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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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벤
그림/삽화
@L280_V6ER1
작품등록일 :
2019.04.02 00:09
최근연재일 :
2020.05.1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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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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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리고인(1)

DUMMY

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자의로 여닫으며 특정 물질을 받아들이는 주술사들의 문과 마력을 사용할 때 일시적으로 열려 동화상태를 만드는 마법사와 특수종족들의 문. 두 가지 문은 그 용도가 다른 만큼 기원과 가치도 다르지만 어떤 상태의 존재든 문이 열린다는 건 단순한 힘의 개방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또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여는 것.’


그 세계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차원의 것이며 인간의 눈으론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들이 봐온 세계란 단편적인 조각의 일부였고 문의 개방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불규칙적이었으며 한편으론 난해했다. 지로인(고대 자연물을 관리하던 신들로 일부 주술사들의 조상이 된다.)의 흔적과 정체모를 수많은 고대의 령들, 작은 물건들에 담긴 하찮고도 웅장한 기운과 출처 없이 이어지는 기류들. 그의 시야 속에 담기는 시간은 현재가 아닌 반면 과거의 것도 아니었으며 미래의 것도 아닌 그저 일련의 흐름에 불과했다.


처음 문이 열렸을 때 카블은 그 특별한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장담했지만 셀 수 없는 노력과 시도 끝에 그가 얻은 것은 고작 그 세계에 대한 익숙함과 친숙함, 그리고 약간의 깨달음이었다. 그는 그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통제가 아닌 무지에 대한 수용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됐으며 이를 결국은 받아들였었다.


진정한 마법사와 주술사는 오만과는 어울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장대한 자연에서 끌어온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머저리에 불과할 것이었다. 그들이 대자연을 다룰 수 있는 주술사라도 말이다.


카블은 무리하게 마력을 쓰며 문의 개방을 유도하지 않았지만 열차에서의 충격과 동시에 몸에서 저절로 문이 열렸다. 건너편 휴게실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기류에, 카블은 다른 차원의 존재가 그곳에 닥쳤음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카튼, 총구를 가져와.”


카블은 한손을 휘휘 저으며 동료에게 숙소로 가라는 손짓을 했지만 그의 시선은 끊김 없이 휴게실을 향하고 있었다. 당황하던 카튼이 군말 없이 몸을 돌리자 그는 휴게실로 이어지는 문의 손잡이를 쥐고 열었다. 테이블 자리 옆에 위치한 홀의 중앙에는 기괴한 존재가 서있었다.


카블에게 등을 보이고 선 그 괴물은 그보다 약간 작은 덩치에 흐느적거리는 투명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놈의 몸에는 인간의 핏줄처럼 색색의 가는 선들이 들어차 드물게 번쩍이는 빛을 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카블은 그 괴물에게 더 가다가지 못하고 멈춰서있는데 그가 열고 들어온 문이 저절로 닫히더니 문 테두리를 끈적이는 액체가 감싸왔다.


‘리고인.’


카블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는 동시에, 자신의 예측을 확신했다.


불완전한 육체만큼이나 그 기원이 불투명한 리고인은 인간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희귀하고도 성스러운 종족이었다. 일부 마물상들이 마법재료를 핑계로 불법적으로 그들을 노리기도 했지만 제국과 평화협정을 맺은 그 괴물들은 인간들에게 우호적이었으며 때로는 왕에게 조언자의 역할을 해주기까지 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그 괴물들을 어떤 이는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현자라 부르거나, 그 괴물들의 우월함에 인간을 정복할 적이라고 경계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한때 조사하기도 했던 카블의 의견은 약간 달랐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신이었다. 신을 따르며 신이 되고자하는 인간들보다 더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다양한 형태를 하기에 그 본래의 모습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리고인들은 새로운 개체가 태어날 확률이 적은 소수종족인 반면에 몇 백 년의 반영구적인 수명을 누렸다. 그 종족의 수는 적었지만 그렇기에 하나의 공동체일 수 있었으며 서로의 사고와 기억을 공유해 그 이상의 지혜를 가진 개체들인 동시에 그들은 전부 하나였다.


특이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가진 그들, 인간들 속에서 살아온 그가 이해하기에 개체간의 합치를 이루려하는 그들의 풍습이 어처구니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는 대체로 그들을 좋아했고, 그들의 삶을 동경했다. 한때는 제국의 악마가 아니라 리고인으로 태어났으면 어땠을지 상상할 만큼 말이다.


티타임을 즐기던 승객들은 홀로 나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카블의 머리를 울리며 녀석이 명령을 해왔지만 마법을 다룰 줄 아는 그에게 그 정도 세뇌는 통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마법을 사용하는 리고인은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공갈적이었다.


