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왕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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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작품등록일 :
2019.05.04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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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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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려오는 먹구름 (4)

DUMMY

수양은 사정전 (思政殿)에 몸소 나아가 건주위 이만주가 보낸 이들을 접견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이만주의 아들 이징거 (李澄巨) 외 야인 십여 명이 더 부복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만주는 때마다 아들들과 심복들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며 근황을 아뢰곤 했는데, 이번에는 토산물과 더불어 한 가지 소식을 더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수양은 이징거가 거듭 버티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자신의 심복 권람과 한명회만을 남기고 나머지 신하들은 물렸다. 물론 사관 두 사람은 남아 있었다.


이징거는 차분히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바를 설명했다. 다 듣고 난 수양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는 말이지.”


“그러하옵니다.”


이징거가 공손히 말했다. 수양은 희떠운 눈으로 자신 앞에 줄지어 부복하고 있는 야인들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눈길이 마주칠까 봐 눈을 내리깔고 있는 이들을 볼 때마다 수양은 마음이 흡족했다. 그렇지, 바로 이런 게 힘이요 권력이 아닌가. 수양은 자신 앞에 엎드린 자들을 볼 때마다 권력의 맛을 느끼곤 했다. 이럴 때만큼은 요즘 들어 갈수록 짜증을 돋구는 가려움증도 얼마간 가시는 기분이었다.


“알겠네. 그대는 잠시 물러가 객사에서 쉬고 있게······ 내 그대들과 그대의 부친에게도 후히 답례할 터인즉.”


“감사하옵니다.”


이징거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야인들이 물러나자 수양은 자신의 옆에 있던 권람과 한명회를 돌아본다. 권람은 그 사이 좌찬성 (左贊成)이 되어 있었고 한명회는 그 사이 병조 판서를 맡아보고 있었다. 수양이 다소 볼멘 소리로 물었다.


“양정이가 어찌하여 치계하지 않았을꼬?”


건주위의 사정은 평안도 도절제사와 함길도 도절제사 모두가 주의 깊게 보게 되어 있었다. 이만주가 말한 대로 건주위 관내 모 부락에서 철기를 사사로이 만들면서 이웃 부락에게도 공급한다는 것은 절대로 작은 일이 아니었다. 개국 초부터 조선은 사대교린 (事大交隣) 정책을 펼쳐 야인들에 대해서는 관시를 열어 통교하는 한편 반항하는 자들은 변경의 우환거리가 되지 않도록 군사를 내어 토벌을 하기도 했다. 야인들과 친하게 지내되 그들이 지나치게 강성해지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 핵심이었으니, 전략 물자인 철에 대해서는 취급이 엄격했다.


수양의 질문을 받은 권람과 한명회는 시선을 마주쳤다. 양정이 이런 중대사를 미리 알고 중앙에 치계하지 못한 것은 변경 수령으로서 임무를 방기한 실로 중대한 죄책이 아닐 수 없었으니 논죄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수양의 오랜 심복인 그들 두 사람은 수양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양정이 미욱한 이는 아니올시다.”


“그렇습니다. 필시 사정이 있었겠지요.”


권람이 먼저 말한 데 이어 한명회도 동조했다. 그 말에 수양은 턱을 문지를 뿐이었다. 한명회는 권람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졌고, 권람도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본뜻이 양정이를 마냥 죄 주려는 데 있지 아니하지.’


성리학적 질서를 표방하는 조선에서 조카로부터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왕위를 빼앗은 수양의 입지는 모호했다. 때문에 수양은 자신의 오랜 심복들에게는 워낙에도 각별했으니, 웬만한 잘못은 넘겼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비행을 물고 늘어지는 이들을 좋지 않게 보았다. 군신의 관계라기보다도 저잣거리 건달 두목과 그 심복간의 관계로 보면 정확하겠지, 한명회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정이라. 허긴 사정이 있었겠지. 야인 동향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도 사정이 있을 것이고, 내 홍위를 찾으라 특별히 명을 했는데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데에도 사정이 있을 테지. 무릇 왕이란 관대해야만 하지. 아니그런가.”


“망극하옵나이다. 전하의 인덕이 하늘에 높도소이다.”


