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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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석
작품등록일 :
2019.05.1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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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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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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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등 (大不等) 4

DUMMY

4


중구 중림동.


골목에 마른 고양이가 쓰러져 있었다.


청년은 가까이 다가갔다. 응급조치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양이는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잦아드는 숨이 안타까웠다. 개에게 습격을 당했을까. 정확한 원인은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일단은 마지막 가는 자리부터 편하게 조성하고 싶었다.


그런데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청년은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운동화와 바짓단이 보였다. 느지막한 시간에 으슥한 골목까지 들어오다니, 과연 누구일까.


청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웬 사내가 붉은 눈을 빛내면서 웃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새빨간 눈동자 때문이 아니었다. 사내의 얼굴이 놀랍도록 자신과 닮은 탓이었다.


얼른 피해야 하는데, 어쩐지 온몸이 굳었다. 운명을 그대로 받들라는 신호 같았다.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차츰 거리를 좁히던 남자는 이내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헉!”


눈을 뜨자 낯익은 천장과 마주했다. 익숙한 공기와 감촉, 틀림없이 청년의 방 안이었다.


동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생전 처음 겪는 감각이었다. 감기도 걸리지 않을 만큼 평소 튼튼한 체력을 자랑했는데. 이 느낌이 몸살일까. 뒤숭숭한 꿈의 원인도 이 때문인 듯했다.


이어서 시계를 확인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바늘의 각도가 낯설었다. 동호는 머지않아 정신을 바짝 차렸다.


“으악!”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 출근 시간도 지났다. 엄청난 지각이었다. 일을 시작한 뒤로 처음 경험하는 경우라, 좀처럼 이해가 안 되었다.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많았다. 직전까지 통화를 시도한 모양이었다. 일개 견학생인 자신 때문에 업무가 마비되지는 않을 텐데,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하기야 돌연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였으니,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심히 걱정을 했겠다.


출근 준비를 시작하기 전에 걱정부터 덜자. 적잖은 꾸중이 예상되지만, 그는 각오하고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동호?!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역시나 잔뜩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만큼 좋았다.


“죄송해요. 지금 일어났어요.”


무슨 이유인지, 병원의 분위기도 어수선한 듯했다. 평소였다면 전화상으로 이유를 다 따졌을 텐데, 일찌감치 통화를 마무리했다.


하루가 시작부터 뒤틀렸다. 오늘은 일진이 사나울 듯하니, 너무 서두르지 말아야겠다. 아무리 급해도 병원이었다. 작은 동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 시설이라도, 최소한의 청결은 필수였다. 부랴부랴 옷만 걸치고서 나갈 수는 없었다.


쏴아아.


온수로 거품을 씻은 그는 거울과 마주했다. 말끔해진 얼굴이 보였다. 덕분에 몽롱했던 정신도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동호는 지난밤의 행적을 돌이켰다. 일어난 즉시 생각했어야 했는데, 기묘한 꿈자리에 이어서 시계에도 놀란 나머지 깜빡 잊었다.


어제는 오래간만에 야근했다. 원장 남매가 선약으로 먼저 퇴근했기 때문이었다.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전하라고 했다.


동물 단체에 의해서 구조된 강아지가 회복 중이었다. 마취가 슬슬 풀리기 시작하는지 연신 끙끙대는데, 아무래도 그냥 떠나기가 무엇했다.


지쳐서 잠에 빠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웬만한 소음에도 일어나지 않으면, 조용히 병원 내부의 조명을 끄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에 밖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이야아아아아!!’


사람이 아니었다. 실성하기 직전 고양이의 목소리와 거의 흡사했다. 바깥은 조용했다. 지나가는 행인 하나 없이 도로를 질주하는 차만 종종 보였다.


골목 어귀에서 무슨 사고가 터졌나. 단순한 세력 다툼이라면, 두 마리 이상의 목소리가 들려야 했다. 그런데 이후로 비명이 끊겼다. 다른 소음이 더 들리지도 않았다.


취객의 눈에 거슬려서 변을 당했나. 아니면 악의적인 장난에 큰 부상을 입었나. 워낙에 빈번한 경우였다. 자연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확인차 곧장 밖으로 나섰다.


후미진 골목에 깡마른 형체가 누워 있었다. 그는 직감했다. 분명히 비명의 주인이었다.