‘리고인과 인간 간의 전쟁은 없었던 걸로 아는데, 저 태도가 모든 리고인의 입장이란 건가. 그들은 공동체적인 종교를 가지고 있으니. 파르마카흐에 대한 전쟁 선포? 아니지, 어차피 그들에게 국적 따위는 상관도 없으니, 인간 전체에 대한 도발이라고 봐야하나?’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분석하던 카블은 머리가 아팠다. 그의 판단은 삽시간에 이뤄졌지만 홀에 잡혀있던 여인이 그를 부르는 바람에 리고인은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움직임이 둔한 리고인은 정제된 철과 같은 회색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 눈은 살아있는 생명의 눈보다는 인공적인 물체에 가깝게 느껴져 좀처럼 감정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지금 댁의 개인범죄를, 인간을 향한 리고인들 전체의 표상이라고 봐야하나?”


카블이 도발적으로 말했다.


<네놈과는 상관없지 않은가, 부르백?>


리고인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머리를 울리며 들려오는 목소리는 격양돼있었다.

“그럼 난 빼주지, 그래?”


휴게실에 있던 여인들은 어느새 카블에게 다가와 그에게 보호를 받고자 그의 품을 파고들었지만 카블은 차갑게 말했다. 카블의 말에 답을 주지 않은 리고인은 몸을 돌려 열차의 승객들을 바라보았다.


<이 열차에서 동포 셋이 죽었다. 분명 인간의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네 놈도 이 기차에 타고 있으니, 악마의 짓일 수도 있지 않은가?>


리고인의 목소리는 맹수가 인간의 목소리를 따라하는 것처럼 굵고 사나웠다.


“이봐, 난 어제 이 기차에 탔어.”


카블은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이었지만 리고인은 더는 그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모든 리고인은 생각을 함께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지. 우린 너희에게 기회를 주겠다. 너희들의 시간을 기준으로 30분을 주지. 그 제한된 시간 안에 죽은 리고인의 시신을 찾고 그들을 살해한 자들을 우리에게 넘겨라. 그렇게 되면 그 개인을 벌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겠다. 하지만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이 열차 전체를 폭파시키고 그 일은 리고인과 인간 간의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웅성거리는 군중사이에서 한 귀족 남성이 외쳤다. 정장차림의 그를 보니, 그는 파르마카흐인의 사람이라기 보단 제국이나 안단카이의 귀족쯤으로 보였다.


“야만종족 주제, 인간 앞에 그런 협박을 늘어놔!”


그의 돌발행동에 카블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 한마디에 무릎이나 꿇고 앉았던 주제, 귀족의 오만함이란....’


리고인이 불완전한 손을 움직여 손가락 끝으로 백작의 목을 가리키자 그는 숨통이 막히는지 목을 감싸고 컥컥 거렸다.


<하찮은 네놈들의 목숨으로 동포를 대신할 순 없겠지만, 이 자리에서 세 개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사람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고 놈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몸을 숙이기까지 했다.


“그건 네 개인의 생각이겠지. 리고인은 그런 잔인한 짓은 안 해. 아무래도 넌 이제 성인식을 치른 개체 같은데.”


카블만 벌떡 일어서 말하자 리고인은 흥미롭다는 듯 눈매를 활처럼 휘었다.


<네놈은 리고인에 대해 잘 안다는 듯이 지껄이는 구나.>


침입자는 백작을 가리키던 손끝이 카블을 향했고, 그의 시선으로 기괴한 액체들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의 얼굴을 완전히 뒤덮었다. 카블이 뭐라 항언하려하자 그의 입으로 차가운 액체들이 쏟아졌다. 숨이 막히기도 전에 모든 기억이 뒤틀린 듯한 고통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신이 혼미해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와중에도 그는 온힘을 다해 파괴마법을 걸었다. 그의 얼굴을 둘러싸던 둥근 액체가 터져 그의 셔츠를 적혔다.


<제국의 개여, 네 놈에게 우리는 '변수'였구나. 그래서 언제나 우릴 감시해왔군.>


“더러운 새끼, 마음대로 남의 기억을 뒤져?”


카블이 이를 드러내며 놈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실타래를 품고 푸른 액체에 둘러싸인 현재 리고인의 육신은 물리적인 타격을 입진 않았지만 마법에는 약했다. 물론, 카블이 그를 해치기전 육신을 변형시키는 것도 가능했지만 리고인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지금의 몸체는 마력친화력이 깊어 고급마법을 걸기에도 최적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리고인은 태도를 약간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카를레 보이셰롭 르노 라이클 하이노라 부르크만 백트라.>


‘XX 새끼. 내 애인도 못 외우는 걸.’


