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누멘의 왕(1)

아이작이 왕도로 향하는 동행자로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로드 멜리스가 이끄는 길드의 상행이었다.
“이쯤에서 야영을 하겠소.”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로드 멜리스가 직접 이끄는 이 상행은 호위의 숫자도 숫자일뿐더러 기타 보급품 역시도 풍부하여 여행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마른 건포로 매번 끼니를 때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마르카스 토굴의 원정대장으로 참여했었던 용병 마카로프가 이번 상행 역시도 호위로 동행한다는 점이었다.
“······자네가 왕도로 향하는 상행에는 어쩐 일이지? 게르만이 시킨 건가?”
상황이 그러했으니, 아이작의 얼굴을 알아본 마카로프가 슬쩍 말을 거는 것도 어찌 보면 필연에 가까웠다.
“개인적인 용무요. 굳이 신경 쓸 것 없소.”
“그 개인적인 용무가 이번 상행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지.”
그와 함께 차갑게 내려앉은 아이작의 시선이 마카로프의 전신을 훑었다.
“흠······.”
며칠 전이였다면 모를까, 지금의 아이작에게 있어서 마카로프는 그저 과거에 만났던 수많은 애송이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아이작이 굳이 그에게 고개를 숙여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도끼를 뽑고서 나에게 덤벼도 좋소. 스스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만 있다면.”
아이작의 목소리는 덤덤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 말을 들은 마카로프는 마치 큰 치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을 그의 머리카락과 같은 붉은빛으로 피웠다.
“······운 좋게 아티펙트 하나 손에 넣었다고 무척이나 기고만장하시군. 빌린 힘은 진정한 힘이 될 수 없어.”
“시험해보겠소? 아티펙트 덕분인지, 아닌지.”
명백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마카로프는 주먹만 불끈 쥘 뿐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아이작이 슬쩍 마카로프만 느낄 수 있도록 ‘누멘 행성 탄생의 역사’가 머금은 신화의 격을 살며시 흘렸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마카로프가 전의를 상실한 것이 확인되자, 아이작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여행의 길동무가 될 사이였으니,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를 짓뭉갤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카로프, 예전의 나는 마르카스 토굴의 짐꾼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오. 나는 로드 멜리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후 공식적으로 계약을 맺고서 이번 상행에 동행한 것이오. 아시겠소?”
아이작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마카로프의 고개가 천천히 떨궈졌다.
“······내가 큰 실례를 했군.”
“괜찮소. 앞으로 주의만 해 주신다면.”
“명심하지.”
마카로프가 마치 싸움에서 진 개처럼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때다 싶었는지 차원포식자가 끼어들었다.
[제법인데.]
“저런 부류는 대개 힘을 숭배하니까. 더 강한 힘을 보여주고, 그 강자가 어느 정도 자신을 인정해주면 굳이 더 이상 싸움을 걸지는 않을 거다.”
차원포식자가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출처가 어딘데?]
“이미 질리도록 겪어왔던 일일 뿐이다.”
[호오. 본인이 직접 겪었던 이야기였어? 그것참 흥미로운걸.]
그제야 아이작은 어느 순간부터 차원포식자의 질문에 과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대답한 후에도 별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였다.
“······신경 쓰지 마라.”
차원포식자가 즉답했다.
[그러지 뭐.]
사소한 대답 하나하나에도 일일이 신경을 쓴 아이작이 허무해질 정도로 시원한 대답이었다.
“······.”
* * *
일곱 번의 산적 조우.
열다섯 번의 몬스터 습격.
왕도로 향하는 여정은 험난하다면 험난했고, 무난하다면 무난했다.
알게 모르게 뒤에서 은근슬쩍 활약한 아이작 덕분이었다.
“자네, 솜씨가 대단하군. 어떤가, 이번 상행이 끝나면 나와 공식적으로 일해보는 것이?”
그러나 바늘이 뾰족하면 주머니 바깥으로 튀어나온다고 하던가. 아이작으로서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가를 알아본 로드 멜리스가 이례적으로 직접 제의를 해온 것이다.
“제의는 감사하지만, 저는 이번에 왕도로 가서 당분간 돌아올 예정이 없습니다.”
아이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영웅으로서 가졌던 힘과 그것을 얻기 위해서 살아왔던 삶에 비하면 이제 고작 조금 더 강해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간단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세상은 놀랍도록 변했다. 그가 만약 과거에 이런 삶 속에서 살았다면 그의 삶 전체가 흔들렸을 만큼.
“그런가······. 무척이나 아쉽군. 만약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시게.”
“알겠습니다.”
아마 그럴 일은 영영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이어진 여정 동안, 아이작은 알게 모르게 차원포식자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거야?]
