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사·설전
두 번째 아이를 치료한 잔월은 또 기절했다. 몸이 피로하거나 심력이 고갈한 건 아니었다. 월영고랑을 치료한 후 깨달음을 수습하는 과정이 있었고 그 경험으로 몸이 알아서 기절한 것뿐이었다.
치료 과정에 잔월이 잡아낸 것들도 있지만, 몸이 알고 머리가 모르는 작은 깨달음들이 수두룩했다. 잔월은 꿈을 통해 난잡하게 널린 깨달음을 주워 담았다. 잠에서 깨면 꿈은 전혀 기억나지 않겠지만, 필요한 상황에서 어렴풋하던 깨달음이 명확하게 떠오를 것이다.
깊은 잠에서 깨니 개운했다. 옷을 차려입고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세수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니 어딘가 허전했다.
"흑표."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흑표가 없었다. 최근 부쩍 친해진 두 쌍둥이랑 놀러 나가거나 사냥하러 간 것 같았다.
방에 우두커니 앉아 뭘 할지 고민했다. 외숙공의 편지는 낙양에 돌아가면 준다고 했으니 무림대회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치료 과정에 얻은 깨달음을 더 잘 수습하려면 섬전도 구결을 읽는 것도 멈추고 쉬어야 한다.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도 좋지 않다. 지금은 최대한 외부 자극을 줄여야 하는 시기다.
"여기 편지다."
머리를 비우고 가만히 있는데 경인 스님이 불쑥 찾아왔다. 극양인을 전수한 후 드디어 잔월을 편하게 대했다.
'설마 그새 낙양을 다녀오신 건가?'
잔월은 편지를 공손히 받아서 펼쳐봤다. 버들잎처럼 살짝 휜 획들로 이뤄진 글자는 외숙공의 필체가 아니었다.
'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편지를 읽은 잔월은 화가 치솟았다. 치료를 마친 쌍둥이는 이미 천부전과 천희연과 함께 아미로 떠났다.
'흑표 이 배신자.'
문제는 이들이 떠날 때 흑표도 함께 따라갔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지만, 자의면 흑표가 원망스럽고 타의면 천부전과 천희연이 원망스럽다.
"이건 내게 직접 전해달라고 했다. 네 고양이가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한다. 천 대협이 아미에 가서 수명 늘려준다고 고양이를 데려갔다."
"그렇군요. 치료가 언제 끝난다고 하던가요?"
잔월은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하면서 타인을 함부로 재단했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뭔가 연유가 있을 텐데, 욱하는 마음에 안 좋은 쪽으로만 몰아갔다.
"잘 모르겠다. 그것 때문에 천 대협이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난다면서 무척 미안해하더라."
편지와 말을 전한 경인 스님은 바로 불당으로 갔다. 잔월에게 극양인을 전한 이후로 매일 불당에서 절을 천 번씩 올리며 속죄했다.
편지를 접어 섬전도의 구결과 함께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머리를 비웠다. 흑표가 걱정되긴 했지만, 천부전은 첫인상과 달리 왠지 믿음이 갔다.
그렇게 며칠 계속 멍한 상태로 지냈다. 심지어 음식도 전혀 먹지 않았다. 사냥으로 잔월을 먹여 살리던 흑표가 없으니 직접 움직여야 했는데, 소림사의 영역에서 살생하기가 좀 그랬다.
소림사가 주는 식사는 정해진 시각에 맞춰 먹어야 하기에 계속 때를 놓쳤다. 굳이 끼니를 염두에 두지 않고 멍하니 있어서 식사 시간을 맞춘 적이 없었다.
"무림대회다."
경인 스님의 말에 잔월은 정신을 차리고 뒤를 따랐다. 경인 스님을 따라 나한당 연무장에 도착했다.
"나도 사실 강호 인물을 잘 모른다. 그래도 중요한 사람은 알아두는 게 좋을 거다. 저긴 종남파에서 온 사람들이다. 정확히는 전진용문파지만, 요즘은 다 종남파라고만 부른다."
