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산·신우
무극존자는 특이하게 머리는 검지만 수염이 흰 사내였고 체구가 크고 단단하게 생겼다. 그리고 봉황산 전체가 무극존자 땅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러나 수수한 옷차림이나 주는 대로 먹는 식성을 보면 귀하게 자란 존재는 아닌 것 같았다. 말투도 못 배운 자처럼 상스럽기 그지없었다.
"요 비린내도 안 가신 녀석들."
술에 취해 눈을 거슴츠레하게 뜬 무극존자가 제자가 되려고 찾아온 아이들을 보며 낄낄 웃었다.
"보자, 저 검은 장삼부터 푸른 무복까지 합격, 나머진 돌아가라."
천하제일이라는 명성에 가장 가까운 무극존자가 제자를 받는다고 해서 자식이나 조카를 데리고 불원천리 달려온 자들이 입을 딱 벌렸다.
"존자, 우리 아인 왜 탈락입니까? 어려서부터 무공 천재로 소문이 자자한 아입니다."
"천재? 그럼 우리 집 황구도 무공 천재겠다. 헛소리 말고 썩 꺼지거라."
험상궂게 생긴 장한들이 와서 탈락자와 그 일행을 쫓아냈다. 이들은 무극존자의 명성을 흠모해 자발적으로 찾아와 시종을 자처한 자들이었다. 가끔 무공을 지도받고 고수 반열에 오르는 자도 있어 아무리 박대해도 규모가 줄지 않았다.
또 수십 명 아이가 몰려왔다. 마침 추수가 끝나고 한가한 계절이어서 무척 많이 왔다.
"야, 거기 눈 큰 놈. 그래, 너 이름이 뭐니?"
"담두천이라 합니다."
"어디서 왔느냐?"
"임강부 출신입니다."
"먼 곳에서 왔구나. 담두천 합격. 나머진 탈락이다."
"존자께 아뢰오. 지금까지 절반 이상이 합격했는데 왜 이번엔 한 아이만 합격인 것이오?"
"낯이 익구나. 누구냐?"
"청면교 허수상이라고 하오."
몰려든 구경꾼과 무극존자의 추종자들이 술렁였다. 청면교라면 강호 어디에 가도 고수 대접을 받을만한 유명인이었다.
"누런 게 가득하다. 하나는 황금이고 나머지는 똥이다. 너라면 똥도 고르겠느냐?"
"그럼 아깐 왜?"
"아깐 황금이 없어서 똥으로 안 보였지."
"귀한 가르침 받았소."
무극존자에게 포권을 올린 청면교가 데리고 온 아이의 손을 잡고 떠났다.
"저 새끼, 얼굴 퍼렇게 질린 거 보니 나한테 불만 품은 거 아냐?"
무극존자가 침을 퉤 뱉었다.
"청면교는 합방할 때도 얼굴이 푸릅니다."
"제길, 그럼 여자가 놀라 심장 멈추겠다."
무극존자가 대놓고 욕하는데도 청면교는 못 들은 척 갈 길만 갔다.
담두천이 홀로 합격을 받은 뒤로 줄줄이 탈락했다. 담두천 먼저 합격한 아이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담두천 뒤에 배치된 아이들은 너나없이 울상을 지었다.
연신 탈락 혹은 불합격만 외치던 무극존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마시던 술병마저 던져버리고 밑으로 달려갔다.
"너, 몇 살이야?"
"열 살입니다."
"잘생겼구나."
말을 마친 무극존자는 아이 주변을 맴돌았다. 마치 주인 곁을 맴도는 강아지 같아서 누구라도 웃을 법했지만, 감히 무극존자를 비웃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내공을 익힌 적은 당연히 없겠고. 무공을 익힌 흔적도 없고. 너 도대체 뭐냐?"
"잔월인데요."
"너 내가 안 무서워?"
"슬퍼 보여요."
갑자기 걸음을 멈춘 무극존자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커다란 주먹을 부르르 떨던 무극존자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제길. 들켰네?"
무극존자는 잔월 앞에 퍼더버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잔월이 품을 뒤져 당과 하나 꺼냈다.
"슬플 땐 단 거 먹으면 좋아져요."
"누가 그러던?"
"애들이 단 거 먹으려고 일부러 울잖아요."
"으하하. 너 진짜 재밌는 놈이구나."
무극존자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지도 않고 숨 넘어갈 듯이 웃어댔다.
"너 합격. 이젠 제자 더 안 받는다. 다 돌아가."
