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구상의 마차에는 까마귀가 들어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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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8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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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9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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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2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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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4-4. 잠깐의 안식 속에서

DUMMY

네일린이 눈을 떴을 때는 이제 막 어스름이 걷혀가고 있는 새벽녘이었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리고 있었다. 그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퀴르가 꺼져가는 모닥불에 장작을 넣고 불씨를 살리고 있었다.


“일어났어?”


퀴르는 금방 네일린의 인기척을 눈치 챘다.


“자는 동안 추울까 해서 불 좀 더 지피는 중!”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네일린은 담요를 끌어안은 채 모닥불에 다가갔다.


“줘봐.”

“응?”


네일린은 퀴르에게서 부지깽이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장작이 불씨를 둘러싸게끔 한 데 모았다.


“이렇게 해야 더 잘 타.”

“헤에.”

“그나저나 어떻게 이 꼭두새벽부터 깨어 있네. 잠은 제대로 잔거야?”

“음, 그럭저럭~”


퀴르가 대답했다. 네일린은 크게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뱉었다. 이어서 그는 퀴르가 지핀 모닥불 앞에 주저앉았다. 새벽 기온이 아직 쌀쌀했으므로 불을 쬐며 정신을 차릴 요량이었다.


“아! 빵도 데워놨어. 먹을 거야?”


말하면서 그녀가 보자기에 싼 보존 건빵을 내보였다. 식사를 준비하기 마땅치 않을 때를 대비해서 그가 마차에 챙겨놓았던 식량이었다. 네일린은 고개를 끄덕하고서 그것을 받았다. 거의 비스킷 수준으로 딱딱한 빵이었다. 처음 접했을 때는 이게 정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인가 의심했었지만 지금은 익숙해지다 못해 가끔씩 입에 넣지 않으면 심심한 별미처럼 느껴졌다. 빵을 먹고 몸과 정신도 적당히 잠기운에서 벗어났을 무렵, 네일린은 담요를 정리해서 마차 안에 넣었다.


“팔은 이 정도면 많이 나아졌고...”


붕대가 감긴 왼팔을 가볍게 휘둘러보고는 네일린이 중얼거렸다. 이어서 그는 말을 보았다. 네일린의 말, 가을비는 여전히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네일린은 여겼다.


“근데 아까 보니까 그 우물이 있던 광장. 그 근처에 누군가 있던데.”


퀴르의 말에 네일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군가? 사람?”

“음, 일단 겉모습은 인간 같긴 해. 낡긴 해도 여행복을 입고 있고. 근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다가 가끔씩 입술을 달싹이고 막 혼자 웃고...”

“아아.”


네일린이 눈에 준 힘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퀴르. 지금도 그 사람이 보여?”

“음, 보이긴 하는데 지금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뭐하는지 까지는 몰라.”

“그럼 그 위치만 기억해둬. 여기서 떠날 즈음에 한 번 찾아갈 거니까.”

“엑, 위험하지 않아?”


퀴르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네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아마도.”


무덤덤하게 네일린은 말했다. 이윽고 그는 모닥불을 끄고서 퀴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아직 겉은 멀쩡한 건물들, 그 안을 좀 탐색해서 쓸모 있는 물건 있으면 챙겨올 생각인데. 같이 갈 거야?”

“가고 말구! 아, 근데 그 인간이 마차를 찾아내거나 하면...”

“그 사람은 신경 안 써도 돼.”


딱 잘라 말하는 네일린이었다. 퀴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말을 믿기로 했다. 말과 마차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네일린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소리를 할 리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윽고 퀴르가 탓탓탓, 가벼운 뜀박질로 앞장섰다.


“그럼 먼저 저기부터 가보자!”


탐색 얘기를 꺼낸 것은 네일린이었지만 어째선지 퀴르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네일린은 쯧, 혀를 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퀴르가 가리킨 곳, 그곳은 마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마법사들의 연구기관인 마탑의 레플리카로, 과거에 제국이 관광 상품으로 지어놓은 건물이었다. 지금은 윗부분이 부서져 내렸고 베여나간 나무의 밑동마냥 그 하층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마탑의 정문은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다. 연방군이 충성의 길을 파괴하면서 막아둔 게 틀림없었다. 네일린은 사전에 챙겨온 물건 하나를 꺼냈다. ‘주조 보조액’이라 부르는 그것은, 금속의 자연마력과 반응하여 금속을 녹여내는 공업용품이었다. 네일린이 치안대의 감옥에서 탈옥 방법을 고민할 때 염두에 두었던 물건이기도 했다.


철판은 나사로 고정되어 있었고 네일린은 그 나사가 있는 테두리에 보조액을 부었다. 그러자 치이익 소리를 내며 철판과 나사의 이음새가 주홍빛 액체로 녹아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보조액의 품질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완전히 녹이는 것은 무리였지만 꿈쩍도 않던 철판이 헐렁해지게 만드는 정도면 충분했다. 네일린은 녹고 남은 철판을 손으로 붙잡고 힘껏 그것을 잡아당겼다. 기기기긱, 듣기 싫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 쾅하며 철판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헤에.”

“들어가자.”


네일린이 마탑의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폐쇄돼 있던 공간이라 먼지가 꽤 쌓여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다. 지붕이 열려 있는 덕분에 냄새가 쌓일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네일린과 퀴르는 마탑의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 느닷없이 경쾌한 노랫가락이 들려왔고 놀란 퀴르가 몸을 움찔했다.


