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
1. 드래곤 회의.
소마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은 대륙 중앙에 있는 ‘이랑일랑’산이었다.
이랑일랑산은 주봉을 중심으로 총 12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저들이 다 한 번씩은 이랑일랑 산에서 사냥을 해봤을 텐데. 이때의 이랑일랑 산은 주봉의 외곽 쪽의 산으로 주봉은 산세가 험해 유저들의 사냥터로 적합하지 않았다. 이 산을 중심으로 5개의 나라가 국경을 맞대었고 중앙의 이 5개국이 모두 부유한 국가로 초창기 패자의시대 유저들이 처음 게임을 시작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을 시작으로 유저들은 소마 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지금은 거의 모든 곳에 유저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랑일랑 산은 패자의시대 유저들에게 대단히 익숙한 산이었는데, 그 익숙함과 다르게 안쪽의 주봉은 산세가 험해 초보 유저들이 가긴 힘들었고 특히 드래곤로드가 사는 산으로 알려져 금지된 지역 중 하나로 통했다. 패자의시대의 드래곤은 인간을 하찮게 보는 것으로 설정돼 있어 사람과 드래곤이 엮이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드래곤로드가 산다는 이랑일랑 산의 주봉.
검은색 천으로 된 옷 위로 금빛의 갑옷을 입은 남자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의 달리듯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 남자의 금빛 갑옷은 일반 기사들의 중갑과 달랐다. 금속으로 된 갑옷이었지만 장갑, 부츠, 벨트, 헬멧으로 된 세트였는데 신체를 보호하는 방어구로서의 기능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금빛이다 보니 눈에 잘 띄었고 검은색 천 옷 위에 착용한 거라 영 조화롭지가 않았다.
남자의 뒤에는 짙은 회색의 로브에 달린 모자로 얼굴을 덮어 버린 키 작은 사람이 졸졸 따랐다.
둘은 말없이 산을 오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콩코노메, 좀 쉬었다 가자.”
“네. 대장군님.”
검은 옷에 금빛 갑옷을 입은 남자는 ‘무쏘의뿔’. 로브를 입은 남자는 ‘콩코노메’였다. 이 둘은 주종관계였다.
무쏘의뿔은 햇빛 드는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금까지 꽤 산을 오른 탓에 나무 사이로 먼 곳까지 훤히 내려다보였다.
‘경치는 좋군.’
패자의시대 유일의 ‘그랜드마스터’이자 마계에서 ‘노술도아의 대장군’, ‘엘프의 스승’으로 불리는 무쏘의뿔이었지만 이랑일랑 산은 낯설었다. 소마 대륙의 거의 모든 곳을 다녀본 그였지만. 모두 다 그렇듯이 드래곤이 사는 지역은 알면서 들어가기 꺼렸다. 그 이유는 드래곤과 인간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드래곤은 인간을 하찮게 여기도록 설정돼 있어 그냥 죽이거나 괴롭히는 일도 꽤 있었다. 인간의 처지에선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였기에 무서워했고 일단 피하고 봤다.
“자, 그럼 슬슬 또 가볼까.”
다시금 이들의 산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 험준한 산에 돌로 튼튼하게 지어진 거대한 성이 한 채 버티고 있었다.
‘드래곤로드 아이어스의 레어···.’
성안에 들어서는 순간. 무쏘의뿔의 창에 몇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통 새로운 지역에 들어가게 되면 떠오르는 안내 메시지였다. 무쏘의뿔은 메시지를 무시하며 망설임 없이 성안으로 들어갔다.
“키긱 케켁 끼긱···.”
무쏘의뿔은 곧이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오고 있는 키가 작은 ‘고블린’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우리...주...인.....님이 널 기다....리.....신........”
더듬거리며 한마디 한 후 고블린이 뒤돌아 걸어갔다.
“음···.”
‘손님을 초대해놓고 대접이 영 시원찮은걸···.’
무쏘의뿔은 조금 마음이 상했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일주일 전 현 드래곤로드 아이어스가 사자를 보내 만나자며 자신의 레어로 초대한 탓인데. 현재 무쏘의뿔은 마계의 패자 ‘밧소뎀’의 오른팔로써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천계를 상대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어떻게 보면 마계를 비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대상이 드래곤로드라 어쩔 수 없이 온 건데. 주인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냄새나는 고블린 한 놈 보내 길 안내를 하니 기분이 상한 것이다.
드래곤로드 아이어스의 레어는 드래곤이 사는 집이라고 하기보다 어느 권세 있는 귀족의 성을 연상시키는 모습, 구조였다. 수많은 크고 작은 그림들로 벽이란 벽은 다 장식돼 있었고 심지어 천장까지 그림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조각상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기둥 하나도 그냥 밋밋한 게 없었다.
