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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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남녘
작품등록일 :
2019.04.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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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7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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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5-13. 베일의 이야기 (13)

.




DUMMY

한편, 가드는 마을을 돌며 닥치는 대로 질문을 하고 다녔다.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위협에 가까웠다. 커다란 덩치와 무표정한 얼굴. 붉은 문신을 보고 눈물짓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런 그의 질문은 한결같았다.


“코쿤! 알아?”


그래도 질문을 가장한 위협을 받은 자 중 몇몇은 착하게도 최선을 다해 대답해 주었다. 대부분이 비슷한 대답이었지만, 가드는 대답해주는 자들에게 잊지 않고 꼬박꼬박 감사함을 표했다. 그가 슬슬 지쳐가는 몸을 적당한 벤치에 맡겼다. 깔끔하게 밀려있는 두피를 손바닥으로 비비며 잠시 지금껏 들었던 대답들을 되새김해 봤다. 대부분이 비슷한 전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 속에서, 계속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똑같은 느낌으로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결같이 코쿤의 전설에서 언급하는 뱀. 그 뱀이 문제였다. 전설이라면 없어야 할 그 존재가, 어쩌면 자신이 본래 찾아야 하는 뱀일지도 모를 느낌을 그들과의 대화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원초적 뱀의 특징과 힘, 모습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들이 설명해주었다. 가드는 자신이 직접 보았던 그 존재와 마을에 있는 그들의 묘사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전설과 코쿤의 일지. 그리고 마을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서로 완전히 들어맞지 않고 조금씩 틈새가 존재했다. 외형에 대한 묘사는 동일했으나, 시간과 장소, 공간 등. 구체적인 내용들과 마지막 ‘샛별’을 찾아내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게 중요했다.

가드는 그 틈새가 무엇인지 도저히 잡히질 않아 두피를 벅벅 긁어댔다. 스스로 머리 쓰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결국, 아까부터 눈에 어른거린 신비로운 머리카락 색의 소년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본 후에 숙소로 돌아가자는 결론을 세웠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움직여 흔한 과일 가게 앞에서 과일 따위를 구매하고 있는 잿빛의 신기한 머리를 한 소년에게 다가갔다. 허리춤에 찬 검과 랜턴에서 그가 평범한 자가 아님이 느껴졌다. 그건 안개길잡이끼리 알아볼 수 있는 묘한 기류였다.


“코쿤! 알아?”


소년은 우렁찬 가드의 질문에 망토를 펄럭이며 뒤돌아봤다. 잿빛의 머리카락이 그 반동으로 어지럽게 흔들렸다. 처음엔 당황해하던 소년은 이내 감정을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억지스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네? 알죠.”


* * * *


“나는 샛별과 함께 다시 나타날 것이다.”


칸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낮게 읊으며 책 표지를 덮었다. 아무리 따스한 빛이 눈을 보호하고 있다 할지라도, 생전 이토록 집중해서 책을 읽은 적은 없었다. 그 반동 때문인지, 피로해진 양 눈을 검지 손가락으로 비비며 책 내용을 차근차근 머릿속에 정리해 보는 그였다.

마치 한 사람이 쓴 한 권의 책만이 존재하는 듯, 여관에서 보았던 전설과 똑같은 내용만이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특이함이었다. 그것도 단 한자도 빠짐없이 똑같았다. 분명 책은 필기체인데, 글씨체까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칸은 혹시나 해서 몸을 일으켜 책장을 둘러 봤지만, 아쉽게도 그것을 비교해 볼만 한 다른 책은 없었다.

칸은 다시 세 걸음 물러나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설에 지쳐, 떨어진 두 눈은 할 일 없이 굴러다니다가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놓인『종족의 선물』에 고정됐다. 그 순간 지루하고 똑같은 코쿤의 전설 따위는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칸의 마음은 새롭게 이 책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올랐다.


“지겨운 데 이 책이나 읽을까?”


