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삭비·강호
잔월은 날이 밝자마자 늑대들의 영역을 떠났다. 그러나 무극존자가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멀리 가진 못했다.
혹시라도 자신을 찾고 있을 홍야차를 비롯한 무곡산장 사람들이 걱정되어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무극존자가 마적을 학살한 곳을 중심으로 쉬지 않고 움직였다.
"용케 도망쳤구나."
무극존자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워질 줄은 몰랐다. 사흘이 되어서야 무극존자가 잔월을 찾아냈다.
무극존자는 목에 커다란 상처 하나 생겼고 옆구리에도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다른 사람의 피가 튄 게 아니라 본인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에 적셔진 형태였다.
무극존자가 손을 놓자 흑표가 달려와서 잔월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잔월은 품에서 기름종이에 싼 비급을 꺼내 무극존자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바로 흑표를 들어 품에 꼭 안았다.
"읽어봤니?"
"네."
무극존자는 묵묵히 잔월을 바라봤다.
"내가 열한 살 때보다 더 강하구나."
"이별하기 전에 이야기 들어줄래?"
이야기라면 반색하던 잔월이었지만, 왠지 듣고 싶지 않았다.
"이걸 읽어봤으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너도 눈치챘지?"
"네. 이 무극환허인 상편은 글자만 있더군요."
공손완아가 훔친 무극환허인 상편은 그림이 있었다. 그런데 무극존자가 도망칠 때 잔월에게 맡긴 무극환허인은 그림이 전혀 없고 글자만 있었다.
"이게 진짜다."
"내가 저들에게 잡히면 어쩌려고 맡겼어요?"
무극존자는 잔월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했다.
"멸문지화를 당한 후 나는 줄곧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복수를 이룰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원수 한 놈도 놓치지 않을지. 그러고는 맨날 술을 마시며 무뢰한으로 변했다.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를 내 원수들이 내가 폭급하고 멍청하게 변했다고 믿을 수 있게 말이지."
무극존자는 무극환허인 상편을 손바닥 사이에 끼웠다. 모락모락 김이 나더니 책이 불에 타버렸다.
"나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 이상한 병에 걸렸다. 그래서 무극환허인을 익힌 후 나처럼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그림으로 비급을 작성했다. 겨우 절반 완성했을 때 가문이 습격받았지."
"나는 혹시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가족을 찾아 천하를 돌아다니며 비급을 완성했다. 그리고 나를 따라다니는 추종자 중 자질이 괜찮은 자들에게 일부만 익히게 했다. 그들은 모두 고수가 되었고, 무극환허인 상편은 그림으로 이뤄졌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았다."
무극존자는 바닥에 앉은 후 잔월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나는 제자를 받는다고 말했다. 솔직히 무곡산장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시 가주가 내 모친의 친 오라비였고, 무곡산장엔 대단한 무공이 엄청 많았으니까. 수십 명의 제자를 받은 후 난 추종자들을 쫓아내고 얼토당토않은 수련만 시켰다. 추종자가 없으면 행동하기 쉬울 거고, 목적이 없는 자라면 말도 안 되는 수련을 묵묵히 견뎌내진 못하겠지."
"그렇게 다섯만 남은 후 나는 일부러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몰래 돌아와서 지켜봤지. 놀랍게도 내 방을 뒤진 자는 절대 아닐 거라고 여겼던 공손완아였다. 그리고 내가 일부러 눈에 띄는 곳에 둔 진짜 무극환허인은 무시하고 그림으로 된 무극환허인을 찾으려고 애썼다."
"여름이 되었을 때 공손완아가 그림으로 된 비급을 찾아냈다. 그림으로 된 가짜 비급은 내 방이 아닌 다른 방에 있었거든. 그런데 공손완아는 바로 신호를 보내 사람을 부르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비급을 해석하려 하더라."
잔월은 점점 무극존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내가 없는 사이 비급이 빠져나가면 가장 좋겠지만, 공손완아는 잠을 줄여가며 비급을 해석하려 했다. 적어도 공손무기 수준은 되어야 해석할 수 있는데. 일이 생각대로 안 풀려 조급한 가운데 대머리가 찾아왔다. 대머리라면 나를 찾아낼 게 뻔하기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나는 진짜 무극환허인을 갖고 떠났다."