각종 장식과 부조로 화려한 듯하지만, 대상이 되는 미술품들이 대부분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원래 이 성. 드래곤로드의 레어는 전대의 드래곤로드 바실리카의 레어였다. 바실리카가 축출되면서 아이어스가 이어받은 것인데. 드래곤들은 남의 레어를 이어받는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이 성은 워낙 잘 만든. 거대한 레어였기에 아이어스가 바실리카의 뒤를 이어 집으로 삼은 것이다.
‘가디언들이 엄청나군.’
패자의시대의 드래곤 레어는 어느 곳이나 예외 없이 조각상들이 많았다. 그 조각상들은 모두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들로 평상시엔 조각상이었지만 침입자나, 예고 없는 손님들이 왔을 때. 그들이 마법진이나 기관을 잘못 건드리면 조각상들이 살아나 가디언의 임무를 하는 구조였다. 그런데 역시 드래곤로드의 레어답게 그림과 조각상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이들이 모두 살아서 움직인다면 현재의 무쏘의뿔이라도, 일반 고렙 유저들이 50인 공격대를 짜서 와도 공략이 힘들 것으로 보았다.
무쏘의뿔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말없이 고블린의 뒤를 따랐다. 성은 단순한 구조였다. 방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그저, 워낙 크다 보니 많이 걸어야 했다. 고블린을 따라 2층을 오르고 나서야 처음으로 어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인 줄 알았는데 길게 뻗은 복도에 좌우로 수많은 문이 있었다. 고블린은 이 곧은 길을 곧장 걸었다. 이놈은 자꾸 걸을 때마다 ‘킥긱 케긱 끼기긱···.’ 이상한 소리를 냈는데 성질 같아선 조용히 하라고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드래곤로드의 시종일지도 몰라 무쏘의뿔은 참았다.
드디어. 복도의 끝자락에 있는 평범해 보이는 문 앞에 고블린 놈이 멈춰섰다.
“..너......는... 여기...남....아라........”
고블린은 콩코노메는 남고 무쏘의뿔만 문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무쏘의뿔이 콩코노메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남도록 했다. 그리고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안쪽은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제일 먼저 시선을 끌었다. 그 하늘 밑에 거친 숨소리를 합창처럼 내뿜고 있는 거대한 존재들이 끝도 안 보일 정도로 모여 있었다. 별빛을 받아 빛나는 비늘을 가진, 달보다 더 밝은 안광을 내뿜는 드래곤들의 시선이 무쏘의뿔에게 모여 있었다.
“으음···.”
문 아래쪽으로 계단이 있었다. 무쏘의뿔이 계단을 밟고 내려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무쏘의뿔이 가는 길을 따라 좌우에 늘어선 드래곤들이 고개를 돌려가며 쏘아보고 있었다. 무쏘의뿔은 문득 과거에 이번과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자신이 대마왕이 사는 ‘쥴레도르’라는 마계의 도시에 처음 갔을 때 그곳에 사는 마족들이 지금처럼 길가에 서서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던 일이 있었다.
‘패자의시대는 설정이 비슷하군.’
보통 유저였다면 쫄았을 테지만 무쏘의뿔은 과거 비슷한 경험을 했던 터라 나름대로 여유가 있었다. 마치 드래곤 숲을 걷는 것 같았다. 드래곤들로 인해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들이 숨 쉴 때마다 내뿜는 입김이 무쏘의뿔을 덮쳤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멀리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무쏘의뿔이 알아서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하나, 의자 하나.
무쏘의뿔 맞은편에 흰색의 거대한 드래곤이 있었다. 현 드래곤로드 아이어스. 화이트 드래곤이었다.
아이어스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위대한 인간이여 어서 와라. 짐의 초대에 응해주어 감사하다. 보시다시피 이 자리는 우리 드래곤들이 동면을 마치고 갖는 회합의 자리다. 그대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대를 통해 부탁할 것이 있어 초대했노라.”
패자의시대의 드래곤들은 1년 안팎의 동면과 3년 안팎의 주기로 활동했다. 나이든 드래곤일수록 동면의 시간이 길었고 활동 시기는 대부분 비슷했다.
무쏘의뿔은 바쁜 사람 오라고 하는 이번 초대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오는 동안 내내, 레어에 들어와서. 그리고 지금의 상황까지 불만이 계속 쌓이고 있었다. 지가 드래곤로드라고 사람을 낮춰보는 게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요?”
마음속의 불만이 말투에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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