“그게 더 편하니까.”
처음에는 그저 차원포식자가 하는 말에만 단답하던 수준에서, 점차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하는 지경까지.
“쓸데없는 인연을 만드는 것은 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악연을 만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흐응······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작이 차원포식자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물론, 대개는 같잖은 말다툼이었다.
[그러니까······ 소스는 부어 먹어야 제맛이라니까? 지금 한 가지의 완성된 요리를 굳이 두 가지로 나누려는 이유가 뭐야?]
“그러니까 네가 미개하다는 거다. 하긴, 행성이고 뭐고 있는 대로 다 섞어 먹던 녀석에게 온전한 미각이 있을 리가 없지.”
[허어······ 지금 나한테 먹는 것으로 도전 한 거야?]
“많이 먹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하긴, 네가 미식이 무엇인지 알긴 하겠냐 만은. 하던 대로 행성 쪼가리나 주워 먹지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작의 입가에는 어느새 작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가 영웅이 되어가며 어느 순간부터 잃어버렸던 웃음이었다.
지금까지 차원포식자의 이야기를 들어 왔기 때문일까, 아이작은 왜인지 모르게 차원포식자가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친근감까지도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미쳤군.’
정신이 번쩍 든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사람과 제대로 대화한 것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 위로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달이 지난 후, 저 멀리 지평선에서 찬란한 누멘 행성의 수도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왕도다.”
무려 한 달 동안의 여행이 드디어 종막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왠지 낯이 익은 도시인걸.]
아이작은 차원포식자의 말을 들으며 살며시 웃었다. 그가 먹어치워 온 도시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낯이 익지 않은 것이 더 부자연스러웠을 테니까 말이다.
“무슨 맛이었는지 떠올리고 있나 보지?”
차원포식자 역시도 껄껄 웃으며 이를 받았다.
[적어도 네 말랑말랑한 뇌보다는 맛있었던 것 같아.]
“꼭 먹어본 것처럼 말하는군.”
[굳이 먹어볼 필요가 있겠어? 안 봐도 지방이 잔뜩 끼어서 기름진 맛이 날 텐데.]
시답잖게 주고받은 농담 속에서 아이작은 대답 대신에 그저 웃었다. 그리고는 살며시 시선을 돌려서 왕도를 바라보았다. 이제 길고도 짧았던 여정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이작은 저곳에서 그의 여정이 어디로 향했는지에 대해서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작은 그 마침표를 찍기에 앞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봐.”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지금 아이작과 대화를 하고 있는 인간이 없음을 깨달은 차원포식자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응? 나 말이야?]
“그래.”
차원포식자의 목소리에 자연스레 의아함이 뚝뚝 묻어났다. 평소 그의 태도로 생각해보았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아이작이 먼저 말을 건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기껏 먼저 말을 연 아이작이 조심스럽게 말꼬리를 흘리자, 이를 참다못한 차원포식자가 재촉했다.
[뭐야? 뭔데?]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작은 뒷말로 삼킨 그 말을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 어쩌면, 아주 어쩌면.
너와도,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이작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내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의 머리가 잠시 어떻게 된 건가 하는 의심을 하며 죄 없는 바위에 머리를 박았다.
[뭐야? 왜 그래?]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참하게 박살 난 애꿎은 바위를 뒤로 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뭐야, 뭔데 그런 반응이야? 혹시 나한테 사랑 고백이라도 하려고 했어?]
아이작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드디어 미쳤나 보군.”
[아니면 아닌 거지. 말이 조금 심하네.]
누가 아니라고 할까 봐, 여전한 마이페이스에 아이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을 말지.”
그리고는 아이작이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표시였다.
[이봐! 말하다 말고 어디가! 내가 그렇게 막 무시해도 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물론, 전혀 소용은 없었지만.
애초에 그에게 있어서 차원포식자의 목소리는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 아닌 거겠지.”
그러나 차원포식자도 밀리진 않았다.
[내가 또 예전에 했던 얘기를 해줘야 해? 내가 먹은 인간들의 숫자가 몇인지나 알아? 따지고 보면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사람이야. 내가.]
저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으며, 아이작은 생각했다. 잠시라도, 아주 잠시라도 저런 놈과 ―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가 치욕스럽다고.
오죽하면 그 단어에 대해서 되새기는 것조차도 부정하겠는가.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군.”
[어? 또 내 말 무시하네. 이봐, 헤이, 거기! 친구!]
아이작의 발걸음이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 작은, 아주 작은 미소가 살며시 걸렸다.
- 작가의말
세상에...
사랑합니다 독자님들.
그리고 추천글 써주신 모 독자님, 특히 애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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