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합·무위
여자아이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목놓아 엉엉 울었다. 나이는 여덟 살 정도로 보였다. 곁엔 열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손에 당과를 들고 쩔쩔매고 있었다.
"대사형, 대사형이 혼인했어."
여자아이가 끅끅거리며 슬픔을 호소했다.
"괜찮아. 사매. 내가 있잖아."
진한 눈썹이 시원하게 뻗은 잘생긴 남자아이가 말했다.
"넌 싫어. 난 대사형이 좋단 말이야."
입으론 싫다고 하면서도 당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남자아이는 무언의 압박을 못 이기고 당과를 내밀었다.
당과를 입에 물어서인지 슬픔이 가셨는지,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쳤다.
"흑 장로, 축하하오."
당문을 대표하여 온 당한백이 잔월을 와락 그러안았다.
"삼사 얘기는 삼갔으면 좋겠소."
당한백 일행에서 당선령을 발견한 잔월이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대신, 내 여동생이 자강두천이랑 잘 되게 좀 도와주시오."
잔월은 남궁가나 모용가 그리고 팽가를 비롯한 여식을 데려온 가문을 일별했다. 잔월 눈길을 따라 기타 가문의 여자를 확인한 당한백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성격만 안 들키면 필승이다.'
서안에서도 유명한 주례꾼이 혼사를 진행했다. 먼저 잔에 술을 가득 채워 허공에 뿌리고 하늘과 땅에 절을 올렸다. 다음은 천희연 부모와 월영고랑 그리고 혁중 부부에게 술을 올리며 절했다. 마지막은 잔월과 천희연이 마주 절하는 것으로 정식 절차를 끝냈다.
천희연은 희영과 희웅이 신방에 집어넣었고 신랑인 잔월은 술상을 돌아다니며 술을 진창 마셔야 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진 않지만, 고수여도 오줌 마려운 건 참기 힘들었다.
'개방이 고맙구나.'
거지들은 잔월이 왔는데도 자기들 입에 음식 쑤셔 넣는 데 여념이 없어 술을 크게 권하지 않았다.
천부전과 단무전 그리고 검선 풍경천이 있는 상으로 갔다. 남궁가와 모용가 그리고 팽가 노가주도 있었다. 소림 나한당 당주 해국 스님은 찻잔을 앞에 두고 요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같은 가마에 볶다 보니 돼지기름을 비롯한 짐승 기름이 채소에도 묻었기에 차만 마셨다.
"혼인하는 좋은 날에 이런 얘기 꺼내서 미안한데, 최근 무극환허인 때문에 강호에 혈풍이 불고 있다. 방금 약왕께서 네 소행이라고 하는데, 맞느냐?"
검선의 말에 잔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어려운 무극존자의 가짜 무극환허인보다는 제가 쓴 비급이 훨씬 탐날 겁니다. 이미 북개방에 익혀도 문제는 없지만, 그 역시 가짜라고 소문을 퍼뜨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과정에 죽어간 자들은 어찌하느냐?"
"평생 미안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다시 같은 상황이 오면 똑같이 하겠습니다."
"자고영웅출소년(自古英雄出少年)이라더니."
남궁가 노가주가 감탄했다.
"남궁가에선 무림맹을 만들까 고민하고 있소. 오늘 독고 소협을 보니 군웅을 이끌어 멸세교를 없앨 적임자로 부족함이 전혀 없소. 오히려 넘친다고 할까."
'주원장의 뜻이겠지?'
홍수는 막는 게 아니라 구불구불 유도하여 기세를 죽여야 한다. 주원장은 강호의 넘치는 힘을 취합하여 관리해야 함을 인식했다.
광명좌사가 확실한 기회를 노렸으면 주원장은 반드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날도 잔월 아니었으면 광명좌사의 일격에 몸이 박살 났을지도 모른다.
"천하를 위한 일이니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술 몇 잔 마신 잔월은 다른 상으로 불려갔다. 그리고 소피를 핑계로 밖으로 나갔다.
"이 숙부 생각이랑 한 치 차이도 없습니다."
