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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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석
작품등록일 :
2019.05.1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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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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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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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질은 더디게 1

DUMMY

1


아차산 홍계당.


저고리 안으로 비치는 팔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어떻게든 진정하기 위해 마땅히 기댈 곳을 찾았지만, 팔 하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절실히 깨달을 뿐이었다.


필시 공포로부터 비롯된 증상이었다.


혜연을 이렇게 만든 원인은 꿈이었다. 그 내용이 오후에 있었던 사태조차 의식하지 못할 만큼 가히 충격적이었다.


“젠장······.”


미래가 실로 그러하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후로 그녀는 출구 없는 고뇌에 시달리고 있었다.


반드시 일어나는 일을 예측한다. 혜연은 이 비상한 기운으로 지금껏 위기를 피해 왔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필요할 때는 이따금씩 전국 곳곳에서 점을 치기도 했으나, 같은 오귀를 대상으로는 절대 남용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선이었다.


앞날을 미리 아는 감상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점괘가 무슨 소용인가. 비극적인 말로의 당사자에게는 오직 절망만이 남았다.


때문에 그녀는 늘 스스로를 미워했다.


오귀의 피와 전혀 상관없는 이 신기 때문에 상시 목숨이 위험한 것은 물론이요, 동기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외톨이가 되어 갔다.


누가 가까워지고 싶겠는가. 상대는 언제 자신의 빈틈을 파고들지 모르는 심안(心眼)의 소유자였다. 딱히 나쁜 감정이 없더라도 웬만해서는 다들 멀리하고 싶을 터였다.


물론 다소 떨어지는 사교성 탓에 혼자가 된 감도 있었다. 특별히 정을 갈구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수백 년 이상을 이처럼 살다 보면, 어떤 강철 심장이라도 녹슬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자제하려 애썼다. 가끔씩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그마저도 힘들었지만, 내용 또한 철저하게 함구했다.


“너는 알지? 그렇지?”

“왜 말 안 했어! 다 너 때문이야!!!”


하지만 그 노력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꺼림칙하게 볼 때는 언제고, 문제가 생기면 곧장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는 방관자 행세를 했다. 무책임하게 보이더라도, 함부로 간섭하다 또 다른 적을 만드는 것보다는 백 번 나았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차원이 달랐다.


마냥 모른 체할 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발설해도, 혼자만 알아도, 일이 생기면 절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했다.


끼익—.


때마침 신당(神堂)의 문이 열렸다. 그녀는 즉시 고개를 들었다.


초대한 적이 없는 손님이었다.


혜연은 매서운 눈빛으로 안내 차 먼저 들어 온 권속을 노려보았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그게······.”


보통 때였다면 그다지 큰 실수는 아니었다. 단지 오늘따라 그녀가 예민한 탓이었다.


“내가 고집부렸어. 죄 없는 애 몰아붙이지 말고,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줘.”


쪽마루로 올라선 신장이 어지간한 남성들 못지않게 컸다. 거기다 상징이나 다름없는 플로피까지 더하니, 그 정체를 유추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 이상으로 자유로운 영혼이라 만난 지 꽤 되었어도 그러했다.


“네가 여기는 웬일이야.”


이 난데없는 방문자에게는 '주거'가 없었다. 정착하는 삶이 영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언젠가부터 거처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우연한 계기로 노숙의 장점을 깨달은 점도 한몫했다. 지역 공무원보다 노숙자들에게 행방을 수소문하는 편이 더 빠를 정도였다.


그런 생활이 어머니의 가출에 얼마나 강한 영향을 끼쳤을지는 지금도 모를 일이었다.


소집에 응하는 확률도 당연히 바닥이었다.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이 아니면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참석 자체가 의무는 아니었다. 다만 상당히 이기적이라는 인상은 지우기가 힘들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도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넘겨야 했다. 규모가 다소 막대하기는 해도, 내내 외면하는 모습이 평소의 그 행실에 더 어울렸다.


그녀의 방문이 보다 이례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네 의견이 듣고 싶어서.”


지민은 능청스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모자를 살포시 옆으로 내려놓았다.


“할 말 없어.”

“너도 참 대단해.”

“따지러 왔다면 날을 잘못 잡았어. 오늘 일을 따로 생각하기에는 내가 지금······.”

“별 일은 없었어?”


혜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 마디 탓이었다.


친분은 당연히 전무했다. 동기들이 자신을 기피하는 것처럼, 혜연 역시 마주 앉은 이에 대해 상당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지극히 이기적이면서 냉정한 한량.


그런데 방금 전의 말이 아주 잠시나마 그 생각을 멀리 떨어뜨렸다.


하지만 아무런 목적 없이 이곳을 찾아 올 상대가 아니었다. 무턱대고 기대를 품으면 위험했다.


때문에 혜연은 오히려 더 삐딱하게 굴었다. 모름지기 본색은 첨예한 갈등 속에서 곧잘 정체를 드러내는 법이었다.


“죽을 때라도 됐어? 답지 않게 오지랖은.”

“그래야 일이 순조로울 거 아니야.”


한껏 날 세운 반응에도 지민은 여유롭게 대응했다. 의도가 다분한 걱정이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어때? 이 다음은?”

“됐어. 알아도 말할 생각 없으니까, 괜히 캐묻지 마.”

“다들 유난이야. 내 개인적인 생각은 그래. 물론 큰일이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어째 방문의 목적이 한낱 담소에서 그치고 있었다.


