 형편없었고, 국방비가 정부 예산의 팔 할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도 황실은 황실대로 낭비를 일삼아 국고를 탕진하였고, 문치주의의 영향으로 관료의 수만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벼슬자리보다 관료의 수가 많아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3년마다 치러진 과거로 꼬박꼬박 치러져 관료의 숫자를 불렸다. 이들의 급료는 모두 백성들의 피로 감당해야했다.
황진후 같은 대상인. 대지주의 증가로 농민들은 땅을 뺏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노비와 빈민들은 늘어나는 악순환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땅을 떠난 사람들은 먹고 살기위해 칼을 들었다.
“굶어 죽으나 칼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야.”
개보 왕안석이 피폐해진 국가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대지주와 대상인의 횡포로부터 농민과 중소 상인들을 보호 육성하겠다고 시행한 각종 개혁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하며 혼란으로 빠져들어 갔다. 제도 자체가 허점도 많고 부정부패, 고리대가 심화되는 등의 부작용을 심화시켜 백성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문제가 터져 나왔다.
”차라리 예전이 나았어. “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농사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어 지주들의 비싼 이자 돈을 얻어 쓰는 일이 없도록 한 정책은 오히려 돈을 얻어 쓰기 위해 뇌물을 더 써야하는 폐단을 불러 가뜩이나 어려운 농민의 목을 조르는 형국이었다. 신법을 지지하던 구양수도 이것 때문에 왕안석과 정치적인 견해를 달리할 정도였으니 신법 시행 전보다 살기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민가 열에 아홉은 수적이나 화적이 있다. “
장강의 수적도 수효가 더 크게 늘었다. 이쯤 되면 나라가 나서서 수적들의 자원을 늘려주고 있는 형편이었다.
”어제까지 같은 땅을 파먹다가 강도로 돌변한다. “
나라의 수탈도 모자라 수적 화적에게도 털리니 백성은 이중고다. 물론 관군도 마냥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아서 가경이 이끄는 수적 떼는 크게 늘어난 관군과 치열하게 다투어야 했다.
“저기 수적 놈들이다~!”
오히려 가경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밤낮없이 싸웠다. 희봉으로 상심한 마음은 차라리 분주한 싸움판을 반겼다.
”덤벼라! “
가경은 새까맣게 달라붙는 관선(官船)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어 포로로 붙들린 수적을 빼오기도 했다.
“부채주님 고맙습니다.”
돌화창에 몸이 불타오를 뻔한 위기도 여러 번이었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가경의 명망은 높아졌다.
“신통귀(神通鬼)”
“신통귀가 녹구 아들이래.”
가경에게는 신통귀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신통귀는 인간의 몸을 빌려 인간을 맘대로 부린다는 귀신이다. 가경의 경공을 본 이들이 사람 같지 않고 귀신이 부리는 몸뚱이 같다고 지은 별명이다. 녹구 아들이란 소문은 풍가(馮家) 일족이란 말이 와전된 것이었다.
“신통귀도 사람을 먹는대.”
“애비랑 똑 같구먼.”
신통귀 가경은 관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갔다. 그날도 관군 둘이 포로로 붙들려왔다 .관군들은 앳되어 보였다.
'나라가 강제로 군에 끌고 간 소년들이리라'
가경은 그들에게 관선의 배치에 관해 몇 가지를 묻고 무기를 빼앗은 채 돌려보냈다. 희봉을 다시 만나기 전에는 살인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였다.
“여자들 데리러 간 놈들은 왜 오지 않아?”
그가 관군에 대한 처리를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여자들을 실은 배 한척을 인도하기로 한 수하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육지에서 긁어모은 여자들은 수적채로 모았다가 적당한 곳으로 팔아넘기기 위한 배였다.
”다 같이 찾아보자. “
가경은 몇 척의 배를 몰아 낙오된 배를 수색했다. 배는 곧 발견되었다. 녹구의 수적들이 배전에 달라붙어 들이치고 있는 중이었다. 고전 중이었다.
가경이 안력을 돋워 보니 배전에는 겁먹은 여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앞전에 여자 둘이 검을 빼들고 수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합공을 이루어 방비와 공격을 하는데 하나부터 끝까지 법식에 어긋남이 없고 나아가고 물러섬이 간결한 것이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계집한테 밀리지 마라!”
수적들은 자존심이 상해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고 있었지만 여자들의 검에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수적들은 말린 등나무를 둥글게 말아 대나무로 고정한 방패를 들었다. 등갑 군이 사용하는 등갑과 같은 재질로, 무두질한 가죽이나 사슬갑옷처럼 베기에는 강하면서도, 재료가 재료인 만큼 가볍다.
다만 불에 약해서 관군이 주로 쓰는 돌화창(突火槍) 공격에 대비, 불이 쉽게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옻칠을 했다. 가운데 툭 튀어 나와 있는 가운데 부분에는 놋쇠를 대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수적 경험이 오래인 자들이 그런 방패를 들었다. 방어력이 높아서 표창이나 화살뿐만 아니라 돌화창도 직격이 아니라면 막아낼 수 있다고 한다.
이 방패만 단독으로 쓰는 것이 아닌 한손 무기와 같이 쓴다. 한 손엔 방패 한 손엔 검이나 요도 또는 곤봉을 들고 사용했다. 일단 뱃전에 올라 싸움이 시작되면 방패를 쥔 왼팔로 상대 병기를 막고 재빨리 방패로 밀고 돌격하면서 검이나 도로 상대를 찔러 죽이곤 했다.
수적들의 진은 앞전에 방패와 칼을 든 수적이 앞에 서고, 그 뒤로 갖가지 무기를 든 수적이 진을 갖춘다. 근접전 무기인 검이나 곤봉 각종 무기를 방패와 섞어 쓰면서 관군의 창이나 큰 칼을 이용한 근접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배에 일단 뛰어 오르면 근접전투에서 수적들이 우위를 점했다. 방패와 짧은 무기들로 무기들의 장단점을 서로 보완하면서 싸우는 게 수적들의 근접 전투 방식이다. 하지만 지금은 수적들이 밀리고 있다.
방패는 찌르는 무기인 창에 특히 강하다. 창이 방패를 뚫지 못하니 방패로 창을 틀어막고 검으로 베는 것이다. 하지만 방패는 타격기인 곤에 약한데 곤으로 강하게 타격하면 방패가 충격을 못 이겨 뒤집혀버리기 때문이다.
”얍! “
곤봉도 아닌데 방패가 떨어졌다. 검을 든 여인은 날래고 힘찼다. 검으로 내려찍기도 하고 그어 오기도 하는데 막으려던 수적의 방패가 충격으로 뒤집혀져 버려 방어가 무력화되었다.
‘자운! ‘
가경은 자운을 한 눈에 알아봤다. 석양 속으로 사라져가던 그녀의 뒷모습은 지금도 생생했다.
사해의 스산한 바람이 멈추질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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