걸음을 옮기면서 주변도 살폈다. 인기척이 없었다. 일을 거행하자마자 곧바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서둘러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눈에 보아도 위중했다. 사고를 당하기 이전부터 영양이 부족했나. 몸통과 다리가 지나치게 파리했다. 골절이나 파열처럼 심한 외상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포를 자극했나. 단순히 분노에 의한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동물을 가까이한 세월이 상당했다. 이제는 감정을 충분히 분석할 줄 알았다.


‘하아, 누가 널 이렇게 했을까.’


머리를 쓰다듬자, 약간의 혈흔이 드러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조금 헤집었다. 찢기거나 터진 자국이 아니었다. 송곳으로 꿰뚫은 것처럼 구멍 둘이 나란히 자리했다.


짐승의 송곳니려나. 크기나 위치로 따지면, 비슷한 크기의 소동물도 아니었다. 충무로 한복판에 사람 만한 개체가 산다는 소식은 금시초문인데.


동호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옆으로 공간이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병원 앞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분명 이 방향으로 도망쳤을 테니까.


때마침 꼼지락대는 형상이 보였다. 동물은 아닌 듯했다. 숨어서 생활하던 노숙자인가. 그렇다면 조금 전의 상황을 목격했을 수도 있겠다.


‘거기··· 누구 있어요?’


그 이후로 기억이 새까맸다. 이상한 조짐이 보였다면 필시 새겼을 텐데. 머리가 완전히 마르는 중에도, 그 다음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묘한 기운이 감지된 단서는 바로 옷이었다. 침대 위에 병원의 위생복이 그대로 있었다. 일어나기 전까지 착용했던 옷이 다름 아닌 근무복이라니.


게다가 지저분했다. 어디 시비라도 붙었나. 그래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기억이 흐린가. 상대는 노숙자일까. 고양이를 해한 사실이 드러나자, 주먹을 먼저 내질렀을지 몰랐다.


동호는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만한 위해를 가했다면 필시 흔적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피부가 멀쩡하고 통증도 없었다. 이불 역시 피 한 방울 묻지 않아서 깨끗했다.


“으잉? 아직 여기 있었니?”

“늦잠을 잤어요. 지금 바로 나가려고요.”

“하하, 너도 나이를 먹나 보다.”

“그러게 말이에요. 부지런히 달려야지.”


방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신부와 마주쳤다. 청년이 생활하는 곳은 성당의 기숙사였다. 부지가 너부죽해서 본당과 함께 자리했다.


기숙사 외에도 시설이 다양했다. 사제들을 양성하는 기관 옆에는 작은 공원도 있었다.


그는 달리기 위해 신발 끈을 단단히 묶었다.


“우 신부님은 뭐 하세요?”

“이 시간이면··· 기도실에 계시겠다.”

“그럼, 저 지각한 거··· 비밀로 해 주세요.”

“얼른 출발이나 하렴.”


우 신부는 그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이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것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섬세했다.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영향도 있었다. 목소리나 발걸음 등의 세세한 변화도 곧바로 눈치 챌 만큼 뛰어난 청각을 자랑했다.


“네! 저 믿고 출발합니다?”

“그래. 걱정하지 말거라.”


노년의 신부를 뒤로 하고, 가볍게 내달렸다. 몸살일까 조금 걱정도 했는데, 막상 동작이 수월했다. 악몽 탓에 경직된 근육들이 슬슬 풀리는 듯했다. 오히려 보통 때보다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신호만 없으면 병원까지 금방이었다. 가는 경로도 간단했다. 그대로 직진하면 되었다. 숭례문을 지나자 명동 거리 입구가 보였다. 평소라면 구경하듯 걸었을 텐데, 아쉽게도 오늘은 시간이 없었다.


* * *


중구 필동.


병원에 이르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주말은 대체로 한산한 동네였다. 주변에 기업체가 많은 덕분인지 오히려 평일이 더 북적였다.


그런데 사람이 계속 모였다.


골목 앞으로 노란 폴리스 라인이 설치되어 있었다.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금지하기 위해서 경찰 두 명까지 배치된 상황이었다. 어제 고양이를 살폈을 때만 해도 특이점이 없었는데,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왔어요!”


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도 평소와 달랐다. 주말에 시간을 마련한 반려동물의 주인들이 나란히 대기해야 하는데, 어쩐지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살벌한 폴리스 라인 탓일까. 때마침 치료가 끝났는지, 작은 강아지를 안은 손님과 함께 원장이 진료실에서 나왔다.