“아, 그래도 법안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대응하려고.”


지민에게 등록 체계는 거의 족쇄였다.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신분이 간단히 특정되며, 감시자들의 시선 또한 흔히 도사릴 터였다.


“어쩔 건데. 댁 앞에서 시위라도 할 거야?”

“만나 뵈야지. 그게 제일 빠르지 않겠어?”


혜연은 내심 놀랐다. 해결할 의지만 있다면 이렇게도 행동할 수 있는 동기였나.


물론 자신의 사정에 한해서겠다. 하지만 그 모습 자체도 부러웠다. 은둔 생활로 조용히 허송세월을 보내 온 점술가와는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그 순간, 때 아닌 손님과 이야기하느라 애써 미루어 두었던 불안감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선택은 불가피했다. 그렇다면 단 한 명이라도 힘 될 만한 이가 옆에 있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사실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동기는 없었다. 그토록 싫어하는 상황에 끌어들이는 꼴이 되겠으나, 오히려 한 발 앞서는 것이 훨씬 이득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튄 불똥 앞에서 지민은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이 참에 그 반응을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혜연의 얼굴 위로 조금씩 그 고민이 드러났다.


“뭐야, 정말 무슨 일 있어?”


제아무리 이기적이라지만, 잔뜩 어두워진 동기의 낯빛마저 외면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민은 곧장 까닭을 물었다. 그러나 혜연은 쉽사리 터놓지 못하고 내내 입술만 물었다.


그 모습에서 사안의 무게가 절로 느껴졌다. 지민은 후회했다. 조금 전의 오지랖으로 행여 괜한 사연에 휩쓸리지는 않을까, 다소 걱정이 되어서였다.


고심 끝에 혜연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용기를 내기 위해서였다. 혼자만 알고서 삭이는 방식은 이제 그만할 때였다. 그래야 나중에 지금의 순간을 다시 떠올려도 후회가 없을 터였다.


“꿈을 꿨어.”


이 선택이 실수일지, 아니면 되레 기회일지, 결국 해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었다.


“오늘 일? 걱정 마. 이호억 녀석··· 당장 여기까지는 신경 못 써.”

“그게 아니야.”


차라리 오늘 같은 소동이었으면 했다. 절대 피 흘리는 이들이 없었을 테니까.


슬슬 본론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처음으로 내색했던 시점부터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누군가의 앞날을 입에 올리면서 이토록 힘들었던 적이 또 있을까. 어쩌면 당연한 감정이었다.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동기들 모두의 미래가 걸렸을지 모르는 문제였다.


그만큼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사태였다.


지민은 용케 독촉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조심스러운 심정이겠다. 상대의 태도에서 이미 그 무게가 가늠되었을 것이었다.


이윽고 혜연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너무 차분했던 나머지 어렵사리 실토한 내용이 바로 귀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어머니께서 살해당하셔.”


지민은 잠시 얼떨떨했다.


어느 때보다 진중한 자세로 귀를 기울였던 참이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실감하기 어려운 규모가 느닷없이 그녀를 덮쳤다.


열어서는 안 될 상자를 연 기분이었다. 그 불길한 기운이 천천히 그녀를 잠식해 왔다.


“사, 살해? 누구에게···??”

“강수호.”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었다.


지민은 귀를 의심했다. 참다 못해 실례인 줄 알면서도 결국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누가 누구를 죽여? ···장난이지?”


누구에게 이야기하더라도 쉬이 믿음을 살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직접 꿈을 꾼 자신도 인정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으니까.


무의식이 뒤엉킨 끝에 만들어진 끔찍한 결과물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문제의 광경을 눈에 담았던 감정이 계속 전하고 있었다.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일어나며, 설령 귀왕이라도 피할 수 없다고.


어머니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때와 다름없는 머리에 갈색 니트 원피스, 약속 장소가 본인 소유의 저택 안이라 나름 편안하게 입은 듯했다.


하지만 무엇이 그렇게도 신경 쓰이는지, 좀 전부터 뒤숭숭한 낯빛으로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창밖은 이미 해가 져서 어두운 풍경이었다. 때마침 손님이 당도한 모양이었다. 마치 헤어졌던 첫 사랑을 오랜만에 만나는 듯, 기척만 듣고도 반색하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이윽고 두 남자가 서재로 들어섰다.


한 명의 정체는 바로 알아챘다. 그녀의 곁에 늘 상주하는 호위 무사였다. 어떤 자리라도 역시 그가 빠질 리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생김새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쉼표처럼 휜 앞머리와 오른쪽의 눈물점이 특히나 인상 깊었다.


혹시 기다리던 상대일까.


이어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조용한 관찰자를 실로 경악시킨 상황은 당장 이 다음부터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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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어른 괄시는 해도 4 +1 21.02.09 4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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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어른 괄시는 해도 1 21.02.02 79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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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1 21.01.19 52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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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 하늘이 돈짝만 5 21.01.15 44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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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하늘이 돈짝만 3 21.01.12 62 0 11쪽
363 하늘이 돈짝만 2 21.01.12 71 0 12쪽
362 하늘이 돈짝만 1 21.01.08 49 0 13쪽
361 쥐 본 고양이 9 21.01.08 51 0 13쪽
360 쥐 본 고양이 8 21.01.05 59 0 12쪽
359 쥐 본 고양이 7 21.01.05 51 0 12쪽
358 쥐 본 고양이 6 21.01.01 4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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