비단 도포를 두껍게 입고 광대가 툭 튀어나온 자가 자리에 앉고 뒤에 제자 수십 명 서 있었다.
"자리에 앉은 도인이 종남파 장문인 완안덕명이다. 금나라 황실 적통인데 원에서 살려뒀다. 원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무척 강한 자다. 그리고 뒤에 눈이 유달리 작고 수염을 짧게 다듬은 자는 독심호리라고 한다. 검선 일맥이 사라진 종남파가 지금의 위세를 유지할 수 있은 건 저자 덕분이라는 소문이 있다. 그리고 저 팔 하나 없는 자는 상소룡이라고 불리는 자다."
강호에는 이름 대신 별호만 사용하는 자들이 있다. 이름보다 별호가 훨씬 알려졌거나 본명이 부끄러운 자들이 대부분이다. 독심호리는 별호가 널리 알려져서 이름이 잊힌 사례였다.
잔월의 사부이자 무송의 후예인 월영고랑은 본명이 무측천이었다. 무공이 하늘에 닿으라는 좋은 의미의 이름이지만, 남에게 불리기엔 조금 부끄러웠다.
"저기 철마방은 중원인이 아닌 몽골인으로 구성된 문파다.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읽기도 어려운 몽골식 이름이고 무공도 강하지 않아서 경인 스님이 굳이 알아둘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관과 협력하며 부리는 위세만큼은 웬만한 문파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저긴 의혈맹이라는 방파인데, 사실상 혈풍이라는 말이 있다. 혈풍은 금나라 황실에서 만든 자객 단체다. 현재는 원 황실에 충성하며 대부분이 어사대에 소속되어 있다. 혈풍의 맹주가 완안덕명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 여부는 모른다."
소림 편에 선 몇몇 큰 무리를 소개한 후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저기 두 거지 무리는 북개방과 남개방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수척한 자들이 북개방이고, 옷을 깨끗하게 입고 얼굴이 봐줄 만한 자들이 남개방이다. 원래 남개방은 소림 편이었는데 근래에 명교 편으로 돌아섰다."
예상외로 명교 편에 선 문파가 적었다. 이는 천하의 세력 판도에 큰 변화가 생긴 탓이었다.
작년 장사성은 서달의 공격에 성 여러 개 빼앗기고 동생 장사덕이 주원장에게 생포되었다.
사로잡힌 장사덕이 몰래 편지를 보내 장사성에게 원에 투항해서 숨돌릴 것을 권했다. 원 조정과 주원장 그리고 방국진의 협공을 버티기 힘들었던 장사성은 원에 투항 의사를 내비쳤다.
방국진 역시 원에 투항한 자이기에 적 둘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묘안이었다.
주원장과 한림아 그리고 진우량만으로도 벅찼던 원 황실은 바로 투항을 받아들이고 장사성에게 태위 직을 내렸다. 장사성의 형제와 수하들도 일일이 관직에 봉했다.
현재 가장 큰 네 세력을 살피면 진우량의 군사가 가장 규모가 크고 주원장의 군사가 가장 용맹했다. 한림아는 송나라 황실 피를 이었다고 주장하여 명분에 앞섰으며 주원장을 명목상 수하로 두었다.
장사성은 가장 부유했다. 강남의 비옥한 땅을 차지하여 식량 걱정이 없었고 부유한 지주들을 약탈하여 곳간이 풍성했다.
원에 투항한 장사성은 마음껏 확장했다. 원의 신하를 자처하긴 했지만, 사실상 전혀 통제가 안 되는 군벌이었다.
장사성이 원에 투항하고 명교에 적대하는 바람에 수많은 문파가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렸다. 그래서 이름만 무림대회지 참가한 문파가 얼마 없었다. 모인 사람은 수천이 되었지만, 태반이 아미처럼 싸움을 구경하러 온 자들이었다.
"소림 방장 해인(海印)이오. 강호의 동도들이 보잘것없는 절간을 찾아주셔서 매우 감격스럽소.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라 술과 고기를 준비할 수 없지만, 마음껏 즐기다 가시기 바라오."
해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수천 명의 귀에 전해졌다.