수양의 말에 권람과 한명회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기실 수양의 말만 놓고 따진다면 양정은 벼슬을 떼이고 정배살이를 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수양의 목소리에는 양정을 힐난하는 느낌은 얼마간 있었으되 그렇게까지 언짢아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런 죄책을 저지른 자가 양정이나 계유년 공신이 아니고 다른 자였다면 필경 불벼락이 떨어졌을 것이다. 계유정난 때 같이한 수양의 심복이니까 이럴 수 있는 것이다. 수양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나저나······ 야인들이라고 해봐야 기백 명 정도가 강을 건너 노략을 해오는 정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자들이 쇠붙이를 따로 고아내기 시작했다 한들 그들 정도면 며칠이면 박살낼 수 있을 터. 병판의 생각은 어떠한고?”


수양으 질문에 한명회가 바로 답했다.


“전하의 탁견대로, 이만주의 말을 들어보면 아직은 마을 하나 정도에서 쇠를 고아내는 정도이니 당장의 문제는 아니되오리다. 허나 두고보면 우환거리가 될 것이오이다.”


“우환거리가 된다, 어째서?”


“야인들은 아국과 대명으로부터 쇠붙이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며 아조를 섬겨 오는 터입니다. 이제 사사로이 쇠를 고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더 이상 아국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이오며, 나아가서는 대들겠다는 말이 아니오이까.”


그 말에 수양이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허리가 잘 휘어지지 않는 놈들은 물푸레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들겨 주어야 되지.”


“지당하시오이다.”


권람이 대답하자 수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말이야······. 이만주의 말대로라면 야인들이 쇠를 고아낸 것이 일 년째 되었다고 하지.”


“그러하옵니다.”


“이만주 정도되는 자가 그것을 진작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가?”


“과연 실로 수상한 일이로소이다.”


“실로 그러하나이다.”


권람과 한명회는 거듭 장단을 맞추었다. 한명회는 수양의 눈치를 살펴 덧붙였다.


“전하께오서 우려하시는 바 이만주도 딴뜻이 있지 않나, 살펴보겠나이다.”


“어 응당 그리해야지.”


수양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세 사람 사이에서는 말이 끊겼다. 그 때 권람이 한명회를 슥 쳐다보았다. 아직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는 뜻이다. 한명회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짐작하셨겠으나 이 대장장이의 배후를 캐는 것도 중요하오리다. 그간 야인들은 쇠붙이를 스스로 고아내지 못하였나이다. 하온데 이제야.”


“흐음.”


한명회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오랫동안 경험을 통해 수양 앞에서는 그에게 먼저 지적을 하기보다는 수양이 먼저 생각해서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다. 만약 기다려도 수양이 미처 생각을 해내지 못하는 중요한 사안이 있다면, 직접 말하기보다 운을 띄워주기만 해서 수양이 직접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편이 더 좋았다.


“맞어······. 과인도 수상하게 생각하던 참인데 역시 경은 나의 장자방이야.”


수양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누구일꼬.”


“이만주는 조선인 출신이라고 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명회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이 시점에서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수양이 용상을 두드리다가 순간 양미간을 좁혔다.


“가만있거라······. 그러고보니 홍위가.”


수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뒤에 선 사관을 흘낏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뜻이 잘 전달되었음을 안 한명회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태가 사태이오니, 평안도와 함길도에 도체찰사 (都體察使)를 새로 뽑아 보내는 편이 나으오리다.”


“그래, 그래야지. 아니 그래도 그쪽 변방에 올량합 (兀良哈)과 올적합 (兀狄哈)이 서로 원수 되어 싸운 지 오래라지. 내 특히 믿는 이를 보내야 했어.”


한명회의 말에 수양도 동의했다.


“허나 누구를 보낸다?”


“우상 대감이 북방에 도체찰사로 여러 해 파견나갔습니다. 그라면 능히 맡길 만 합니다.”


“범옹 (泛翁)이라면 믿고 맡길 만 하지.”


범옹이란 우의정 자리에 있는 신숙주 (申叔舟)를 말함이다. 그는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본디 문신이나 성품이 대범하고 호탕하며 과단성 있는 준재로 평판이 높았다. 동료 학사들 중 성삼문이나 박팽년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스러져 갔던 때에도 그는 수양의 사람으로 남아 있었고, 수양은 그를 특히 아끼는 바였다.