그는 마치 이 책을 읽는 시간을 스스로 합리화라도 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우선 책의 겉면에 쓰인 저자의 문구를 쓸어내리며 표지 끝을 손가락으로 옮겨갔다.


《한 번 싹을 튼 궁금증은 반드시 꽃을 피우거나 죽거나 그와 비슷한 어떠한 결과를 봐야만 잠재울 수 있다.》


칸은 그 명언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하며, 책의 첫 페이지를 과감히 열어젖혔다. 책은 수많은 종족을 항목별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하나의 종족 백과사전이었다.

첫 페이지는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선물에 대한 짧은 설명이 적혀있었다. 선물이란, 각각의 종족이 신에게서 태초로 창조됐을 때 받은 특별한 능력을 뜻했다. 종족의 고유한 값과도 같았고 그들을 분간하는 특징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자연을 섬기는 숲의 수호자는 말 그대로 자연과의 유대를, 아까 본 사마귀는 꺾이지 않는 신념을, 버려진 자식인 카니발을 각종 균에 대한 면역을, 그들을 막아낸다는 기사는 빛이 둘러진 몸을 각각 선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종족들에 대한 설명과 선물에 대한 매치가 저자의 경험담과 섞여 흥미롭게 종이 위를 돌아다녔다.

책은 반 페이지가 넘게 넘어갔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나가던 칸의 눈은 새롭게 펼쳐진 종족의 장 앞에서 멈춰 섰다. 빠르게 읽어 내려갔었던 그의 움직임이 유독 그 종족 설명 앞에서 멈춰 선 것은, 그 종족에 대한 삽화가 몹시도 아까 본 사서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엘펀······? 엘, 엘펜?”


칸은 열심히 혀를 굴리며 발음해 봤지만, 그 이름은 입에 잘 붙지 않고 나뒹굴었다. 마치 처음 보는 언어와도 같은 그 명칭이 신기하고도 기괴해서, 그 종족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천천히 음미해 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수명이 길다. 최소 몇 백 년부터 많게는 천 년까지 사는 자들도 존재한다. 내가 본 그들의 모습은 우선적으로 귀는 크고, 코는 길며 상아라고 불리는 팔뚝만 한 어금니를 지니고 있다. 몸 자체에서 타고난 힘도 세지만, 이 어금니가 가진 파괴력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를 돕자면 내가 그들과 한 번 겨루기를 한 적이 있는데, 난 그 순간 내 검이 그렇게 쉽게 부러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보통 선대부터 내려오는 상아를 몸속에 간직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선대의 지식과 영광을 물려받아 더 강한 종족으로 성장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특히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서 상대방과 쉽게 감정을 공유할 수 있고, 신의 선물로 그 기억력을 활용할 수 있는 탐색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들은 주먹다짐보다는 지식과 기억력을 겨루길 좋아했다.》


칸은 페이지를 넘겼다. 책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리를 내며 더욱 책 속으로 그를 유혹해갔다. 그가 넘긴 다음 페이지에는 오드인에 대해 풀어놓고 있었다.


《오드인, 가장 호기심이 왕성하기에 가장 강한 종족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신에게 받은 선물은 개성이다. 오드인은 유일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자들이며, 유일하게 그 어떠한 존재도 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타 종족들과는 확연히 다른 독특함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예기치 못한 일들을 야기하곤 한다. 》


칸은 그쯤에서 자신이 이 책을 읽게 된 이유에 대해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극한의 호기심과 흥미로움에 사로잡혀 자신의 의지대로 책을 펼쳐 본 행동이, 이 책의 설명과 똑같다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의 의지로 황성을 나오고 스스로의 의지로 계획을 수립한 오드인, 칸. 그리고,


“항상 예기치 못한 일들을 야기하곤 한다.”


칸은 마지막 구절을 다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는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사서의 말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긴장감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이기에, 오드인이기에 사서가 자신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알아내도록 시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아도취에 가까운 긴장감. 그것은 점점 그의 마음속에서 확신이 돼 가고 있었다. 이젠 거의 사명감에 가까운 마음으로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책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리는 이제 탐욕스럽게 유혹하는 세이렌의 소리처럼 들려왔다.


