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10명의 아내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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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직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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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2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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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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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끝을 향해서

DUMMY

정령왕의 힘에 대해 설명한 적 있던가?

세계의 4대의 원소 그 자체인 존재들.

만약 그 근원적인 힘을 맘대로 쓸 수 있었다면, 인간계는 이미 소멸되었을 거라 많은 정령사들이 말하곤 했다.


‘워낙 변덕이 심한 녀석들이니까.’


하지만 이곳은 정령계가 아니지.

덕분에 그들의 힘은 매우 제약적으로만 발현되었다.

역사적으로 그들과 계약할 수 있는 정령사가 매우 적었기도 했고.


“폐하, 이쪽입니다!”


쿵!


왕궁이 흔들린다.

창문으로 저 멀리 불길이 치솟는게 보였다.


“······.”


나는 복도를 걸으며 레일리아를 바라봤다.

계속된 폭발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에서 보기엔 그렇게 보인다.

조금 얼굴이 굳어있긴 했지만 그 정도면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은······.”


레일리아는 시종장에게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문다.

그녀가 바보 같은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폐하, 그들은 대부분 화재 진화를 위해 시내로 나가있습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

에델룬에 사상 초유의 화재가 일어나고, 그 사이 왕궁에 침입자가 발생하다니.


“너무 뻔한 수법이지만··· 보기 좋게 당했어.”


레일리아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렇게 혼잣말했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종장의 물음에 레일리아가 그를 흘겨본다.


“네가 직접 그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 전력의 대부분은 화재를 진압하러 궁 밖으로 나갔다고.”

“아.”


시종장도 바보는 아닐 텐데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 아무래도 꽤나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긴, 에델룬이 이렇게 당하는 건 역사상 몇 번 없는 일이지.’


너무도 평화로웠던 나라.

그 달콤하고도 지루한 일상이 그들을 무디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근위대가 있습니다.”

“절반은 역시 화재에서 시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내가 직접 파견시켰다.”

“병사들은······.”

“몰려오는 제국군을 막기 위해 진군시켰지.”

“모, 모든 마법사와 정령사가 다 화재 현장에 나간 건 아닙니다. 폐하를 지키기엔 충분합니다.”


남겨진 이들 중에 고위급은 얼마 없다는 사실을, 나는 굳이 상기시켜주지 않았다.

뭐, 말해주지 않아도 모두 아는 사실.


그 절망적인 상황 때문일까, 우리는 왕궁의 복도를 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최우선!


“폐하!”


그때, 복도 너머로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 왕궁에 존재하는 최고의 전력 말이다.


“발포트 경.”


근위대장 발포트가 근위기사들을 대동하고 황급히 레일리아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보는 대로.”


여왕의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발포트가 작게 웃는다.


“이제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에 시종장도 그렇고 레일리아도 굳어진 표정을 푼다.

근위대장만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는 표정이다.


‘난 안심 못하겠는데.’


오직 나만이 좀 삐딱한 시선으로 발포트를 바라봤다.

레일리아는 직접 전장에 나가는 일이 드무니 눈치 챌 수 없다 해도, 발포트 마저 눈치 채지 못한 건가?


“이 자에게도 검을 넘겨줘라.”


발포트가 앞장서서 밖으로 대피하기 위해 다급히 이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녀석이 그렇게 말했다.

발포트의 말에 기사 한명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내게 칼을 넘긴다.


“폐하를 지켜드려야 한다.”


나는 묵묵히 칼을 받아들었다.

낌새를 보아하니, 발포트도 현 사안의 심각성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발포트 경?”


갑작스러운 행동에 시종장이 의문을 표한다.

발포트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그의 부하들을 바라봤다.


“너희들은 폐하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 궁을 빠져나가라.”

“발포트, 뭘 하려는 것이냐.”

“폐하.”


발포트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

어딘가 각오를 했다는 듯한 결연한 표정까지.


“상대는 적어도 정령왕에 해당하는 전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제국에서 화염의 정령왕과 계약한 자가 나타났거나, 아니면 모든 상급 정령사와 마법사를 이 에델룬에 침투시켰겠지요.”


내가 갑자기 정령왕의 힘을 설명한 이유.

나도 발포트와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프리트가 누구와 계약을 했을 리가 없는데.’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누군가 떠올랐다.

아주 안 좋은 예감이 드는 사람 말이다.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폐하는 어서 이곳을 탈출하셔야 합니다.”

“발포트!”

“어차피 이제 지하로 가는 통로는 이 길뿐입니다. 안심하고 어서 가시길.”


그 말에 모두가 침묵하니 그가 덧붙였다.


“폐하가 죽으면 이 나라는 끝입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레일리아는 차마 그를 말리지 못한다.

하지만.


‘정말로 노리는 게 레일리아일까······.’


만약 제국의 상급 정령사와 마법사가 모두 몰려온 것이라면 틀림없지만.

아니라면 지금 내가 그녀와 같이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와 같이 빨리 탈출해야 하는 건가?


“폐하!”


지하실로 가는 갈림길 너머로 여러 대신들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 뒤로 허름한 차람의 여자와, 웃통을 벗고 있는 한 구릿빛 남자도 있다.

남자가 손을 뻗는다.


화르륵-


갑자기 나타난 불이 대신들을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우리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좋아, 안내는 제대로 해줬군.”


어찌나 강력한 화염이란 말인가.

사람이 재가 되어 흔적도 남지 않았다.

복도가 깔끔하게 정리되고 활활 타오르니,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통로 같았다.


“폐하! 어서 가십시오!”