담두천 다음에 합격한 아이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기회는 있었다. 그런데 잔월 때문에 기회조차 사라지자 아이를 데려온 사람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존자께 아룁니다. 잔월은 제 시종입니다. 만약 제가 탈락하면 잔월도 함께 돌아가야 합니다."
"넌 누구냐?"
"무곡산장 공손완아라고 합니다."
"누구 딸이냐?"
"부친이 가주 직을 맡고 계십니다."
"그럼 너도 합격. 나머진 돌아가라."
"존자, 면양 진우량이오."
"넌 나이가 많아서 안 돼."
"여기 견자는 어떠시오?"
진선을 본 무극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공을 꾸준히 수련하면 고수 소리는 듣겠구나. 그럼 너도 합격. 나머진 돌아가라. 귀찮게 굴면 모가지 뽑아버린다."
무극존자가 앞장서고 수십 명 아이가 뒤를 따랐다. 그 뒤는 험상궂은 얼굴을 한 장한 수백 명이 추종했다.
"오늘부터 나랑 제자들만 여기서 산다. 너흰 밖에 모옥을 짓고 살아라."
말 한마디로 시중드는 자들을 쫓아낸 무극존자는 방 배정도 안 하고 들어가 버렸다.
"자. 아무래도 장원을 가꾸고 음식 만드는 일은 우리가 직접 해야 할 것 같구나. 나는 진선이라고 한다. 나랑 함께 장원을 관리할 자는 나서라."
기골이 장대한 진선은 열다섯으로 나이도 가장 많았다. 게다가 전쟁에도 몇 번 참가한 적 있어서 기세가 강했다.
"임강부에서 온 담두천이다. 아직 서열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평대하마."
공손완아와 잔월 그리고 몇몇 아이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진선을 돕겠다고 했다.
"먼저 담두천이 사람 숫자를 파악해라. 공손완아와 잔월은 방이 몇 개 있는지 알아보고. 방은 가까운 지역끼리 함께 있도록 배정한다. 그리고 음식 만들 줄 아는 애들은 나한테 말해라. 만들 줄 모르는 자는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 등 허드렛일을 할 것이다."
군대를 관리한 경험이 있는 진선 덕분에 정리가 빠르게 되었다. 시급한 일을 다 정리한 진선은 밖에 나가 추종자 대표들을 만났다. 쌀이나 채소나 고기를 구매하는 방법 그리고 제반 주의사항을 전해 듣고 장원에 돌아갔다.
저녁은 간단히 밥에 고깃국을 먹었다. 음식 만들 줄 안다고 해봤자 밥을 안치고 계란국이나 끓여본 수준이었다.
다들 피로가 심했는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잔월은 진선과 함께 방을 나섰다. 눈에 안 띄는 구석에 가서 몰래 불을 피우고 흑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는 것 같다."
진선이 코를 킁킁대더니 흑표가 가까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과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흑표가 커다란 쥐 한 마리를 물고 나타났다.
"진 형, 어떻게 아는 거예요? 기척이 전혀 없었는데."
"피 냄새. 어릴 때부터 많이 맡아서 특별히 민감하거든."
진선이 작은 칼로 껍질을 바르고 내장을 털어냈다. 흑표는 진선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사냥하러 떠났다. 흑표의 머리로도 저 덩치 때문에 쥐 한 마리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헤헤. 소피 보러 나왔다가 횡재하네?"
쥐를 굽고 있는데 담두천이 넉살 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나 품에서 소금을 비롯한 양념을 주섬주섬 꺼내는 걸 보니, 소피 보다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건 거짓말인 듯했다.
"온다."
토실토실 살찐 새 한 마리를 물고 온 흑표는 아까는 없었던 담두천을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사냥하러 나갔다. 담두천이 새털을 쑥쑥 뽑더니 항문을 쭉 찢고 내장을 뽑아냈다.
새 안에 양념을 쑤셔 넣은 담두천은 나무 꼬챙이에 꿴 후 불에 익혔다.
쥐를 다 먹고 새를 나눠 먹을 때 흑표가 토끼 한 마리 물어왔다. 담두천은 능숙한 솜씨로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뽑아낸 후 칼집을 내고 양념을 발랐다.
"아까 음식 할 줄 아는 사람 찾을 때 너 없었던 거 같은데?"
"고기 손질하고 굽는 것밖에 못 해."
