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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모전참가작 밤의 왕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Eol
그림/삽화
@L280_V6ER1
작품등록일 :
2019.04.02 00:09
최근연재일 :
2020.02.1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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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2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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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프롤로그(밤의 왕)

DUMMY

성곽으로 파도의 하얀 날이 솟구치고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바닷물이 스미는 성곽의 모퉁이엔 초록 이끼가 끼어 하나의 얼룩처럼 검은 벽돌을 감쌌다. 바다를 배회하며 휘몰아친 폭풍우는 황혼과 함께 내려와 셰이프의 성읍을 감쌌다. 파도가 타고든 바람 사이로 홀연히 높게 솟아오른 다섯 성에는 각각의 머리가 있었다.


화강암을 몸체로 가진 검은 성들의 꼭대기에는 칼럼교 신들의 머리가 올려져있었고 각각 색과 형태가 달랐다. 눈물을 쏟아낼 낡고 죽은 조각들에겐 표정이 없었지만 그중 유일하게 마지막 성의 신만이 선명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카이건은 마지막 성을 감싸고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에 멈춰 섰다.


그는 창 너머로 보이는 ‘드래곤 갑주, 카시스’에 시선을 묻었다.


카시스는 다른 성곽 부분 중 유난히 높고 견고히 지어진 흉벽으로 하늘을 향해 요동치는 파도를 막아선 그 모습은 신의 재앙조차 막아낼 방패막 같은 위엄을 자아냈다.


그런 웅장함 외에도 그곳은 태초의 왕인 카드라의 뼛가루가 뿌려진 곳으로 유명했는데 뱃사람들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용의 가호가 머문다고 믿었다. 카드라는 그곳에 흩어져 왕국을 지키는 용으로 환생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용은 사람을 지키지 않는다. 단지 왕의 권능이 머물 뿐.’


그에게도 그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던 어린 시절이 있었지만 그는 이제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가 그런 이야기를 믿기에는 나이가 들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어린 시절의 동심을 그리워하는 그로써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처럼 허상을 탐했고 그 빛과 닿는 순간 그는 꿈에서 깼으며 자신의 꿈이 악몽이라는 걸 깨달았었다.


창으로 들쳐온 빗물이 그의 얼굴을 적혀왔으나 그는 이에 개의치 않았고 빗속의 셰이프를 바라보았다. 성곽에 둘러싸인 수도의 도시는 차가운 빗소리와 파도소리에 뒤덮여있었다.


기나긴 폭우로 도시의 장터는 비었으며 겹겹이 싸이던 장사치들의 고함소리는커녕 거리를 거니는 사람의 그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셰이프의 성읍에는 그늘이 졌다. 불안감이 문뜩 그를 덮치지만 그는 자신의 귀를 맴도는 저 소리가 오히려 안정을 얻었다. 그는 다시 깊은 심상에 빠질까 손바닥에 놓인 목걸이를 강하게 쥐며 단정 지었다. 용은 괴물일 뿐이라고, 그것이 아무리 사람의 영혼을 가졌다고 한들.


그가 다시 상념에 잠길 새도 없이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카···카이건님! 고···공주님께서!”

자꾸 부서지는 목소리의 주인은 공주의 전속시녀, 넨이었다. 그녀는 단정하게 시녀복을 입은 채로 그의 앞에 서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카이건은 그녀의 갈색눈동자를 바라보다 물었다.


“버···벌써?”


그녀의 떨림은 전의 되듯 그에게로 이어졌고 구차한 설명 없이도 모든 정황이 그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만삭인 아내를 떠올린 그의 입에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벌써 작은 벤(태명)이...”