《내가 안개길잡이를 오드인과 같은 종족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그들은 오드인이라고 볼 수 없어서가 아닌 그들은 또 하나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개의 주인이며 동시에 피해자이다. 또한, 비밀을 파헤치는 탐정이며 방황하는 도둑이기도 하다.

그들은 원래 신의 사자였으며, 신의 전달자였다. 그들은 신들과 교류가 가능했다. 그에 따른 그들의 선물은 대물림. 세대를 거듭할수록 기억과 몸에 담은 습관이 그대로 대물림 돼 세대를 거듭할수록 능력이 향상되는 종족. 그들은 과거의 실수를 되돌아보고 스스로 적임자를 찾아 그것을 원하는 종족에게 대물림 한다. 대물림 받은 종족들은 자신들의 선물을 모두 신에게 반납하고 새로이 그 대물림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하지만 어떠한 안개길잡이가 오드인에게 대물림을 하는 바람에 그들의 운명은 삽시간에 뒤바뀐 게 된다. - 생략

안개길잡이들 자체의 몸 구조는 수십 년의 운동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임으로 그 근력과 정신력은 거의 최고수준이라 할 수 있다. 너무 뛰어나고 어떻게 보면 영원히 살아가는 그들은 뛰어난 수집가이며, 지식의 탐욕자이다. 무엇을 선택할지, 무엇을 알아내는지에 따라 그 한 세대가 온전하게 또는 완전히 대 격변을 겪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굴러가는 수레바퀴의 주인이며, 수레바퀴 그 자체이다. 》


책은 생략과 함께 끝 문장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칸은 신비로운 설명들에 의해 정신이 어지러워 사명감 따위는 잊은 채 푹 빠져 읽고 있었다. 칸은 이제 마지막 페이지를 아쉬운 마음으로 맞이해야 했다. 생전 책과는 담을 쌓은 그였지만, 그 책만은 무엇인가 달랐다. 마치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기분이었다. 책은 그런 칸에게 근엄한 교육자처럼 마지막 말을 묵직하게 던졌다.


《이 글을 마치며. 모든 비밀을 풀어내는 것이 우리의 숙명임을 깨닫기 바란다. 검은 하늘이, 그곳에 촘촘히 박혀 있었을 불빛이, 찬란한 밝음이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들이다. 생략된 내용을 궁금해하고, 호기심을 가져라. 그리고 개성을 발휘하라. 한 안개길잡이가 오드인에게 대물림을 한 것은 절대 실수가 아님을 나는 안다. 안개길잡이라는 명칭이 안갯속을 돌아다닐 수 있어서 붙은 명칭인가에 대해 그들은 스스로 물어보길 바란다.

- 코쿤》


마지막 ‘코쿤’이라는 이름을 입으로 뱉었을 때, 칸은 순간 스승님에게 회초리 맞았을 때의 그 쩌릿함을 느꼈다. 한동안 충격 때문에 컴컴한 어둠 속에 갇혀 눈도 껌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어둠 속에서 떠오른 또 하나의 생각에 손을 움직였다.

떨리는 손은 조심스럽게 《코쿤의 전설》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책에 맨 앞과 맨 뒤페이지를 열어 저자를 살폈다. 방금 자신이 본 것과 같은.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다는 듯 거기에 있었다.


‘작가 – 페푸’


칸은 뱀이 사냥감을 낚아채듯 일어났다. 그리곤 곧장 두 권의 책을 들고 달려갔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는 달려야 했다. 계속해서 느껴온 자아도취에 가까운 사명감이 전혀 뜬구름 잡는 것이 아니었다. 발걸음은 빠르게 사서에게로 향했다.