“뭐, 뭐야?”

“여기가 관광지로 운영되던 시절 쓰이던 테마곡.”


오랫동안 사람의 관리를 받지 못한 탓인지 음질이 썩 좋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몇 마디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서와~ 모두 널 기다려~’라든가, ‘여기가 바로 너가 꿈꾸던 그 파라다이스~’라고 하는 가사들이 그것이었다. 이윽고 치지직하며 노이즈가 음악을 뒤덮더니 아예 노래가 멈추었다.


“조용해졌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다 소모해서 술식이 작동했던 건가 보네.”


네일린은 신경 쓰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1층은 대체로 평범한 관광 스페이스로, 먹을 것이나 기념품을 팔던 매대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충성의 길이 파괴된 지는 벌써 수어 년이 지났으니 식품 쪽은 눈곱만치도 기대할 게 없었다. 네일린은 기념품 매대로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을 가장 먼저 잡아 끈 것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고양이 봉제인형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영애들 사이에서 한 때 인기를 끌었던 무색투명한 유리 구두가 있었다. 깨진 채 먼지바닥을 뒹굴고 있는 빈 약병도 보였고, ‘이것과 함께라면 당신도 전설의 영웅! 성검, 마라아드! - 주의: 진검입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게 해주세요.’라고 광고 문구가 붙은 검 한 자루도 그쯤 떨어져 있었다.


네일린은 검을 집어 들어 자루에서 뽑았다. 멋스러운 디자인의 예식용 장검이었는데, 검신(劍身)에는 ‘마라아드’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라아드.”


네일린이 중얼거리며 비전마력을 검으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마라아드라고 쓰여 있는 문자가 금색으로 발광하면서 퍽 성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와, 그 검은 뭐야?”

“장난감.”

“장난감? 진귀한 보검 같은 게 아니라?”

“귀족 남성들한테 팔리던 장난감이야. 그럴싸한 외관에다가 불빛만 나게 만든.”


수년동안 잠들어 있었을 마라아드의 검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팔려나온 이래로 한 번도 쓰인 적이 없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네일린은 그것을 도로 칼집에 넣고 등의 배낭에 챙겼다. 양산형 예식품 혹은 장난감으로 만들어졌으므로 검으로서의 품질은 기대할 게 못 되었고, 검에 대해 정통하지 못한 네일린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갖고 다니면 언젠가 쓸모가 있지 않을까, 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봉제인형 귀엽네.”


퀴르는 고양이 인형에 눈이 가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뭔가 바라는 듯이 네일린을 바라보았다.


“왜 날 봐. 갖고 싶으면 알아서 챙겨.”

“아니, 음, 여기 들어올 때 막 노래가 들렸었잖아? 그리고 넬이 보여준 그 검도 그냥 검이 아니었고? 영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단 말이야?”


그 말에 네일린은 퀴르의 팔에 감겨 있는 팔찌를 보았다. 이어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라도 마법이 걸렸을지 모르는 물건에 대해서 경계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더더욱 그랬다.


“1층은 일반인들한테도 제한 없이 개방되던 구역이야.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 있을 리 없으니까 맘대로 만지고 해도 괜찮아.”

“에헤헤, 그럼!”


퀴르는 고양이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이어서 그녀는 그것 위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더니―


“...”


―인형을 통째로 꿀꺽 삼켰다. 네일린은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 광경을 가만 보다가 픽하고 웃어버렸다.


“유리구두는 필요 없냐.”

“그건 딱히? 신고 다니기도 불편해보이구.”


실내 생활을 경험할 일이 적은 퀴르로서는 확실히 쓸모없는 물건이긴 했다. 네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필요한 거 없으면 2층으로 올라갈 건데.”

“응, 같이 가!”


베시시 웃으며 퀴르는 네일린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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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4-6. 잠깐의 안식 속에서 +2 19.09.30 47 3 26쪽
20 4-5. 잠깐의 안식 속에서 19.06.03 38 3 8쪽
» 4-4. 잠깐의 안식 속에서 +1 19.05.29 43 4 9쪽
18 4-3. 잠깐의 안식 속에서 19.05.27 53 4 8쪽
17 4-2. 잠깐의 안식 속에서 19.05.24 44 4 10쪽
16 4-1. 잠깐의 안식 속에서 19.05.22 53 4 9쪽
15 번외. 추적자들 19.05.19 54 4 6쪽
14 3-7. 마물 퇴치 19.05.18 51 3 18쪽
13 3-6. 마물 퇴치 19.05.13 49 4 9쪽
12 3-5. 마물 퇴치 19.05.09 58 4 10쪽
11 3-4. 마물 퇴치 19.05.07 94 5 13쪽
10 3-3. 마물 퇴치 19.04.30 70 7 11쪽
9 3-2. 마물 퇴치 19.04.28 94 7 11쪽
8 3-1. 마물 퇴치 19.04.26 144 6 8쪽
7 2-4. 호우인 가의 참극 19.04.24 82 5 13쪽
6 2-3. 호우인 가의 참극 19.04.23 90 6 7쪽
5 2-2. 호우인 가의 참극 19.04.23 93 4 11쪽
4 2-1. 호우인 가의 참극 19.04.22 160 6 12쪽
3 1-3. 까마귀와 마차상인 19.04.20 117 6 7쪽
2 1-2. 까마귀와 마차상인 19.04.20 483 6 10쪽
1 1-1. 까마귀와 마차상인 19.04.18 448 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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