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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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석
작품등록일 :
2019.05.1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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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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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는 지네 5

DUMMY

5


한남동 저택.


다행히 귀왕은 무탈했다. 그녀의 다리에는 책장에서 꺼낸 앨범 하나가 펼쳐져 있었고, 거실부터 시작해 서재까지 전투 흔적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호억은 비로소 안심했다. 걱정했던 사태는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다. 놓쳤다고 생각한 기회 앞에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그렇다면 예견된 불상사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귀왕의 무사를 확인한 석수는 다시 일층에 내려갔다. 지난밤에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호억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언제나 그랬듯이 가운데 소파에 앉은 그녀와 가장 가까운 위치로 엉덩이를 붙였다.


그녀가 감상하던 앨범을 덮었다. 테이블에 올리는 손길도 차분했다. 공연한 걱정으로 휴식을 방해했다는 자책이 들었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사안은 아니었다.


“어머니, 속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안색이 그럴까?”


낭랑한 음성이 귀에 닿으니, 초조한 마음도 금방 가라앉았다. 틀림없는 그녀였다. 지금 겪는 일은 허구가 아니었다. 볼을 꼬집거나 주변을 두리번대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입에 어렴풋이 미소가 돌았다. 하지만 대놓고 근육들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앞으로 이을 고백의 무게가 그러했고, 위험 요소가 도사리는 이상 방심은 금물이었다.


“어디··· 편찮은 데는 없으시죠?”

“응, 없어.”


귀왕은 태평했다. 심지어 어제 벌어진 사건 사고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부와 계약을 파기한 직후 일어난 연구 센터 화재, 조금이라도 궁금했다면 마주하기가 무섭게 경위를 물었겠다.


호억은 이내 생각을 접었다. 그녀 나름대로 의도가 있을 테니까. 어느 권속보다 근심이 많은 편인 자신을 배려한 결정일 수 있었다.


조금만 불안해져도, 그는 어머니를 찾았다. 웬만한 악의나 욕심에 순순히 당할 그녀가 아니지만, 즉시에 안위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누구보다 의지하는 존재가 영원히 떠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였다.


“정말··· 정말 큰일나는 줄 알았어요.”

“큰일?”


어제의 일을 떠올리자니, 간담이 서늘했다.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정신없이 달린 자신, 조금만 더 버티면 저택까지 도달했을 텐데 웬 길바닥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천추의 한이었다. 실제였다면 바로 앞에서 돌이킬 기회를 놓친 셈이니까.


그러나 후회할 때가 아니었다. 우는 소리는 모든 사안이 해결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 본인이 제일 큰 충격에 빠질지 몰랐다. 따라서 저라도 중심을 잡아야 했다.


“어젯밤에··· 지혜연이 사망했습니다.”


호억은 힘겹게 부고를 전했다.


귀왕의 표정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역시 짐작하고 있었나. 팽팽한 붉은 실들 가운데, 바닥으로 축 늘어진 하나가 기어이 두 눈에 띄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구나.”


한 마디였지만, 적잖은 심경이 담겨 있었다. 자식들 중 일부로서 감히 넘겨짚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혜연은 자신과 수호와 더불어서, 오랫동안 어머니와 함께 존재한 권속이었다. 영력의 특성상 자주 어울리지 못했으나, 분위기가 독특해서 다소 소극적인 행동 양상에 비해 존재감이 짙었다.


어머니가 한남동 저택에 상주하는 것처럼, 가끔씩 아차산 자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항상 혜연이 있었다. 물론 그 자신은 거의 마주치지 못했다. 귀왕이 행방불명되었던 사건을 계기로 사이가 비틀어진 탓이었다.


같은 자리를 지키던 권속이 돌연 사라졌다. 오랜 추억의 일부가 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로 다양한 감정이 몰아치겠다.


어머니가 적극 개입했다면 어땠을까. 줄곧 외톨이로 지내지 않았을까. 적어도 꾸준히 얼굴을 보았다면, 마지막이 덜 외로우려나. 담담한 표정에 감추어진 생각이 정말 이런 식일지 모르겠으나, 호억은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다만 조금은 의아했다.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자행했는지, 모든 정황을 아는 것처럼 물어보지 않았다.


가해자와 피해자 둘 다 당신의 핏줄이라서? 유철의 죽음과 양상이 비슷했다. 겸허하게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악랄한 자식과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서려는 권속, 그들을 똑같이 대우한다니. 호억은 내심 슬퍼졌다.


“어머니.”


상대는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이번에··· 거처를 옮기심이 어떻겠습니까.”


예전에도 제안했다. 그녀가 돌연 사라지기 전까지는 자주 방문할 목적에서였으나, 몇 년의 공백을 치른 뒤에는 명분이 달라졌다.