놈이 자신의 풀네임을 읊자 카블은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 와중에도 그의 허벅지를 붙들고 있던 붉은 머리의 여인이 손아귀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본명이 카를레였어요?”


카블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 따위로 부르지 마, 난 카블이라고.”


<그럼 카블, 네게 기회를 주마. 네 놈이 내 동족을 찾아내지 않겠느냐?>


그의 강압적인 어투에 카블은 기가 막혔다.


“그게 왜 기회지?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리고인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지껄였다.

<아마 또 다른 눈을 가진 너라면, 그들의 시신을 쉽게 찾을 수 있겠지.>


“이봐, 댁들이 인간이랑 전쟁을 하든, 악마랑 하든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니까. 네들 마음대로 하라고!”


<네가 그 시신을 찾고, 종족간의 전쟁을 막으면 넌 인간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을 것이다.>


“그딴 거 관심 없다고 했지?”


카블이 살벌하게 말하자 리고인이 그를 보며 고개를 약간 돌렸다.


<최근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구나, 너.>


“너 이 새끼가!”


카블이 흥분해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 괴물을 공격할 생각이었다면 마법을 썼어야했지만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성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그의 손이 괴물에게 닿기도 전 흐느적거리는 손이 그의 팔목을 감싸더니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게 정말 네가 가장 소중히 했던 것이었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자네의 죄책감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그가 죽고 네가 정말 슬펐나? 그저 지키지 못했다는 강박에 스스로 미쳐가는 건 아닌가?>


물기 없이 마른 그의 눈이 빨갛게 충혈 됐다.


“닥쳐.”


<너희 형제는 합치를 이루지 못했다. 그 아이가 있던 와중에도 너는 외로움에 여인들 품이나 파고들었고, 외로웠던 건 그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구나.>


“기억 좀 들여다본 걸로, 멋대로 지껄이지 마.”


카블은 사납게 이를 갈았고 놈에게 붙들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신들이 폭주하기 전에 찾아낸다면 우리도 대가를 주지. 네게 과거를 돌려볼 시계를 주겠다. 물론 과거를 바꿀 순 없지만 그 아이의 마지막을 볼 순 있을 거다.>


“라반은 죽지 않았어.”

카블은 여전히 리고인을 사납게 노려봤다.


<그래, 그렇다면 그가 실종되던 날의 시간을 말이다.>


괴물의 몸속의 실타래가 그의 팔목을 쥔 손을 따라 나와 그의 팔목을 잠시 감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카블은 놀란 눈만 끔뻑였다. 그의 팔목에 둥근 시계하나가 그려지면서 괴물은 그의 손을 놔줬다.


“이걸로 과거를 볼 수 있다고?”

카블이 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시곗바늘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계약의 시계다. 그 시곗바늘이 한 바퀴를 돌기 전에 네가 계약을 이행하면 멈추고 만약 네가 실패해 그 바늘을 멈추지 못하면 시공간이 뒤틀리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카블은 미간을 찌푸리다 물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내 팔목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는 거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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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그 악마의 과거(9) 20.02.19 54 0 17쪽
101 그 악마의 과거(8) 20.02.05 50 0 16쪽
100 그 악마의 과거(7) 20.01.20 61 0 13쪽
99 그 악마의 과거(6) 20.01.04 54 0 13쪽
98 그 악마의 과거(5) 19.12.22 60 0 12쪽
97 그 악마의 과거(4) 19.12.01 69 0 12쪽
96 그 악마의 과거(3) 19.11.23 62 0 13쪽
95 그 악마의 과거(2) 19.08.21 72 0 17쪽
94 그 악마의 과거(1) 19.08.14 73 0 16쪽
93 마법사와 주술사(6) 19.08.05 112 0 10쪽
92 마법사와 주술사(5) 19.08.02 61 0 8쪽
91 마법사와 주술사(4) 19.07.30 66 0 7쪽
90 마법사와 주술사(3) 19.07.26 78 0 10쪽
89 마법사와 주술사(2) 19.07.23 73 0 7쪽
88 마법사와 주술사(1) 19.07.19 96 0 10쪽
87 저놈 죽이고 천국가겠습니다.(2) 19.07.16 137 0 11쪽
86 저놈 죽이고 천국가겠습니다.(1) 19.07.13 127 0 9쪽
85 이방인(4) 19.07.09 86 0 7쪽
84 이방인(3) 19.07.05 86 0 8쪽
83 이방인(2) 19.07.02 65 0 8쪽
82 이방인(1) 19.06.29 84 0 8쪽
81 마녀의 숲(5) 19.06.25 81 0 9쪽
80 마녀의 숲(4) 19.06.23 67 0 11쪽
79 마녀의 숲(3) 19.06.01 77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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