“내 그를 평안도와 황해도를 더불어 보도록 해야겠어.”


“하오시면, 함길도는 어찌 하리이까.”


권람의 물음에 수양은 대답 대신 한명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함길도엔 자네가 가 주어야겠어. 가서 양정이를 좀 단속하게. 범옹도 사람됨이 남에게 눌릴 만하지는 않지만, 공신 급수로 보면 양정이와 동급이야. 자네라면 양정이도 뭐라고 하지 못할 터. 자네는 내 오른팔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 함길도와 강원도의 군권을 자네에게 주겠네.”


한명회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박 비재하옵니다만 삼가 받들겠나이다.”


“내 자네라면 일처리를 잘 할 것으로 믿네.”


수양이 다짐을 주었다. 그 때 권람이 사관을 흘끗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전하께서 흉중에 생각하는 대로라면, 이를 밝혀야 하겠습니까?”


권람의 말은 노산군 홍위가 살아 있어서 야인들에게 철을 전래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공공연히 밝혀야 하느냐는 말이다. 그 말에 수양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한명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민심이 소란스러울 수 있으니,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시는 것이 어떠하겠나이까.”


“아니다.”


수양의 말에 권람은 눈썹을 치켜 떴고, 한명회는 눈살을 찌푸렸다.


“진상이 밝혀진다면, 홍위가 살아남아 야인 땅으로 밀행해서 그들과 내통했기에 처단했다고 공표할 것이니라.”


“전하, 그것은······ 다시 생각해보심이 어떠하오실런지요······.”


권람이 말을 더듬었다. 한명회도 동감이었다. 야인들에게 쇠붙이를 퍼뜨린 것이 노산군 홍위가 맞다고 해도 굳이 곧이곧대로 발표할 것은 없었다.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수양의 뜻은 완강했다.


“과인이 왕위에 오른 지도 수 년이 되어 간다. 이제 와서 도망자에 불과한 홍위를 두려워한다면 내 무엇이 된단 말이냐? 이 김에 홍위의 망령을 뿌리 뽑을 것이다.”


권람과 한명회는 침묵을 지켰다.


“또한, 아직까지도 홍위에 대한 얼빠진 충심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경고가 될 것이다. 야인과 밀통하여 그들에게 철기를 넘겨주었다는 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 아니더냐.”


“그것은······ 과연 그러하옵니다.”


권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양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내 이번 기회에 홍위가 살아남더라도 두 번 다시는 조선 땅에서 그애의 이름이 긍정적으로 재론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고 망가뜨릴 것이다. 두 번 다시, 내 심기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말이다.”


수양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만 가 보게.”


권람이와 한명회가 물러가자 수양은 주위를 물리치고 사정전 전각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근 2년간 잊는 듯하였으나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잊지 못하고 거칠거칠하게 남아 있었던 조카가 다시 수면 위로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수양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내게서 사라질 양이라면 두 번 다시 내 눈과 귀에 뜨이지 말았어야 했거늘······. 내 그러했다면 너를 과거 속에 머무른 한갓 기억으로만 남도록 하였겠거늘. 그러나 이제 다시 나타난 이상, 내 너를 철저히 부수지 않고는 넘어가지 않겠느니라.’


수양은 옷자락을 털고는 바로 성큼걸음으로 사정전을 떠났다. 강녕전으로 돌아온 그는 곰곰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는 막바로 외쳤다.


“내관은 게 있느냐? 속히 우의정을 불러오도록 하라.”


부름을 받은 우의정 신숙주가 황황히 들어오자 수양은 그가 인사할 틈도 없이 바로 말했다.


“경이 한동안 평안도와 황해도 양 도의 도체찰사로 가 주어야겠네.”


신숙주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북변에 변고가 있었습니까.”


“그렇지. 내 경밖에 믿을 자가 없어.”


신숙주는 고개를 조아렸다.


“하명하시오소서.”


“노산군에 관련되었을지 모를 일일세.”


그 말에 신숙주의 몸이 굳었다. 잠시 전각 안에는 정적이 내리깔렸다. 신숙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노산군······ 말씀이시옵니까.”