외부 요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실상은 호억 자신이 안심하기 위해서였다. 가까이 있으면 일이 터지는 즉시 조치가 가능하고,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도 낳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보안 체계는 무쓸모했다. 불시에 사라졌을 때가 그러했듯, 모두를 속이고서 빠져나갈 테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했다.


“이사를? 어디로?”

“역삼동 근처로 알아보겠습니다.”

“네 회사 근처구나.”


예상대로 반기는 기색이 없었다. 당연했다. 어디에서 일상을 즐기든, 시선이 따라붙는 기분이겠다. 호위로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수호와는 명백히 다른 개념이라서, 느낌이 마냥 유쾌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랐다. 자칫하면 한순간에 어머니와 헤어지고 말았다. 불길한 미래가 예견된 가운데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만은 허락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엇보다 어머니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어머니의 생명이 달린 문제에 타협은 없다. 설령 미움을 사더라도 강행하겠다. 당신의 무사를 바라는 마음으로 결정했으니, 차마 고까워하지도 못할 테니까.


더군다나 권속의 요청을 대부분 거절하지 못하는 당신이었다. 진심이 전달되었다면 매몰차게 거절할 리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누리시는 일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겠습니다. 딱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훨씬!”


호억은 열심히 설명했다. 요청이 고집으로 곡해되지 않기를 바랐다. 어머니가 꺼리는 조건을 가능한 수위로 내린다면, 여태까지 누린 일상과 내용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도 그대로 두겠습니다. 일이 끝나는 즉시 돌아오실 수 있도록 관리하겠습니다.”


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 머무른 공간이었다. 미련 없이 가졌던 공백의 시간도 있었지만, 돌아올 장소의 유무는 차이가 꽤 상당했다.


벽 하나에 가득 찬 책장만 보아도 그러했다. 소설과 역사서 그리고 앨범, 모두가 여기에 존재해서 의미가 있었다. 더 멋지고 깔끔한 장소로 옮긴다고 한들, 비할 바가 되겠는가.


그러나 귀왕은 여전히 덤덤했다. 완곡하게 넘어가는 느낌도 아니었다. 설득이 조금도 통하지 않은 것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호억은 급격히 두려워졌다. 지금 시점에서 거절당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혜연의 경고가 점점 현실이 되는 듯하여 초조했다.


“현재 계신 위치에서는 어머니를 완벽하게 경호할 수가 없습니다. 한 달··· 아니, 단 몇 주라도 근접한 거리에···.”

“뭘 새삼스럽게. 듬직한 호위가 있잖니.”


호억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답이었다. 아직은 소수의 동기들 사이에서 시끄러운 사안이었으니까. 소식을 전달하는 연통이 따로 없으니 더욱 그럴 만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제안 역시 생뚱맞았겠다. 평소와 다름없이 찾아와서는 돌연 당신의 안전에 대해 운운하고 이사를 부추기니까.


“녀석은 며칠 전부터 묘연하지 않습니까.”

“괜찮아. 조만간 돌아올 거야.”


되도록 점괘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직접 보지 않았던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이가 어떤 절망감에 빠지는지.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고, 두 눈동자에는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 서렸다.


알고 있었다. 빨갛게 타오르는 혜연의 시선 끝에 누가 자리할지. 자신을 끝내 고립시킨 장본인들, 그 명단에 이호억은 필시 존재할 터였다.


어머니는 지키고 싶었다. 어두운 낯빛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모습이라니, 끔찍했다.


얌전한 형태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분에 못 이겨서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예전처럼 갑자기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욱이 점괘를 입에 올리기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언급을 금하고는 말이 되지 않았다. 당장 무슨 명분으로 포장하는가. 어지간한 이유가 아니고서야, 그녀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거짓으로 당신을 속이기는 싫었다. 그릇된 방법이었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는 선이었다.


호억은 가까스로 결정했다. 본인을 포함한 모두가 괴로워도, 차라리 정도를 선택하자. 손바닥 몇 개로 가려질 진실도 아니거니와,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질 내용이니까.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지금처럼 무소식인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몰라요.”


기어코 말을 꺼냈지만, 역시 부담스러웠다. 불안정해진 호흡 탓에 잠시 쉬는 사이에도 그는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오롯이 사실만 말하는데도, 심장을 점점 압박하는 진실의 무게가 버거운 탓이었다.


“지혜연··· 누가 그랬는지 짐작하십니까?”

“······.”


그녀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답을 얼추 알겠다는 의미였다. 대화의 흐름만 따져도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했다.


“강수호입니다.”


이런 사안에서 등장할 리 없는 이름이었다. 분신처럼 아끼는 칼로 무고한 동기를 베고 주군도 위협하다니, 현 시점에 이르러서도 호억은 도무지 납득이 안 되었다.