고기를 다 먹고 담두천이 품에서 대추 세 알을 꺼냈다. 푸른 대추를 소매에 쓱쓱 닦아 먹으니 입안이 상쾌했다. 그야말로 신선이 부럽지 않은 한 끼 식사였다.
"우리 셋만 아는 거야."
"장원이 크다지만, 오늘 내가 발견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들킬지도 몰라. 차라리 장원 밖으로 나가는 건 어때?"
"그럼 내일 낮에 적당한 곳을 물색해놓자. 한창 자랄 나인데 제대로 먹어야지."
웬만한 어른보다 머리 하나 큰 진선의 말에 담두천과 잔월이 동시에 혀를 찼다.
진선이 열다섯 살로 가장 나이가 많았고 잔월과 담두천은 열 살로 동갑이었다. 남은 애들은 대부분 열두 살에서 열세 살이었다.
"근데, 잔월 넌 성이 뭐야?"
"몰라."
단무전은 꽤 조심스러운 편이어서 잔월에게도 성이 뭔지 알려주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은 잔월이 아명 정도 되는 줄 알지 정식 이름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럼 나랑 같이 담 씨 할래? 담잔월 괜찮잖아."
"진잔월이 나은 거 같은데?"
"나 그냥 잔월 할래."
그새 흑표는 쥐 한 마리 물어다 고기를 뜯어 먹었다.
"쟤 고양이 아니지?"
"어. 아니라고 말하는데 누구도 안 믿어."
"산묘야?"
"표범이야."
"새끼야?"
"아니. 열 살이야."
"존자께선 무슨 무공을 가르쳐 줄까?"
"소림 아미와 종남에도 무극존자를 능가하는 고수가 없다고 해. 어마어마한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을까?"
"난 외공 익히라고 하던데. 외공 엄청 아픈 거 아냐?"
"아플걸. 채찍으로 때리고 뜨거운 모래에 손 담그고 그런다던데. 촛불로 태우기도 한다더라."
셋은 특정 화제도 없이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며 대화를 나눴다.
"이만 돌아가자. 내일 밤 다시 보자."
셋은 우물을 길어 입을 헹궈 고기 냄새를 없앤 후 방에 들어갔다. 장원은 큰데 정작 방은 얼마 없어서 하나를 대여섯씩 함께 쓰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대화한 피곤이 채 풀리기도 전에 무극존자가 어마어마한 목청으로 달콤한 잠에서 깨웠다.
"이 게을러터진 돼지 새끼들아. 빨리 일어나서 수련해야지."
황급히 일어난 아이들은 눈곱도 떼지 못한 채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자, 아침 먹기 전에 저기 보이는 산꼭대기까지 갔다 와라. 늦게 오는 놈은 밥이 없다."
출발할 땐 가까워 보였는데 정작 뛰어보니 엄청 멀었다. 경공을 익힌 게 분명한 공손완아가 선두를 혼자 달렸다.
"나 쟤 그냥 싫어."
담두천이 함께 달리는 잔월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난 쟤 싫은 이유가 수십 가지나 있어. 근데 싫은 티 내지 마."
"왜?"
"제일 뒤에 처진 분이 저 철부지를 사모하셔."
진선은 밤에 고기를 구워 먹었지만, 새벽부터 배고팠다. 공복이어서 긴 다리에도 불구하고 가장 뒤에 처졌다.
"여자 보는 눈이 없구나. 사람은 괜찮아 보였는데."
일행이 산꼭대기를 뛰고 돌아갔을 때 무극존자와 공손완아는 이미 식사를 마쳤다.
"너, 너, 그리고 너. 집으로 돌아가."
꼭대기를 찍지 않은 셋이 쫓겨났다.
"자기 이름이 적힌 물독을 채워라."
殘月童 잔월 어린이
新友 새 친구를 사귀다
- 작가의말
내일부턴 하루에 3편 올리겠습니다.
8시, 12시, 20시에 한 편씩 올라갑니다. 50화까지 열흘 동안 이렇게 올리고 그다음은 비축분 봐가면서 연재 속도 조절하겠습니다.
지명 관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글의 지명은 명나라 초반 이름을 따릅니다.
예를 들어 1화에 언급된 임강부는 원나라 때 ‘임강로’입니다.
서안, 우리가 잘 아는 그 장안입니다. 이 역시 저 때는 ‘봉원로’입니다. 봉원로 이전에는 서안이 아닌 경조부, 안서부로 불렸죠.
익숙지 않은 원나라 이름보다는 익숙한 명나라 이름을 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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