그의 얼굴은 일순간 기대와 기쁨으로 박차 오르다가 그 긴박한 박자에 긴장감과 두려움이 타고 들며 울상이 됐고 그러다가 어처구니없게도 감격의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황급히 산모들이 기거하는 꼭대기 층으로 향했고 절경이 보이는 병실 중 가장 가운데 위치한 그녀의 방에서 멀리서도 뒷목이 시릴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소리치길 멈추면 희미한 신음소리가 흘렀고 그 속에서 마치 욕처럼 내뱉어지는 남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겁쟁이 남편은 방문 앞에서 목걸이를 쥔 손만 바들바들 떨다가 하녀가 병실의 문을 열려 하자 손바닥으로 문을 막기까지 했다.


“어쩌면 공주님께서 내게 저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으실 지도···.”


카이건이 그녀의 비명에 몸을 움츠리며 눈동자를 바닥에 떨어뜨린 채 말하자 문 너머로 산모가 고함쳤다.


“카이건! 이 자식 빨리 안 와!”


카이건은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들어왔지만 그마저도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아내가 누워있는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하녀와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인 공주는 그에게 손짓했지만 그는 괜히 딴청을 피웠다.


그녀가 진통에 지쳐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손 안 잡아줄 거야?”


그 말에 그는 뒤늦게 아차 싶어 그녀에게 손을 내밀면서도 몸을 최대한 뒤로 뺏다. 그녀가 그를 향해 몸을 들썩일 때마다 ‘내 머리채를 잡을 거야, 베일벤?’하고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온화했던 공주가 저리 흥분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옷장에서 사람이 나와도 그녀는 침착했건만, 그는 자신의 눈앞의 여성이 그가 사랑했던 베일벤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런 철없는 망상에 빠졌던 그는 끝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약간의 죄책감까지 들었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그의 뺨을 스쳐서야 그는 그녀의 눈물이 고통보다는 두려움에서 기인된 것임을 깨달았고 어느새 그녀처럼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들의 맞잡은 두 손은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그는 한없이 무력해졌다. 그는 울고만 싶었다. 이미 울고 있지만 성 밖의 조각들처럼, 세상의 재앙을 전부 끌어안은 마냥 울고 싶었다.


그는 아내의 앙상한 손목에 자신이 가져온 목걸이를 걸어줬다.


“아이의 이름이에요. 루시아식 이름이고, 목걸이에 맹수를 조각하는 건 저희 종족의 전통이죠.”


금목걸이는 베일벤의 금빛 머리처럼 반짝였고 사슬 줄에 걸린 펜던트의 뒤편에는 루시아식 문구가 적혀있었다.


“드래곤의 만에서 태어난 밤의 왕자, 베이즌 셰이프. 헤르벤(살아있는 생에 관여하는 칼럼의 신)의 영원한 은총이 머물길.”


루시아의 언어를 모르는 벤 공주를 위해 그는 목걸이에 적힌 구절을 읊어 주었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그녀는 그제야 옅게나마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젠 인정한 거야? 네 별명을 그렇게 끔찍이 여기더니. 우리 아들보고 ‘밤의 왕자’라니···.”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래, 제기랄 그놈의 밤의 왕. 난 이제 은퇴할 거야! 아들한테 넘겨버릴 거라고. 밤만큼은 만인의 왕이 아니라···."


그는 조금 쑥스러운지 말을 어눌거리다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젠 너만의 왕이 될 거라고.”


진통이 심해진 베일벤은 그의 말에 그가 안심할 만한 환한 미소로 화답해주진 못했고 그녀의 움츠려진 몸에선 식은땀이 흘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빗물이 들쳐오는 아치형 창에는 창백할 만치 하얀 달이 떠있었고 드물게 쏟아지는 번개는 푸른빛을 띠었다. 하얀 달빛이 그들을 감쌌고 그 아래에서 그가 다짐했다.


“이젠 너와 왕국을 위해 살 거야. 대부분의 괴물을 포획해 가두었고···.”


그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닿지 못했지만 그는 계속 말했다.


“나는 그들을 전부 사형시킬 거니까.”