근 삼십 년 동안 소림사 방장은 열 명이나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 방장인 해인도 무림대회를 끝으로 방장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예정됐다.
방장으로서 이번 위기를 잘 넘기리라 다짐하며 해인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명교 청익목 향주 동우현이오. 소림은 살계도 서슴없이 어기면서 고작 음주와 육식을 할 수 없다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소."
동우현은 정말 이보다 더 평범할 수 없다시피 생긴 사내였다.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나이를 짐작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명교를 대표로 나선 걸 보면 평범한 사람은 절대 아닐 것이다.
"소림에 그런 무도한 자가 있단 말이오? 방장인 나는 금시초문이오."
해인이 시치미를 떼자 동우현이 뾰족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소림의 손에 죽은 명교 형제가 수천이 되는데 모르쇠가 먹히리라 생각하오?"
"그 빚은 이미 십수 년 전에 그대들이 소림사를 불태운 거로 갚지 않았소? 원한에 원한으로 갚으면 그 끝이 언제겠소. 그간의 은원은 모두 잊고 새로 시작하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소?"
"개방 방주 전칠이오. 그대들은 자랑스러운 중원인인데 어찌 북에서 내려온 무도한 오랑캐들을 도와 같은 뿌리를 타고난 자들을 핍박하시오. 부처께서 고해는 끝이 없지만 고개를 돌리면 피안이라고 하셨소. 어서 미혹에서 빠져나와 세상을 똑바로 사시기 바라오."
전칠은 못 먹는 거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키가 크고 몸집도 컸다. 특히 솥뚜껑 같은 두꺼운 양손이 눈길을 끌었다. 덩치 빼면 덕지덕지 기운 남루한 옷에 봉두난발에 때가 잔뜩 묻은 얼굴 등 더할 나위 없는 거지였다.
"철장표향 전칠 방주, 오랜만이오. 정작 그대가 돕는 명교 역시 서역에서 들어온 오랑캐들의 무리가 아닌가 하오."
해인의 말에 동우현이 바로 반박했다.
"불교 역시 서역에서 건너오지 않았소? 특히 소림에서 조사로 모시는 달마는 천축인이오. 우리 명교에도 서역인은 있지만, 교주부터 시작해서 대부분 교도는 중원인이오."
"해납백천(海納百川 - 바다는 모든 냇물을 받아들인다)이라고 했소. 중원은 세상의 중심으로 차별 없이 모든 걸 수용해야 하오. 분쟁을 멈추는 길은 너와 나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오. 피와 아를 구분하지 않으면 천하대동(天下大同)의 평화로운 날이 오지 않겠소?"
"피아를 나눈 건 소림사 아니겠소? 수백 명 무승을 보내 홍건군 수천 명을 학살하지 않았소?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소림사 스님 수천 명을 죽이지 그랬소. 어차피 피를 죽이나 아를 죽이나 구분이 없을 텐데."
당시 소림 방장은 황실이 임명한 자였다. 게다가 소림사가 종남과 아미를 누르고 중원 최고의 문파가 되려고 불경을 멀리하고 비급을 가까이하던 시기였다. 스님으로서의 자비심을 잊고 살던 때 저지른 잘못이 소림사 발목을 두고두고 잡았다.
"그래서 십수 년 전에 그대들이 소림사를 공격할 때 맞서지 않고 피했소. 다시 돌아오기까지 죽은 스님이 천은 몰라도 팔백은 되오. 이미 지나간 잘못은 잊고 함께 나은 미래를 도모해야 하는 게 아닌지 싶소."
"말씀 잘하셨소. 그럼 중원 문파들이 경양하는 소림과 종남이 솔선수범해서 우릴 도와 패악 무도한 원 황실을 쫓아내야 하지 않겠소? 원이 중원을 차지하고부터 오랜 기간 이 땅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불가마 속에서 허덕이는 걸 방장은 모르시는 게요?"
전칠이 호통쳤다.
少林寺 소림사에서
舌戰 혀로 싸우다
- 작가의말
혀로 싸우는 건 이번 편에서 끝입니다. 다음 편은 아주 유쾌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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