“죄송합니다.”


진주는 말없이 눈치를 주었다. 손님이 아직 계산 중이었다. 분위기를 흐릴 만한 언행은 자제해야 했다. 손님이 병원을 나간 뒤에야, 그녀는 곧바로 동호를 다그쳤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딱히.”


그녀의 눈이 이글거렸다. 따질 점은 많은데, 차마 다 쏟아내지 못하는 탓이었다. 상당한 이성을 발휘한 결과였다.


그녀는 장갑을 벗었다. 오늘따라 거슬리는 옆머리도 뒤로 넘겼다. 하지만 머리끈으로 고정하지 않은 탓에 금세 도루묵이 되었다.


“그런데 병원을 방치하고··· 집에 돌아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전개였다. 목숨이 다한 고양이를 살피다가 돌연 다른 각오가 생겨났나. 우울감이 폭발한 나머지 그대로 귀가해서 잠을 청했다던가.


더 이상한 점은 기억이었다. 어떤 사연이든 머리에 온전히 남아야 정상인데. 노트의 한 페이지가 사라진 것처럼, 그 부분만 기록이 온데간데없었다.


침묵은 진주도 답답하게 만들었다. 사고를 치더라도, 언제나 뻔뻔하게 해명하던 그가 아니던가. 지금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었다.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면 벌써 돌려막았을 텐데, 혹시나 어젯밤에 제정신이 아니었나.


“술이라도 마셨니? 어제 약속 있었어?”

“아니요. 그냥··· 너무 피곤했나 봐요.”


대답은 예상한 대로였다. 전공자인 다정과 다르게 잡무를 도와주는 정도지만, 음주의 소지는 없었다. 함께할 친구가 전무하니까. 뻔뻔할지언정, 괜히 거짓말을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침묵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나사가 빠졌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뒤늦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정 씨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죄송합니다.”


동호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한밤중에 나홀로 조명을 밝히는 동물 병원, 아무도 없으면서 심지어 잠기지 않은 상태. 얼마든지 털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돈만 사라지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안에는 보호 중인 유기견이나 수술을 받고 입원한 동물들이 다수 있었다. 몰상식한 인간들의 표적이 되기에 탁월한 조건이었다. 주인이 있는 동물도 태연히 입으로 들이는 판국에, 그야말로 대형 사고를 칠 뻔했다.


“다정 씨, 형 선생에게 연락 부탁해요.”

“네!”


그러고 보니 형주가 없었다. 걱정된 나머지 자택으로 향했나. 하지만 찾을 턱이 없었다. 이력서에 적은 주소는 등본의 내용이지, 실 거주지가 아니었다.


의도는 없었다. 미성년을 벗어난 이후부터 당연하게 여긴 내용이었고, 그래서 지금껏 충실히 유지했을 뿐이었다. 오늘을 계기로 실 거주지에 대한 추궁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이 조금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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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종곡 21.02.19 48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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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 어른 괄시는 해도 7 21.02.12 44 0 13쪽
381 어른 괄시는 해도 6 21.02.12 44 0 13쪽
380 어른 괄시는 해도 5 21.02.09 43 0 12쪽
379 어른 괄시는 해도 4 +1 21.02.09 4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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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어른 괄시는 해도 1 21.02.02 79 0 13쪽
375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8 21.02.02 46 0 15쪽
374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7 21.01.29 123 0 16쪽
373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6 21.01.29 61 0 14쪽
372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5 21.01.26 54 0 14쪽
371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4 21.01.26 6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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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2 21.01.22 74 0 15쪽
368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1 21.01.19 52 0 15쪽
367 하늘이 돈짝만 6 21.01.19 44 0 13쪽
366 하늘이 돈짝만 5 21.01.15 44 0 13쪽
365 하늘이 돈짝만 4 21.01.15 77 0 12쪽
364 하늘이 돈짝만 3 21.01.12 62 0 11쪽
363 하늘이 돈짝만 2 21.01.12 71 0 12쪽
362 하늘이 돈짝만 1 21.01.08 49 0 13쪽
361 쥐 본 고양이 9 21.01.08 51 0 13쪽
360 쥐 본 고양이 8 21.01.05 59 0 12쪽
359 쥐 본 고양이 7 21.01.05 51 0 12쪽
358 쥐 본 고양이 6 21.01.01 46 0 12쪽
357 쥐 본 고양이 5 21.01.01 5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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