파란 눈동자를 내리깐 그의 목소리에 이유 모를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의 말에 응답하듯 허공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 괴성 소리에 번개가 비친 그의 파란 눈이 순간 번쩍였다. 놀란 표정으로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이 목걸이를 아이에게 전해 주십시오. 그 녀석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이것이 그를 지켜줄 겁니다. 자신을 잊지 않도록...”


병실의 적막함을 깨고 새로운 발소리가 쿵쾅거렸다.


“카···카이건님.”

병실의 방문자는 왕실의 경비대장, 제논이었다.


커다란 몸집에 올리브 빛 피부를 가진 그는 옆구리에서 세 줄기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그의 상처를 보려 했지만 그는 그 손길들을 거부하곤 카이건 앞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섰다.


그는 근엄히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칼로스 감옥의 괴물들이···.”

흉부의 갑옷을 벗고 팔과 다리에만 보호대를 착용한 그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더 말하기가 힘들었지만, 그것은 결코 괴물의 손톱에 긁힌 상처 때문만이 아니었다.


장수의 말을 끊으며 그가 담담히 말했다.


“안다.”

“그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구나···몹시 가까이에서.”


카이건이 천천히 망토를 털고 일어나자 베일벤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당신이 꼭 갈 필요는 없잖아! 이젠 그런 일 안 할 거라며.....내 곁에 있을 거라며....”

그를 잡으면서도 그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그녀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는 완강히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에게 묵례하곤 제논에게 다가갔다.


“다녀오겠습니다. 공주님.”

“...올 거지? 금방 오는 거지?”


그녀의 외침에 카이건이 뒤돌아보자 베일벤이 그의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그게 내 손잡아주는 거보다 쉬운 거지?”


그녀는 그렇게 물음으로써 그의 생각을 꿰뚫을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그는 대답대신 빙긋 웃어보이곤 걸어갔다.


병실을 나와 제논이 건넨 망토를 두르던 그는 나무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빗소리 같은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는 그녀가 웃어준 순간들 속에서조차 그녀는 울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시선이 어느새 문고리로 향하고 있단 걸 알았지만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


“카사르로 간다.”


그들은 성이 연결된 돌다리를 건넜다. 사람 한명 지나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다리에는 차양이 없었기에 그들은 비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밖은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했다. 제논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놈들을 잡으려 해선 안 돼! 우리의 병력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두 번째 성, 붉은 다스(칼럼의 신)에 도착한 카이건은 무기로 가득한 그곳에서 십자궁 하나를 꺼내 들며 외쳤다.


그는 한 소녀를 덮치려던 털 난 괴물에게 화살을 쏘았다. 대가리에 정통으로 화살을 맞은 괴물은 발악 없이 죽었지만 다른 괴물이 뒤에서 소녀를 덮쳐 얼굴을 삼켰다.


“젠장, 성과 민간인을 보호하는데 모든 병력을 쏟아야 한다고!”


그는 손에 쥔 다른 화살을 부러뜨리며 외쳤다.


“도대체 군사들은 어딜 간 거야? 왕실 주변의 도시조차 지키지 못하다니!”

“비행 가능한 대부분의 고위 괴물들은 도망을 쳤지만 드래곤이 성 주위를 맴돌아, 전부 화포나 활을 쏘며 성곽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요란한 화포소리에 카이건은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군.”


화살들을 한 손에 가득 쥔 그는 두 번째 다리를 건너며 수십의 괴물들을 쏘았고 다양한 부위를 맞은 그것들은 하나같이 즉사했다.


“그들의 화살이면 도시와 마을을 지킬 수 있건만. 드래곤의 갑옷은 그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아.”

“하지만 만약에 용이 성을 공격한다면···.”


지붕 위에 올라가거나 자들과 거리골목으로 몰린 자들이 카이건을 발견하고는 구세주인 마냥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마지막 화살을 쏜 그는 매정히 돌아섰다.


“왕국의 멸망이지.”