점점 가까워져 가는 거구의 사서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생전 본적 없는 긴 흑발을 늘어뜨린 소녀를 상대하고 있었다. 칸이 그녀의 뒤에 멈춰서 밀려오는 숨을 몰아쉬었다. 사서와 얘기를 나누던 소녀는 난데없이 들려오는 헐떡임에 불쾌한지 얼굴을 구기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더니 그가 꽤 급해 보이는 것을 알아챈 듯, 서둘러 사서와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떠나갔다.

칸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소녀의 아름다운 흑발과 오른손에 장착된 유독 큰 철갑옷에 정신이 홀려 살짝 아쉬움을 표했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을 신경 쓰며 사서 가까이 달라붙었다.


“저희 도서관에서는 뛰면 안 됩니다. 여행자여.”


사서는 점잖게 웃으며 칸을 타일렀다.

칸은 그저 말없이 두 권의 책을 책상 위에 들이밀었다. 그것을 본 사서의 커다란 눈이 좀 더 커지며 기대를 품은 미소를 지었다.


“오······! 찾으셨군요. 하지만 저희 규칙상 대여는 불가능하고 했는데요?”

“그게 아닙니다. 책을 읽다가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호오? 어떤 거지요?”

“이 책을 쓴 작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칸이 『코쿤의 전설』을 들어 사서에게 들이밀었다. 사서가 거의 붙어있다 싶은 손으로 안경을 고쳐 잡고 책을 들여다봤다. 그는 무엇엔가 놀란 것인지 아니면 놀란 척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행위를 선사했다.

코를 하늘 높이 치켜 올리며 바람 소리를 낸 것이다.

도서관 안으로 그의 코에서 나는 기가 막힌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서관에 있던 자들이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처음엔 놀람을 품은 눈이 곧 자신의 시간을 방해받아 불쾌한 눈초리로 바뀌었다. 사서는 그런 그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코를 다시 원상태로 돌리며 박수까지 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여전히 그런 행동을 보이자, 이내 그냥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빼앗긴 시간만큼을 다시 채워놓기 위해 책에 더욱 집중했다.

사서는 몸을 낮춰 칸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에게 보여준 책에서 정답을 알아냈군요. 당신은 뛰어난 여행자가 될 것입니다.”


그가 다시 몸을 뒤로 빼고 빙그레 웃으며 얘기를 지속해나갔다.


“저희 종족은······. 흠. 뭐, 엘풴은 말이지요, 안개길잡이들의 단짝이에요. 기억이 계속되길 바라는 우리와 되 물림을 가진 지식의 탐욕자들과 좋은 상성을 가졌으니까요. 서로가 얻고자 했던 것들이 같은······, 아······. 그래, 그런 느낌이죠. 그때가 그립군요·········.”


자신을 엘풴이라고 소개하는 사서는 커다란 눈 주위를 촉촉하게 적셔가며 말했다.


“하지만 정작 저희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된 것은 오드인들이었죠. 이것이 보이나요? 책에서 뭐라고 설명이 돼 있던가요?”


엘풴이 자신의 길쭉한 어금니를 어루만져보였다.


“상아, 어금니. 엘풴의 무기요.”

“맞아요. 길고 클수록 그 위력과 의미가 강해지죠. 근데, 그게 아주 이상하게 오드인들도 마찬가지더군요. 오드인들이 받은 선물은 모든 종족과 상성이 좋지만, 그렇기에 또 최악일 수 있습니다. ‘개성’이 열려있다는 것은, 그 단어만으로도 매우 위험하답니다.”


그가 두려운 듯 눈동자를 격하게 떨었다. 그 흔들림에 그가 겪었던 어떠한 큰 기억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엘풴은 가만히 커다란 눈동자 속에서 작은 눈물 알갱이들을 떨궜다. 그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처음엔 보호 차원으로 안개길잡이들이 저희를 데리고 다녔지요. 하지만 안개길잡이들 사정도 나빠졌기에······. 우리 종족은 끝났어요. 제 기억으론 말이에요. 오드인의 학살 때문이죠.”