신숙주의 표정은 꽤나 복잡했다. 호방하고 담대한 성품이라지만 영월 땅에서 종적을 감춘 상왕에 대해서만큼은 그는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아직은 확실치 아니하지만, 야인들에게 사사로이 철을 전래한 자가 있다고 하네.”


수양은 이징거의 말을 옮겼다. 다 듣고 난 신숙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노산군이 연루되었다는 증자는 아직 없지 아니하옵니까.”


수양은 얼음장 같은 시선을 던졌다.


“경은 과인의 생각을 틀렸다 보는 겐가.”


신숙주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럴 리가 있겠나이까.”


“노산군은 이미 이전 금산의 역모죄에 연루되어 있는 대역죄인이다. 물론 내 혈육의 정리와 상왕의 예를 살펴 죄를 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나, 야인과 밀통한 죄는 매우 크다. 경이 함길도에서 돌아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네만, 그대가 직접 평안도 도체찰사로 가 주어야 하는 사안이라고 보네. 조만간 군을 이끌어야 할 것인즉.”


수양은 평안도와 함길도 양 도의 군을 몰아 토벌대를 꾸릴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신숙주는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왕명을 받들었사오니 어찌 나태함이 있으리오이까.”


“믿겠네.”


수양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과인이 경을 부른 데는 한 가지가 더 있네. 일전 영천부원군 (鈴川府院君)이 노산군비 송씨를 청한 적이 있었다는데, 경도 아는가.”


홍위의 장인 여량부원군 (礪良府院君) 송현수 (宋玹壽)가 당시 금산대군의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죽음을 면키 어려웠을 때, 수양의 이복 매부격인 영천부원군 윤사로 (尹師路)는 당시의 절색으로 소문난 홍위의 부인 송씨를 받기를 원한 적이 있었다. 신숙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신도 소문은 들었나이다. 허나,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오이까.”


아무리 대역죄인의 딸이라 해도 전왕의 아내였다. 수양은 차갑게 웃었다.


“과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특별히 아직까지 송현수의 목숨을 붙여놓았던 것이고, 노산군비도 그대로 살게 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홍위가 진실로 야인에게 쇠붙이를 구해다 준 일에 연루되었다면 이는 고금에 둘도 없는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 아내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신숙주는 입을 다물었다.


“하오시면······?”


수양은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북도 땅은 즐거움이 적은 곳이지. 자네가 송씨를 취하도록 하게. 노산군이 만약 잡히게 된다면 그 또한 벌이 되겠지.”


호방한 신숙주조차도 수양의 말에는 충격을 받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수양의 그 말은 아무리 노산군 홍위가 야인과 밀통하는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너무나도 상식 외의 명령이었다. 수양 본인에게는 인륜을 저버린 짓이 될 것이고 신숙주 자신에게도 한때 군신지의를 맺었던 이에게는 못할 짓이 되었다.


“전하.”


“이는 대역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일이다. 재론치 말게.”


수양의 말에는 망설임이나 죄의식은 전연 없었다. 신숙주는 할 말을 잃었다. 조카에 대한 적개심, 혹은 불안감이 그 정도였는가······.


“소신, 노산군비는 정절이 높은 이로 알고 있습니다만······.”


“노산군비의 아비되는 대역죄인 송현수는 아직 목숨을 붙어 두었지 않은가. 제아무리 지아비에 대한 절개가 높은 열녀라 해도, 아비되는 자를 생각한다면 허튼 생각은 못할 것이다.”


수양의 말에 신숙주는 다시 한 번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강녕전을 나선 신숙주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이 신숙주가 천하에 다시 없는 견자 (犬者)로 이름을 남기겠구나.”


작가의말

p.s. 단종비 송씨를 작중에 거론된 것처럼 윤사로나 혹은 신숙주 본인같이 세조의 공신들이 탐냈다더라는 이야기가 있긴 합니다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가령 신숙주가 송씨의 자색을 보고 세조에게 청했다는 이야기는 훨씬 후대의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고 하지요. 윤사로의 경우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기록에 ‘송현수의 딸’을 원했다고는 하나 그것이 송씨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설을 약간 차용해서 전개를 해 봅니다. 원래 송씨는 영월 탈출에서 죽는 것으로 처리할까 하다가 이런 식으로 재등장시키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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