중앙의 성에 도착한 그들은 왕좌 앞에 깔린 카펫을 밝으며 왕의 길을 따라 걸어갔다. 왕좌엔 늙은 왕이 앉아있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이건은 베일벤 공주 앞에선 상상도 못할 싸늘한 표정으로 장인을 보았다. 금빛 턱수염을 길게 기른 늙은 왕은 카이건의 무례에도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그를 보며 구원자를 만난 마냥 얼굴이 환해졌다. 제논은 자신이 일평생 충성을 바친 왕의 그런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카시스의 병사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리십시오. 동시에 카시스 주변 백성을 모두 대피시키고, 병사들을 마을과 도시로 재파견하십시오.”


겁먹은 왕의 모습에 카이건은 덧붙였다.


“제가 있는 한 드래곤의 불꽃이 왕좌에 닿는 일은 없을 겁니다.”


평소 그를 못 미더워했던 왕은 그의 말을 수긍해 곧장 퇴각 명령을 내렸다. 황금성의 꼭대기에서 호각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네···카이건!”


카이건이 왕에게 성큼성큼 다가오자 왕은 반갑다는 듯 그의 손을 두손으로 잡았다.


“자네, 해낼 수 있는 게지? 그깟 드래곤쯤이야, 어차피 자네가 다 잡아 가두었던 것들이니.”


왕은 사위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가 그의 말에 벽분한 것인지 그저 날카로운 눈매 때문인지 그의 눈에는 살벌한 살기가 담겨있었다. 그는 그 손을 뿌리치고 의자 위에 걸린 장검으로 손을 뻗었다. 금빛 받침대에 고정돼있던 검을 뽑아 아래로 내리며 날카로운 칼날이 순식간에 왕의 목을 스쳤다. 그의 행동에 놀란 왕은 왕좌에 엉덩방아를 찌었고 왕의 하인들은 이도저도 못한 채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서성대며 언뜻 보기에는 드래곤을 닮은 그 눈동자를 두려움에 차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왕의 노란 눈을 보다가 이내 살벌한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리고 목을 겨눴던 검을 거두며 말했다.


“검을 좀 빌려 가겠습니다.”


왕의 성을 거쳐 푸른 머리가 조각된 네 번째 성을 지나는 내내 카이건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고 제논은 조바심을 내며 그 뒤를 쫓았다.


“자책할 필요 없다.”


수많은 책이 진열된 성의 가운데를 지나며 카이건이 말했다. 그의 말에 제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카이건님께서 수십 년 동안 잡은 괴물들이건만.”


제논은 중압감에 눌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들이 도망친 건 전부 저희 경비대의 불찰입니다.”

“그렇지 않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제논의 상처를 본 그는 자신의 망토를 찢어 피가 흐르는 그의 가슴팍에 묶어주었다.


“너는 퇴각 명령을 듣지 못했거나 도망치지 못한 자들의 대피를 도와라. 그들을 데리고 최대한 멀리 도망가라.”


그런 말을 하는 그의 파란 눈동자엔 얼어붙은 바다처럼 냉혈함이 깃들었다. 동시에 그 맑은 눈동자에 드리우는 어둠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제논은 그의 눈에는 깊은 심해가 있다고 생각했다.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는 제련된 칼날처럼 쉬이 굽혀지지 않으며 그 묘한 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한편으로 제논은 알았다. 그 검이 셰이프를 위한 유일한 검이며 흔들리지 않을 방패라는 사실을. 제논은 경외심이 담긴 눈으로 그를 보았고 본디 그와 앙숙이었던 것을 후회했다. 그를 좀 더 알고, 그에게 충성을 바쳤더라면.


제논은 울었다.

“카이건님의 개인 부대를 부를까요? 아니면 제가 곁에서···.”

“넌 살아라.”


제논은 그 말에 안심한 자신을 보며 그를 겁쟁이라 매도하던 때가 떠올라 창피했다.