잔월은 아버지 사형제들을 사숙이 아닌 숙부로 칭했다. 월영고랑 허락을 받지 못해 화산 제자가 아닐 때부터 굳어진 호칭이기도 하고, 죽은 아버지와 형제처럼 지내던 사람들이어서 숙부라는 호칭이 훨씬 정감이 갔다.
"소림, 무당, 아미, 개방 모두 널 지지한다. 남궁가가 아무리 무당에서 멸세교 상대로 큰 희생을 치르고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너한테는 안 된다."
"남궁 노가주가 말을 꺼낼 거란 예측도 정확히 맞았습니다."
"너 아니면 남궁가 소가주인데, 당연히 남궁가 노가주가 입을 여는 게 모양새도 좋고 단합에도 좋겠지."
잔월과 독심호리는 무림맹 관련해 조금 더 얘기를 나눴다. 장문인 종리형이나 외총관 용호도인은 이런 일에 질색이어서 둘이 알아서 상의해야 했다.
"저기 육 사제와 칠 사매 아닌가요?"
연무장 한쪽 귀퉁이에서 도포를 입은 두 아이가 형의육합권을 수련하고 있었다.
"오늘 같이 들뜬 분위기에 차분히 무공을 수련할 수 있다니. 장래 화산을 빛낼 아이들이다."
칠 사매는 무공을 수련해 천희연을 물리치고 잔월을 빼앗을 생각에, 육 사제는 무공을 익혀 잔월을 이기고 칠 사매를 지킬 생각이었다는 걸 알았으면 평가를 달리했을 것이다.
날이 밝았다. 잠에서 깬 천희연은 자신이 옷 하나 걸치지 않은 것에 깜짝 놀랐다.
'맞다. 나 낭군이랑 혼인했지. 그리고.'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부군, 어서 깨세요."
천희연은 여전히 달게 자는 잔월을 흔들어 깨웠다.
"왜 그러시오."
"어서 나가서 하객들 배웅해야죠."
"점심까지 드시고 간다고 했소."
"그래도 어서 나가야 해요. 안 그럼 사람들이 웃을 거예요."
잔월은 왠지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었다.
"내가 늦잠 자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비웃을 일이 뭐 있소?"
"하객들은 모른단 말이에요. 그저 우리가 그것 때문에 안 나오는 줄 알아요."
"그것? 그게 뭐요?"
천희연은 모르쇠를 놓는 잔월 때문에 분이 치밀었다. 기성해 덕분에 약하게 흐르던 빙청옥결이 천희연의 의념에 따라 강하게 움직였다.
"어머, 이게 뭐야?"
너무 강해진 내공에 천희연이 깜짝 놀랐다. 그러다 자기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생각에 황급히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음양합이지. 난 순양 당신은 순음. 두 기운이 만나서 호택호제(互澤互濟)한 거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장군보 스승이 알려주던데. 기술도 많이 가르쳐 줬소."
천희연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주먹으로 잔월 가슴을 쾅쾅 때렸다.
천희연의 닦달을 못 이겨 일어난 잔월은 세수하고 옷을 차려입었다.
'혼인하면 여자는 변하고 남자는 변해야 한다는 게 이 말이었구나.'
혼인 전과 별반 변한 게 없는 잔월과 다르게, 천희연은 이런 모습도 있었나 싶은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잘 차려입은 잔월과 천희연이 밖으로 나가자 하객들이 환호했다. 혼례식 내내 천희연이 두꺼운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기에 하객 중 일부는 천희연을 처음 본다.
어제는 주로 여자들이 잔월 얼굴을 보며 애를 태웠다면 오늘은 남자들 차례였다.
여러 여자한테 에워싸여 입꼬리 내릴 겨를조차 없는 담두천과 달리 한자강 곁에는 당선령밖에 없었다.
주로 당선령이 이야기하고 한자강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당 소저처럼 이상한 여자도 있어서.'