발포트의 말에 번뜩 깨어난 레일리아와 가신들.

녀석들이 황급히 밑으로 내려가는 작은 계단을 보았다.

지하실에서 왕실의 비밀 통로로.

그리고 그 너머엔 렘른 강이 나오고 배를 타면 쉽게 다른 영지로 도망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일?”

“폐하! 꾸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카일!”


나를 부르는 레일리아의 목소리.

나는 잠시 멍하니 복도를 바라보다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입을 연다.


“어서가.”

“뭐?”

“저들이 노리는 건··· 아니다. 기사들. 뭐하고 있지? 어서 폐하를 모시지 않고.”


내 말에 한 기사가 덥석 레일리아를 들쳐 업었다.

작은 체구의 그녀라 그런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무의미하다.


“이거 놔라!”

“죄송합니다, 폐하.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더욱 더 깊은 계단으로.

레일리아가 이를 악물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게 보였다.


“겨우 2명뿐인가? 녀석들이 흩어져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최악의 사태군.”


고개를 돌리니 발포트가 검을 다잡고 있다. 여유가 느껴졌지만, 그의 목에 땀이 조금 흐르고 있었다.


‘그도 엄청난 검사인건 틀림이 없지만······.’


나이도 나이고, 상대가 좋지 못하다.


“로라.”


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남녀를 바라봤다. 가장 인상적인 외모를 가진 건 활활 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가진 남자였지만, 내 눈은 오직 그녀에게만 고정되었다.

고된 여정인 듯 지쳐 보이는 로라.

마찬가지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아는 사인가?”


발포트가 눈을 찌푸렸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가볍게 답했다.


“뭐, 그렇긴 한데.”


그 둘이 뚜벅뚜벅 다가온다.

아직 거리는 있었지만, 벌써부터 손에 땀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긴장하는 거 보면, 그냥 도망가지 그랬나.”

“내가 도망갔으면, 레일리아도 보내주지 않았을 거니까. 가만히 있으쇼.”


여왕의 이름을 그냥 불러서 그럴까, 발포트가 나를 한번 흘겨보다 피식 웃는다.


“여전히 맘에 안 들지만, 웃기는 녀석이군.”

“내가 그쪽 이길 뻔한 거 기억 안나나? 여기 남아준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텐데.”

“그건··· 됐다. 그나저나 폐하가 도망가지 못했을 거라니,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긴.


“표적이 그녀가 아니란 소리지!”


나는 그 말을 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후욱-


허공에서 거대한 불길이 우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나를 노린 게 아니라 발포트를 노린 공격이었다.


“하압!”


발포트의 검이 화염을 찢어버린다.

실비아의 검과 마찬가지,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난 근위대장을 위한 마검이었다.


“이프리트, 네가 상대해.”


명령조로 말하는 로라.

그 모습을 바라본 발포트가 기가찬 듯 웃었다.


“하, 이프리트라! 책에서만 들어봤던 이름이군!”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로라와 이프리트.

이프리트가 로라의 말에 가볍게 끄덕이며 발포트를 향해 쇄도했다.


“책을 읽을 것 같은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이 왕궁은 내게 지루해서 말이야!”


발포트가 야수처럼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그 호승심에 이프리트도 웃었다.


‘난리 났군.’


나는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움.”


이프리트의 화염이 일으키는 뜨거운 열기.

살갗에 닿지는 않았지만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화상을 입을 거 같다.


“탈출로를 만들어!”


노움이 주변의 돌을 이용해 순식간에 벽에 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화염이 덮쳤다.


“어딜 한눈파는 것이냐!”


이프리트가 나선 것이다. 그 모습에 발포트가 분노를 담아 칼을 휘두르는 게 보였다.


“크룩 크룩.”


묵묵히 말이 없던 노움이 당황해 신음을 내뱉는다.

녀석은 아무래도 정령왕을 상대하는 게 상당히 거북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상급 정령한테도 거의 소멸당할 뻔했는데, 이프리트한테 맞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녀석이 몸을 움츠리고 있으니 퇴로가 모두 막혀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


그 목소리에 몸이 굳는다.

되살아나는 여러 기억.

왠지 내 몸에 밧줄이 묶여있는 듯한 환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로라.”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보인다.

내 첫 번째 아내 로라.

그 일이 있고 몇 주 지나지 않았는데, 어쩐지 그녀는 더 성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엘리아드에게서··· 풀려났구나.”


그런 내말에 그녀가 살짝 뒤를 돌아봤다.

발포트의 호쾌한 검에도 웃고만 있는 이프리트가 보였다.


“기억나? 이 반지.”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약지에 껴있는 금반지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에 비쳐져 더욱 반짝였다.


‘역시 그거였구나.’


이프리트가 내게 직접 건네줬던 반지!

나와의 계약을 운운하며 내밀었던 그 아티팩트가, 결국 이 사단을 낸 것이다.

뼈아픈 실수였지만, 나는 일단 그저 그 사실만을 머리에 담아두기로 했다.

저 반지가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지를.


“우리의 사랑이 결국 결실을 맺게 된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광기가 맴도는, 내가 가장 최근에 본 로라의 얼굴이었다.


“······.”


내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침만 꿀꺽 삼키고 있으니, 갑자기 로라가 안색을 바꿨다.

광기는 사라지고 어딘가 어둡고 쓸쓸해 보인다.


“···라고 한때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깨달았어-하고 그녀가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로라, 괜찮아?”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니 눈이 마주쳤다.

주변에 타오르는 화염 때문일까, 그녀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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