“살아서, 왕국을 떠난 결계술사를 끌고 와라. ‘개’같이 빌어서라도 그들을 데려와야 한다. 언제 괴물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제논은 그 말이 그의 유언처럼 들려 가슴이 울컥했다. 강대국들의 편에 서 거드름을 피우며 매년 과한 액수를 청구하던 그 오만한 작자들을 내쫓은 것은 카이건이었다. 그는 마법사로써도 재능이 뛰어났기에 마물사냥꾼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결계석의 공석들을 홀로 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없다면 마물이 자주 출몰하는 셰이프로써는 막대한 재정적 손실에도 불과하고 그들을 불러들여야했다. 물론 그가 셰이프에서 사라진다는 가정 하에.



제논이 대답을 못하자 카이건이 차갑게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고 끝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장군님!”


제논의 말에 카이건은 경악했다.


“나는 장수가 아니다! 전장의 노예도 아니며.”


언뜻 보기에 투박하고 길이가 긴 은제 손잡이가 달린 양손 검, ‘절벽의 뇌’를 치켜든 용사가 말했다. 그의 얼굴이 칼날과 스치며 짙은 파란 눈이 반짝였다.


”나는 사냥꾼이다. 외로운 사냥꾼은 오로지 마물을 위해 살아가지.”

그의 망토에는 카드라를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었다.


검푸른 몸에 바다와 같은 눈동자를 가진 용은 사나워 보였고 주인을 닮아 눈빛이 매서웠다. 다리를 따라 도망치는 병사무리를 헤치며 그는 홀로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갔고 제논도 그의 뒤를 따랐다.


군사들이 기거하는 마지막 성을 지나자 카시스의 성벽이 보였다. 용이 조각된 카시스의 연단에 홀로 올라선 그가 외쳤다.


“카드라! 내가 왔다. 나 카이건이 왔다!”


카시스 주변에 모여 있던 병사무리를 본 제논은 그들을 대피시키려 했지만 성곽 위에 올라앉은 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카이건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경비대원의 복장을 입고 있지 않은 남자 두 명과 여자 두 명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무기를 꺼내들고 있었다.


“카이건님께서 원하시지 않을 겁니다.”


제논의 단호한 말에 병사들은 헛웃음을 쳤다. 그들은 대부분 제국이나 다인(나라이름)의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그들 중 유일하게 셰이프의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선두에 서서 말했다.


“네놈이 뭘 알아. 우린 그와 함께 할 거다.”


카이건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는 타라카 족으로 그의 이름은 자한이었고 카이건의 오랜 부하였다. 그들은 전부 카이건과 함께 괴물을 잡던 마물사냥꾼들이었다.


“네놈의 말이 맞다. 놈은 겁쟁이야. 카이건은 떨고 있어.”


자한의 말에 제논은 뒤를 돌아 그를 보았고 그의 옷깃으로 감싼 상처를 어뤄 만졌다. 카이건의 완강한 태도를 보며 경외감까지 느끼던 제논은 그 건방진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성곽에 홀로 선 그를 보며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해졌다.


성곽을 덮치는 파도가 그의 갑옷을 덮쳐왔고 그의 망토는 바람에 펄럭였다. 카이건은 망토를 고정하는 핀을 뽑았다. 그의 망토가 용처럼 바람을 타고 성의 꼭대기를 넘어 날아갔다.


천공을 향해 검을 치켜든 그의 검은 떨렸다.

그것이 사나운 바람 때문인지 그의 마음 때문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와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카이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건은 그에게 다가온 자한과 다른 부대원들을 보았다.

“드래곤의 약점을 말해줘, 우린 끝까지 널 도울 거니까!”

자한의 걸걸한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든든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는 동료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말했다.

“놈에게 약점은 없다. 놈을 죽일 무기가 있을 뿐.”

“그게 그 검인 거냐?”

자한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놈의 무기는 인간의 살을 태우지만, 나의 방패는 너희에게 닿지 않는다.”


카이건은 검푸른 날개로 가득 찬 하늘을 보았다. 그의 단호하지만 창백한 얼굴 위로 드래곤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도망쳐라! 이게 내 명령이다.”