"그리고 술을 잔뜩 사 들고 다시 봉황산장을 찾았지. 일부러 술을 가득 먹어 공손완아가 훔친 비급을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고 나서 멍청이 셋을 내보내 무곡산장에 알려 공손완아를 구해가게 하려 했지. 그런데 두 멍청이가 잔머리를 굴려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남겠다고 하더라. 보는 내가 다 기가 차서 원."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는 셋이 얼마나 멍청하게 보였을지 생각하니, 당사자가 아닌 잔월이 막 부끄러웠다.
"마적 죽일 때 일부러 틈을 줬지. 공손완아가 개울가에 비급을 묻더라. 멍청한 계집이 너무 개울과 가까운 곳에 묻어서 밤에 내가 물에 안 젖는 곳으로 옮겨주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오독교를 만났을 때 공손무기 형제들이 전부 왔다. 난 일부러 실력을 숨겨 열세에 처한 척하며 도망을 선택했다. 그리고 너한테 진짜 무극환허인을 맡겼지."
"왜요? 내가 잡히면 진짜 비급이 저들 손에 들어가는데."
"마지막 확인이었다. 저들이 그림으로 된 비급에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었다면 너를 쫓는 데 많은 병력을 할애하겠지. 그런데 저 멍청이들은 홍야차라는 홍모귀(紅毛鬼 - 서양인을 비하하는 단어)한테 널 찾으라 하고 모조리 나를 쫓더라. 옆구리에 하나 맞아주고 도망치려 했는데 저들의 실력이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목에도 칼 맞았다."
"절 죽일 건가요? 제가 진짜 무극환허인을 봤잖아요."
"아니. 내 아들이 살아있다면 너랑 비슷한 또래다. 그리고 무극환허인은 상편과 하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상편 다섯 글자에 하편 열두 글자가 이어진다. 넌 상편만 봤기에 아무것도 못 익힌다."
"내가 무곡산장에 잡히면요? 날 고문해서 상편 내용을 알아내면 어떡해요?"
"너 혹시 벌써 사는 게 싫증 났니? 너만 말 안 하면 무곡산장에서 어떻게 네가 무극환허인 상편 내용을 읽었는지 알겠어?"
잔월은 무릎을 탁 쳤다.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하다 보니 추론이 객관적이지 못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림으로 된 상편은 내가 살짝 손을 썼다. 그걸 제대로 해석해서 무공을 익히면 웬만한 멍청이 아니면 삼 년 안에 고수가 된다. 고수가 된 후 무공 수련을 멈추면 상관없지만, 수련을 계속하면 어느 시점부터 급격히 노화한다. 원기를 조금씩 끌어내서 수련하는 방식으로 꾸몄는데, 그게 안전하다고 믿도록 심혈을 기울였지. 그리고 처음엔 확실히 안전하다. 고수가 된 후부터 문제가 되지."
"왜 나한테 다 얘기해줘요? 내가 무곡산장에 그거 가짜고 익히면 나쁘다고 말하면 어떡해요?"
"넌 강호를 모르는구나."
무극존자가 껄껄 웃었다.
"저들이 비급을 해석하다가 원기를 건드리는 방식임을 알아도 수련을 멈추지 않을 거다. 내가 해냈으니 자신들도 해내리라고 믿겠지. 그리고 내가 만든 함정임을 알더라도 자기는 괜찮을 거라는 생각으로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려고 애쓸 거다. 내게서 훔친 비급이 진짜든 가짜든 저들은 연구하고 익힐 수밖에 없다."
"다 알고 보면 중간중간 허점이 있는데, 저들은 욕심이 눈을 가려서 절대 모른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꼬맹이 너도 어차피 강호에서 칼밥 먹을 운명이 틀림없다. 내 말을 명심하거라. 눈을 뜬 채 코를 베이는 곳이 강호다. 담두천이랑 남은 한 놈이 의리 지킨답시고 남은 거, 열 살만 더 먹으면 누구도 안 할 짓이다. 어린 치기에나 가능한 일이지."