그의 말에 칸은 어떠한 사건이 떠올라 헛구역질이 나올 뻔하였다. 그 기억은 사서의 커다란 눈동자에 스쳐 지나간 기억과 똑같았다.

대대적으로 이뤄줬던 수집 작전. 마술사들이 드디어 안갯속을 바라볼 수 있는 특수한 장치를 고안해 냈던 초기, 그 실용성을 시험하기 위해 뛰어난 자들을 엄선하여 다양한 물품을 수집해 오도록 시켰었다. 그 수집은 장치의 수명과 실용성을 실험하기에 좋은 방법이었다. 성안의 모든 이들이 열렬히 환영했다. 그 실험으로 수많은 오드인들이 이제 안개 밖으로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의 활시위를 당기게 했으니까.

마술사는 처음 수집 목록을 나열했을 때, 사람들은 그저 괴물들을 사냥하거나 자연의 요소를 채집해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안개 밖으로 나간 적 없던 자들의 눈에는, 그들은 그저 한낱 짐승 따위와 같기에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칸만은 그 비밀을 알았다. 장차 있을 제국 확장을 위한 종족 학살의 하나였다는 것을.

칸은 괴로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방관했던 자신을 탓하는 것조차 죄스러워서였다.


“이러한 사실을 왜 저에게 알려주는 것입니까?”


칸은 고개를 떨궜다. 목소리는 침울함을 가득 담아 땅을 향해 떨어졌다.


“당신이 코쿤을 찾았기에············.”

“그게 무슨 상관이죠?”

“코쿤이 저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을 찾는 자를 도와주라고 쓰여 있더군요. 그자가 이 세상을 바꿀 유일한 존재일지 모른다고.”

“저는 같은 오드인이잖아요.”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자의 말은 언제나 옳았으니까요.”


칸은 엘풴을 올려다보았다. 둘 사이에는 짙은 침묵이 깔렸다. 둘은 잠시 거기에 몸을 맡겼다. 서로의 말에 대한 의미를 그 침묵을 통해 알아가며 둘은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칸은 이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적절히 침묵이라는 흐름에서 내려 입을 열었다.


“당신이 페푸로군요. 안개길잡이였던 코쿤을 당신은 아는 거죠?”


칸의 말에 사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에 맺혀있는 이슬들을 닦아냈다.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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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15-2. 절망 19.12.22 36 1 18쪽
193 15-1. 대결 19.12.19 37 1 16쪽
192 14-11. 신 19.12.17 35 1 17쪽
191 14-10. 승천 19.12.16 29 1 15쪽
190 14-9. 대면 19.12.15 29 2 13쪽
189 14-8. 마지막 순례 19.12.12 31 1 14쪽
188 14-7. 알현 19.12.11 29 1 15쪽
187 14-6. 격돌(2) 19.12.10 31 1 15쪽
186 14-5. 격돌 19.12.09 32 1 16쪽
185 14-4. 황성으로 19.12.08 33 1 15쪽
184 14-3. 이단 19.12.05 34 1 17쪽
183 14-2. 기억 19.12.04 33 1 13쪽
182 14-1. 종전 19.12.03 32 1 15쪽
181 13-11. 대전쟁 19.12.02 60 1 14쪽
180 13-10. 대전쟁 19.11.30 33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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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13-8. 대전쟁 19.11.28 35 1 15쪽
177 13-7. 대전쟁 19.11.27 30 1 13쪽
176 13-6. 대전쟁 19.11.26 37 1 14쪽
175 13-5. 대전쟁 19.11.25 50 1 14쪽
174 13-4. 대전쟁 19.11.23 59 1 12쪽
173 13-3. 대전쟁 19.11.22 42 1 10쪽
172 13-2. 대전쟁 19.11.21 44 1 13쪽
171 13-1. 대전쟁 19.11.20 42 1 17쪽
170 12-13. 집결 19.11.19 64 1 25쪽
169 12-12.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19.11.18 76 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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