부름에 응답하듯 드래곤은 화포처럼 빠르게 그를 덮쳤다. 드래곤의 몸은 검은 비늘들에 휘감겨 광택이 났고 매끈한 놈의 몸체는 대장간에서 망치로 두들긴 갑주를 온몸에 걸친 행색이었다. 사실 그 모습은 철로 제련된 무기 그 자체에 가까웠다. 드래곤이 벽재에 뒤덮인 몸을 털며 허공을 향해 포효하자 놈의 심장에서 요동치던 푸른 불줄기가 흩어져 나왔다.


카이건의 검 끝은 드래곤을 향했고 그 괴물을 향해 외쳤다.


“나는 너를 위해 내 심장을 주었다!”


발톱이 달린 놈의 앞 갈퀴가 성곽을 거닐며 그 주위는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카이건의 발치 앞까지 다가온 드래곤은 몸을 둥글게 굴려 그를 포위했다. 드래곤이 그를 정면으로 응시한 채 뜨거운 콧김이 뿜어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증명하고자 했다. 이성과 생명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너희도 우리와 같다고. 그렇게 믿었다···.”


블랙 드래곤의 푸른 눈이 카이건과 마주쳤다. 그것은 위협적으로 혀를 할짝댔다.


“우리는 친구였잖아.”


슬픔에 찬 그의 얼굴을 빗물이 씻어주었다. 눈가에는 눈물대신 빗물이 찼다.

카이건을 닮은 용이 언어를 시작했고 그것은 결코 다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네놈은 우릴 죽이려 했다. 날 죽이려 했다.”


눈을 통한 그들의 대화, 그 마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신의 눈을 가진 주술사들뿐이었다. 머리를 울려오는 그 살벌한 목소리에 그는 머리가 두통이 일었다.


그의 눈에는 용의 감정이 언어로써 전해졌으며 드래곤의 격렬한 분노가 그의 몸에 그대로 전해지며 그는 숨을 쉬기도 버거웠다. 푸른 불이 놈의 심장에서 다시 타오르며 놈의 심장을 둘러싼 비늘사이에서 푸른빛이 새어나왔다.


“뭘 지키고자 하더냐?”

드래곤은 똬리를 틀던 몸을 풀고 점차 카이건에게 다가왔다.

“네 놈 뒤에 숨은 인간 놈들이더냐? 아니면 날 풀어준 어리석은 왕이더냐? 그도 아니면···.”


다음 순간 괴물의 감정을 받아들이던 왼눈에서 푸른 불길이 피어났고 카이건은 고통 속에 소리쳤다.

“그만해!”


드래곤은 그의 고통이 오히려 즐거운 듯 악의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네놈은 나를 이용했다. 우릴 이용해, 새 친구를 얻었다. 그리고 오랜 친구는 버려졌다.”

“어느 누구도 버려지지 않았어. 우린 서로 공격했고! 적이 된 것뿐이야.”


두 눈을 바로 뜬 카이건이 소리쳤다. 불길이 잃었던 그의 눈가 주변이 화상을 입어 검게 변해있었다.


“나는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이제 알겠어. 우리는 같은 마음이야.”


용사는 용의 마음이 깃든 왼눈을 한 손으로 감쌌다.


“나는 살고 싶다. 너만큼이나 간절히.”


다시 푸른 불꽃이 요동치며 눈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불길이 일었지만 카이건은 그 손길이 친구에게 닿길 바랐다.


“이곳을 떠나 인간이 없는 곳으로 가라. 그곳에서 부디 자유를 찾아라.”

카이건은 얌전해진 용을 보며 쇄기를 박았다.

“그게 내 자비다.”


그 말에 잠잠해졌던 용이 다시 동요했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카이건. 넌 분명 그런 마음을 알았다. 네놈의 간사한 혀는 언어와 마음을 분리하지만. 너는 안다. 너를 잃은 나의 마음을 너는 안다, 너는 나의 분노를 안다! 자비? 자비! 나의 분노는 저깟 놈들을 다 죽여도 채워지지 않는다!”