"저는 나이를 먹어도 협의를 지킬 거예요."
"강호제일로 불리는 나도 협의를 지킬 힘이 없다. 네가 얼마나 강해져야 협의를 지킬 수 있겠느냐?"
"협의를 지키는 건 강함과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나 누구보다 강해질 거예요."
무극존자가 불쑥 다가와 잔월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에서 따뜻하면서도 슬픈 온기가 전해졌다. 잔월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내 마음의 응어리가 다 사라져서 온전한 사람이 되면, 그때 너를 찾으마. 부디 그때까지 건강하게 살아남거라. 무곡산장 무인들은 전부 돌아갔으니 걱정 말아라. 아마 지금쯤 산장을 버리고 도망가느라 바쁠 거다."
"왜 도망쳐요?"
"내가 안 죽었으니까. 몰래 숨어서 하나씩 죽이면 누가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제가 도울 일은 없나요?"
"그럴 일은 없다. 이미 사람을 시켜 무곡산장이 무극존자의 무극환허인을 훔쳐 갔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나뿐 아니라 비급을 탐낸 자들의 암습과 음모에도 대처해야 할 거다."
"그래서 일부러 봉황내의를 두 번이나 펼치고 진천각도 펼친 건가요?"
"그래. 봉황산장에서 내 초식의 위력을 확인한 자라면 욕심이 날 수밖에 없겠지. 세상엔 고수만 되면 거칠 게 없다고 믿는 멍청이가 무척 많으니까."
무극존자는 당분간 직접 손쓰지 않고 무곡산장 외에 다른 흉수가 더 있는지 확인할 작정이다. 마음에 한 점의 후회도 남지 않을 정도로 복수해야 가슴에 맺힌 멍울이 사라질 것 같았다.
무극존자는 떠나기 전에 잔월에게 칼 한 자루 건넸다. 날 길이가 일 척밖에 안 되는 짧은 칼이었다. 좋은 철로 만들었는지 서슬이 시퍼렜다.
"내 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누군가는 그 전말을 알아줬으면 했다. 그게 네가 될 줄은 나도 몰랐지만."
'협의부터 지켜야지. 내 의형제의 생사부터 확인하자.'
낙양으로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방금 무극존자 앞에서 큰소리쳤던 게 생각났다. 담두천이야 그저 산비탈을 구른 것뿐이지만, 한자강은 독충에 물리기까지 했다.
'그간 안 찾은 건 흑표를 구하기 위함이야. 흑표도 우리 의형제니까 난 협의를 저버린 게 아니야.'
애써 자기 합리화를 끝낸 잔월은 칼을 등에 메고 출발했다. 원래는 잔월보다 더 빠르게 달리던 흑표였지만, 사흘 동안 제대로 못 먹었는지 얼마 못 가서 뒤처졌다. 잔월은 흑표를 품에 안고 오독교가 길을 막았던 곳으로 달렸다.
침통도 강물에서 잃어버렸지만, 잔월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저 담두천과 한자강을 빨리 찾아내겠다는 일념에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목적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무극존자가 중독된 주점에도 이르지 못했는데 밤이 어두워졌다. 다행히 단전이 생기고 내공을 얻은 후 밤에도 잘 보였다.
그리고 어두워서 좋은 점도 있었다. 밝은 곳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모닥불이다.'
잔월은 흑표가 기척 없이 걸을 때를 흉내 내서 어깨를 움츠리고 발꿈치를 들었다. 조심조심 접근해서 어떤 사람인지 살피려는데, 귓가에 전음이 들려왔다.
[나쁜 사람 아니니 그냥 오시게.]
睜眼削鼻 눈 떠도 코 베어 가는 곳이
江湖 강호다
- 작가의말
혹시 앞부분 읽으면서 뭔가 미심쩍다는 생각을 하셨다면 제대로 읽은 거 맞습니다. 조금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죠. 이번 편을 통해 의혹이 해소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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