한자강은 잔월이 가르친 대로 웬만한 이야기엔 고개를 끄덕여주고 입을 절대 열지 않았다. 그러면서 잔월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잔월이 말한 그대로다. 입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면 당 소저 아름다운 목소리를 실컷 들을 수 있다.'
축하만 하려고 온 하객들은 떠났다. 혼인 축하 외에도 무림맹 창건에 관해 상의하러 온 사람들은 여전히 화산에 남았다.
규모와 각 문파의 참여, 재정 지원과 제자 지원 등. 상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독심호리를 비롯한 각 문파 실무자들은 쩍하면 밤을 새워야 했다.
반면, 남궁가 노가주를 비롯한 거물들은 차를 마시고 무를 논하면서 한가롭게 지냈다.
"그런데 독고 소협은 수련을 전혀 안 하는 것 같소."
연무장을 어슬렁거리며 사제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희영과 희웅의 영웅통비권을 지적하는 잔월 모습에 남궁가 노가주가 입을 뗐다.
"무위의 경지요. 나도 오십이 되어서 겨우 든 경지고 독고경천도 서른이 가까워서 작은 실마리를 잡았소."
검선의 대답에 팽가 노가주가 질문했다.
"검선께서 생각하는 무위자연의 경지는 무엇이오? 파마다 하는 얘기가 달라서 알면 알수록 헷갈리오."
"무위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거요. 자연은 세상에 거스름이 없는 것이오."
"세상에 거스르는 일을 하고 싶다면 어떻게 되는 거요?"
검선이 허허롭게 웃었다. 십수 년 갇혀서 고생하며 망가졌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와 별호대로 신선의 풍모가 가득했다.
"세상에 거스를 수 있는 건 없소. 멸세교나 가짜 천마 역시 세상에 거스르는 게 아니오. 그것 역시 세상의 한 모습일 뿐이오."
"그럼 자연이란 말은 필요 없는 거 아니오?"
"세상은 하나가 아니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세상이 있소. 그리고 우리 모두 세상 하나씩 있소. 내가 생각하는 세상과 당신이 생각하는 세상이 다를 거요. 세상이 클수록 거스름이 적겠지. 멸세교나 가짜 천마는 큰 세상을 거스르진 않지만, 중원이라는 작은 세상이나 강호라는 더 작은 세상을 거스르고 있소."
"좋은 말씀 고맙소. 크게 깨달았소."
"내가 깨달은 게 아니오. 나도 들은 얘기요."
검선의 말에 산전수전 겪은 노강호들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검선이 말하는 도중 손을 들어 잔월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저 녀석이 화산에 도착해서 날 보자마자 이런 말을 했소."
검선의 말에 대화에 무관심하던 해국 스님마저 귀를 쫑긋 세웠다.
"우린 모든 걸 갖췄습니다. 고된 수행은 그저 우리 안에 있는 걸 찾아서 밖으로 꺼내는 것뿐입니다."
검선의 말에 모두 이마를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세상 모든 사람은 소림의 칠십이 절예를 갖고 있소. 다만 그걸 밖으로 끄집어내 보여주지 못할 뿐이오. 연이 닿은 사람들이 소림 제자가 되어 고된 수행으로 그 절예를 끄집어내는 것이오."
검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 여전히 이마 주름을 펴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공손평천은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 안에 있는 힘을 끄집어냈소. 그걸 이길 방법으로 잔월은 무위를 선택했소. 거스른 자와 따르는 자. 잔월은 무가 아닌 협으로 공손평천을 이기려 하오."
"아미타불."
해국 스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불호를 외쳤다.
"대협이오."
해국 스님의 말에 검선도 부지불식간에 깨달았다.
'저 녀석. 강호를 바른 세상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구나.'
바른 행동이 바른 결과로 이어짐을 증명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바른길을 따르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대협이다.'
陰陽閤 잔월은 총각이 아니게 되었고
無爲 무위의 수련을 시작했다
- 작가의말
대협은 여기서 두 가지 뜻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대협입니다. 대단한 인물에 대한 호칭이지요. 또 하나는 큰 협입니다.
대협이라는 평가는 잔월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잔월의 행동을 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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