검을 다시 쥔 카이건은 눈을 감았다. 그의 눈가에 고였던 핏물이 빗물과 함께 뺨을 타고 내렸다.


‘저는 당신께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카이건은 하늘에 닿을 목소리로 생각했다.


‘제게 당신이 그들의 마지막을 준 것이 배려인지, 저주인지. 그리고 이젠 그 답을 알겠습니다.’


“이게 나의 자비다!”


드래곤의 입김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흩날렸고 그는 눈을 떠 드래곤의 입을 보았다. 입에 박힌 반짝이는 분화구에서 불줄기가 쏟아질 때까지 그는 두 눈을 감지 않았다.


* * *


“드래곤의 모든 불꽃을 받아낸 남자라.”

카시스에 선 카블은 로아의 말에 드물게 귀를 기울였다. 그는 성벽에 새겨진 드래곤과 그 앞에 홀로 선 남자의 벽화를 빤히 응시했다.


“네, 이곳이 17년 전 그가 드래곤과 싸운 곳이래요.”

로아는 두 눈을 반짝였지만, 카블은 이끼가 낀 성곽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영양가 없는 개소리로군.”

그가 보기엔 카시스의 성곽이 조금 낡았을 뿐 너무도 멀쩡했던 것이다.

“그보단 저기가 유력한데.”

그는 다섯 성 중 카시스와 가장 멀리 떨어진 외각의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때 병원으로 쓰였던 성은 반이 검게 타 폐허가 된 지 오래였다.

본래 하얀색이었던 얼굴 조각은 검은 머리가 되어 양쪽으로 검은 성이 있는 꼴이었다.


“저곳이 병원이었다고?”

카블의 물음에 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언제 저런 건데?”

“글쎄요···.아마 괴물들이 탈옥했을 때 불탔을 거예요.”

“그럼 카이건 그 자식 정말 불쌍한 자식이네. 한 날에 자기도 죽고 자기 가족도 죽다니.”

“그게 무···무슨 소리세요?”


놀란 로아가 붉은 눈을 반짝였다.


“셰이크의 공주가 드래곤이 온 날 아이를 낳았다며. 건물이 저렇게 됐는데 살아남았다고?”

“아닌데. 베이즌 왕자님은 이제 청년인 걸요. 공주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지만 살아있고.”


로아가 의야스러워하자 카블이 단정 지었다.

“그럼 다른 건물이나 아님 아랫층에 있었나 보지, 뭐.”


카블의 말에 깊은 깨달음을 얻은 로아는 곧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근데 사부, 셰이크가 아니라 셰이프거든요!”

로아의 말에 카블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뭐, 나이프?”


여행자들이 바라보던 불탄 성의 조각에는 코가 없고 흉터 같은 그을림이 남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예전의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향해 미소를 보내왔다. 오싹하도록 환한 미소를.....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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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그 악마의 과거(5) 19.12.22 2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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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그 악마의 과거(3) 19.11.23 30 0 13쪽
95 그 악마의 과거(2) 19.08.21 49 0 17쪽
94 그 악마의 과거(1) 19.08.14 49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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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마법사와 주술사(5) 19.08.02 41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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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마법사와 주술사(2) 19.07.23 51 0 7쪽
88 마법사와 주술사(1) 19.07.19 5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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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저놈 죽이고 천국가겠습니다.(1) 19.07.13 83 0 9쪽
85 이방인(4) 19.07.09 54 0 7쪽
84 이방인(3) 19.07.05 50 0 8쪽
83 이방인(2) 19.07.02 47 0 8쪽
82 이방인(1) 19.06.29 60 0 8쪽
81 마녀의 숲(5) 19.06.25 51 0 9쪽
80 마녀의 숲(4) 19.06.23 49 0 11쪽
79 마녀의 숲(3) 19.06.01 62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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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마녀의 숲(1) 19.05.22 70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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