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행성포식자의 삶(1)

모든 것이 무(無)로 이루어진 공허.
그 속에서 영원의 족쇄로 자신의 영혼을 얽맨 영웅은 눈을 떴다. 눈을 뜬 그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그가 꿈속에서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왔던 목소리였다.
“일주일도 채 못 버티다니, 어지간히도 내 이야기가 듣고 싶었나 봐?”
그제야 완전히 정신을 차린 영웅은 자신이 겪은 일이 결코 하찮은 꿈 따위가 아님을 상기할 수 있었다.
“······닥쳐라.”
“기껏 기회를 준 사람한테 너무 한걸.”
맞는 말이다.
영웅에게는 그저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빌어먹을.”
영웅은 자신의 어설픔을 자책했다. 과거로 돌아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건만, 막상 그때가 되니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부딪히느라 그럴듯한 발버둥 한 번도 쳐보지 못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 처음에는 다 그런 법 아니겠어?”
“······‘처음’이라고?”
영웅은 그제야 자신이 무엇인가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나는 분명히 죽었을 텐데. 어째서 내가 다시 이곳에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원포식자의 말대로 그가 정말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지금 그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됐다. 아카식 레코드에 의해서 바뀐 그의 ‘역사’는 하늘의 배척자 게르만에게 목이 따이는 것으로 끝나버렸을 테니까.
그리고 들려온 차원포식자의 말에 영웅은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했잖아? 콘솔게임식 세이브 앤 로드라고. 너, 세이브 안 했잖아?”
“······뭐?”
“뭐, 어차피 죽고 난 이후에는 세이브도 불가능할 테지만 말이야.”
혹시 차원포식자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의심까지 품었던 영웅으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실이었다.
“너무 놀랄 것 없어. 내가 이미 말했잖아? ‘역사’를 바꾼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예를 들어서 설사 네가 ‘영웅의 좌’에 오르지 않는다고 한들, 나를 토벌하기 위해서 모집된 영웅의 숫자가 줄어들었을까?”
영웅은 짧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아니겠지.”
아마 그 자리에는 그가 아닌 다른 영웅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다.
백만 명의 영웅.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숫자는 상징성보다는 실제로 눈앞에 있는 ‘차원포식자’를 처치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숫자였을 터였다.
“바로 그거야. 원인과 결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를 무시하는 ‘역사’는 존재할 수 없어.”
영웅은 차원포식자의 말에 한편으로는 납득하면서도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지나칠 정도로 나에게 형편이 좋군.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것이 무엇이지?”
이 말대로라면, 영웅은 몇 번, 아니 몇백 번을 실패하더라도 그때마다 차원포식자의 ‘이야기’만 들어주면 얼마든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영웅은 그 일방적일 정도로 자신에게 유리한 이 이야기가 영 미심쩍었다.
“글쎄? 어쩌면 그저 네가 발버둥 치는 걸 보고 싶은 걸 수도.”
“······쓰레기 같은 놈.”
“고마워. 그런데 말했다시피 업계에서는 포상이거든.”
차원포식자가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사뭇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잊은 모양이지? 네가 해내야만 나 역시도 이곳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걸. 머리가 얼마나 나쁘길래 이 중요한 사실을 벌써 까먹는 거야?”
차원포식자가 조롱했으나 영웅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적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 지긋지긋한 이야기를 할 시간에 나에게 기회를 더 주었겠지.”
차원포식자가 웃었다.
“그러면 재미없으니까. 그리고 무언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내 이야기에 풍미를 더하기 위해서 너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지 너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내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야. 그 점을 착각하면 곤란해.”
영웅은 차원포식자의 말에서 정체 모를 모순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함부로 그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뿌옇게나마 보이고 있는 마지막 희망이 마치 물거품처럼 흩어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착각했군.”
“이제라도 알면 됐어.”
어딘가 속이 빈 대화였다. 그러나 영웅도, 차원포식자도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자, 어쨌거나 그러면 내 차례지?”
기다렸다는 듯이 차원포식자가 말하자 영웅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주지.”
“답지 않게 꽤 적극적인걸? 말하는 사람 부담되게 시리.”
“싫으면 말던가.”
“어쭈구리, 제법 자신만만한데?”
“싫다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되겠지?”
“야, 야! 알았어. 알았어. 안 어울리게 밀당이나 하고 말이야.”
차원포식자가 투덜거렸으나 영웅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비록 과거의 그는 하루 벌어먹기도 힘든 삶을 사는 최하층민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수많은 ‘격’을 쌓아온 영웅이었다. 어쭙잖은 협잡질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
“하겠다는 건가?”
“그래, 한다 해!”
차원포식자는 뾰로통하게 말하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참으로 ‘인간다운’ 행동이었다.
“자, 그러면······.”
차원포식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어디 보자······ 어디까지 얘기했었더라?
“······.”
아, 그래 맞아. 내가 행성이 되는 것까지 얘기했었지.
어쨌거나 마침내 행성이 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우주를 주유했어. 그러면서 내 가죽 위에서는 수많은 생명체가 태어나고, 죽고. 그 생명체들이 문명을 이루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어. 내가 살아왔던 그 어떤 시간 중에서도 편하고, 무난한 시간이었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마 네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단위와는 조금 궤가 다른 시간이었을 거야. 적어도 내 주변에 보이는 은하의 풍경이 달라졌을 정도의 시간이었으니까.
그 시간 속에서 내 가죽 위에 존재했던 모든 문명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문명을 이루는 종족이 등장하게 돼.
그들은 자신들을 휴머스(humus)라고 불렀어. ‘흙에서 온 자’라는 뜻이지. 내 입장에서는 꽤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어. 아마 너희는 다르게 불렀을 테지만.
그들은, 아니 내 자식들은 오랜 시간 동안 등장했던 수많은 문명과는 다르게 나를 소중히 할 줄 알았어. 그들은 조화와 화합을 알았고, 무질서와 파괴가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를 알고 있는 아주 똑똑한 종족이었어.
나는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 그들이 아주 자랑스러웠어. 할 수만 있다면 옆의 은하에 달려가서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 “자, 보아라! 내 자식들이 이룩한 문명을, 조화를!”라고 말이야.
그들 덕분일까, 조금씩이지만 죽어가고 있던 내 몸도 어느 순간부터 다시 활력을 띄기 시작했어. 고도로 발달 된 과학은 마법과도 같다는 말처럼 그들의 문명이 마침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수준까지 이른 거야.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
어느 날, 내 가죽 위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 작가의말
오늘은 조금 일찍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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