가설을 확인받은 그녀의 심정은 어떠할까. 누구보다 함께한 시간이 길었기에 충격이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혜연의 점괘가 얼마나 정확한지, 어머니도 아시죠? 죽기 전에 저를 직접 찾아서 예견했습니다. 강수호가 자신을 살해할 거라고.”


어느 새 호억의 목소리가 호소하는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다양한 요인이 존재했으나, 무덤덤한 상대의 태도가 가장 큰 이유였다.


최소한 당혹할 줄 알았는데, 오늘의 그녀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어머니를 제일 과소평가하는 것도 너야.’


호억은 민선의 충고를 상기했다. 당시에는 어이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그 의미가 희미하게 체감되었다.


유철의 덫에서 나오기 위해 필사의 각오로 저항한 민선이라면,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절실히 경험했을 것이었다. 모두를 똑같이 여기는 나머지 치우치지 않는 당신의 애정, 그것이 도리어 소수의 목을 죄었다.


더구나 언제부터 그들의 대변자였나. 굳이 구분 안해도 호억 자신은 명백한 주류였다. 재산이 넉넉하고 영력마저 강해서, 누구도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


귀왕의 실종을 계기로 오히려 폐만 끼쳤다. 때문에 진태는 시력을 포기했고, 가뜩이나 폐쇄적인 성향인 혜연은 더 깊숙이 종적을 감추었다.


약자들의 사연을 이용할 자격조차 없었다. 하나둘씩 맺히기 시작하는 반성의 열매가 껍질이 내뿜는 향만으로 쓰디썼다.


“간섭하지 않으시죠. 저도 압니다. 동기들 싸움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하나하나 간섭했다가는 입장도 곤란해지실 테니까.”


조금 전보다 그의 음성에 기운이 부족했다.


“이유는 아직 모르지만, 녀석이 이쯤에서 멈춘다면··· 잠자코 있을 작정이었습니다. 저 역시 떳떳한 입장은 아니니까요.”


앞서 생각한 장면들이 다시 머리를 스쳤다. 당혹감과 죄의식의 공존, 언젠가는 반드시 풀어야 하는 과제였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이기적이라고 비난해도 괜찮았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는 바로 어머니였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참회는 불가할지도 모르겠다.


“녀석은 도를 넘습니다.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제는 본론이었다. 적잖은 고비를 넘어서 드디어 종착지였다. 거한 파장이 예상되나 믿고 싶었다. 언제나 의기양양하고 야무진 그녀라면 남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그런데 엉뚱한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내 목에 칼이라도 대니?”

“···!”


수호가 반역자라는 점을 전제하면, 그다지 놀라울 추측은 아니었다. 갑자기 방문해서 안전을 그토록 강조하지 않았던가. 단서를 너무 많이 제공한 셈이었다.


“왜 말이 없어? 설마··· 정곡이었나?”


그가 말을 잃은 원인은 내용만이 아니었다.


두려운 내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극상이자, 믿었던 호위가 주도하는 반역이었다. 본디 하늘을 찌르는 기백이라도, 창백한 얼굴에 최소한 그늘은 드리워질 줄 알았다.


그런데 표정까지 태평했다. 의미를 완전히 오해하지는 않았을지, 재차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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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 어른 괄시는 해도 7 21.02.12 44 0 13쪽
381 어른 괄시는 해도 6 21.02.12 44 0 13쪽
380 어른 괄시는 해도 5 21.02.09 43 0 12쪽
379 어른 괄시는 해도 4 +1 21.02.09 48 0 13쪽
378 어른 괄시는 해도 3 21.02.05 53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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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어른 괄시는 해도 1 21.02.02 79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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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6 21.01.29 61 0 14쪽
372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5 21.01.26 54 0 14쪽
371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4 21.01.26 62 0 12쪽
370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3 21.01.22 57 0 15쪽
369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2 21.01.22 74 0 15쪽
368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1 21.01.19 52 0 15쪽
367 하늘이 돈짝만 6 21.01.19 44 0 13쪽
366 하늘이 돈짝만 5 21.01.15 44 0 13쪽
365 하늘이 돈짝만 4 21.01.15 77 0 12쪽
364 하늘이 돈짝만 3 21.01.12 62 0 11쪽
363 하늘이 돈짝만 2 21.01.12 71 0 12쪽
362 하늘이 돈짝만 1 21.01.08 49 0 13쪽
361 쥐 본 고양이 9 21.01.08 51 0 13쪽
360 쥐 본 고양이 8 21.01.05 59 0 12쪽
359 쥐 본 고양이 7 21.01.05 51 0 12쪽
358 쥐 본 고양이 6 21.01.01 46 0 12쪽
357 쥐 본 고양이 5 21.01.01 5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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