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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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석
작품등록일 :
2019.05.1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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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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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향전이 고담(古談)이라 11

DUMMY

11


1639년 6월.


기어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다. 관아에서 강력히 함구령을 내려도, 소용이 없었다. 사람의 입은 막을수록 가벼워지기 마련이었다. 현장을 직접 발견하고 탐색한 포졸들의 입이 은연중에 바삐 움직였다.


시작은 여태 알지 못하는 그녀의 안부였다. 누구는 남몰래 사또의 첩으로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했고, 다른 누군가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직접 본 목격자가 없었다. 그래서 신뢰도가 떨어지는 와중에, 지금의 가설이 등장한 것이었다.


“정말이야.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세상에··· 어떻게 가능하지?”

“굉장한 열녀잖아. 하늘도 감복했겠지.”


결론은 사정을 딱히 생각한 하늘에서 몸소 데려갔다는 말이었다. 당최 설명되지 않는 점들이 가득했다. 파손되지 않은 자물쇠와 깔끔하게 절단된 족쇄 그리고 증발한 죄인, 신비한 힘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일어나지 못할 사건이었다.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다소 허무맹랑할지 몰라도, 직접 현장을 확인한 이들은 나름대로 진지했다.


“아이고오···!!”

“마님······.”


사건의 전말은 곧 가족에게 전달이 되었다. 노모는 사실을 듣자마자, 힘없이 무너졌다. 월영은 설움만 토하는 등을 토닥이며 함께 눈물을 훔쳤다. 준복과 오랫동안 어울렸던 몸종들도 마치 가족이 변고를 당한 것처럼 어두운 낯빛이었다.


“소식이라도 들을 수 없습니까?”

“물러가세요. 저희도 잘 모릅니다.”

“그러면 무사히 잘 계시는지, 그것만이라도 확실하게 확인해 주세요. 마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

“자꾸 이러시면 곤란해요!”


불길한 예감은 있었다. 언젠가부터 준복을 감추는 관아의 태도가 수상쩍었다. 게다가 소문마저 이상하게 퍼지고 있었다. 본인은 다소 꺼림칙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차라리 풍문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목숨만 제대로 붙어 있기를 소망하면서 계속 모른 척했다.


그런데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그것조차 모른다니. 기운이 쇠한 안주인을 챙기던 월영은 이내 하늘만 우러러 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강하게 원망했다.


“하늘이 있다면··· 정말 어찌 이러나!”


지금껏 가만히 방관하다가, 어째서 이렇게 데려가는가. 상식을 망각한 이에게 엄중한 벌까지 내려도 시원하지 않겠거늘, 주인의 기일만 되면 준비하느라 바쁜 제사상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나가거라!!”


사건 이후로 교락의 신경은 심히 예민했다.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건에 자신이 깊숙이 연관되어 있었다.


‘구천을 도는 원혼이 되어서 반드시 당신을 벌할 것이야!!’


만약 정말로 하늘이 노해서 일어난 심판의 전초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연장선이 아직 남은 상태라면 언제 다시 불가사의한 사태가 발생해 자신의 목을 조를지 몰랐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금께 이 사실을 고할 것입니다. 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끝까지!’


행여 꿈에라도 그녀가 나올까 봐 무서웠다. 얼굴 한쪽에 자신이 선사한 흉터를 안고서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사자들과 함께 직접 찾아오지 않을까. 관련한 걱정으로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생활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괜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당분간은 외부의 활동을 자제했다. 어디에 가더라도 건장한 체격의 부하를 필히 하나 이상 대동했다. 수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갖은 이유를 들어 사저에 불침번이 서도록 만들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상관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사히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었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았다. 직면한 위기만 극복하면 언젠가는 다시 어깨를 펼 날이 오리라.


하지만 사람의 기억은 야속했다. 사소하게 생각한 것들을 간단히 망각했다. 상상하지 못한 두려움을 안긴 그녀의 실종도 결국은 한낱 지나가는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특별한 문제가 없자 교락은 금세 악습관을 되찾았다. 나이가 어리면서 예쁜 여인에게 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준복에게 그랬던 것처럼 철저한 조사 또한 명령했다.


물론 일련의 사건으로 얻은 교훈이 있었다. 집안이 좋거나 줏대가 강한 성격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아야 편했다. 이쪽에서 멋대로 주물러도 끝까지 버티니, 참 곤욕스러웠다.


결국은 벗은 살결은 보지도 못하고 작별을 고했다. 경제적으로 불우하고 신분이 높지 않은 가운데서 다음 목표를 설정해야 했다. 준복과의 긴 신경전으로 한창 몸이 조급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발등에 불이 떨어지듯, 교락은 서둘러 대상을 선택했다.


“아, 그 처자요? 얼마 전에 이곳으로 들어온 각설이패 중 한 명이라고 하던데······.”


세상은 참으로 넓고 어여쁜 여자도 많았다. 누더기 옷을 입고서 얌전히 앉은 처자에게 눈길이 돌아갈 줄이야. 누가 상상했겠는가.


사교성이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다. 시장을 누비는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는데, 바깥 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서일까. 오랫동안 씻지 못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소매 아래로 비치는 피부가 깨끗했다. 덕분에 머리가 상당히 덥수룩해도, 얼굴이 빛나는 것일까.


게다가 집이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주변에 의지할 사람이 전무했다. 날마다 굶주림에 허덕일 이가 무엇을 더 깊게 생각하겠는가. 구태여 공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적당하게 구슬려서 돈만 쥐어 주면 당사자와 주변도 쉬이 설득당할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그 여인을 찾아.”


이렇게 간편한 대상을 두고서 오랜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다니, 쓸데없이 멀리 돌아온 것 같아서 아쉬웠다.


그래도 되풀이하지 않을 실수였다. 이제는 철저히 손에 가두고서 농락할 대상만 노릴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추 씨네 며느리의 일이······.”


이방은 솔직히 꺼림칙했다. 준복의 소문이 이미 일파만파로 퍼진 상황이었다. 엄연히 결혼한 이에게 은밀한 수청을 강요한 일로 모자라 스스로 목숨까지 다하게 만든 수령, 그것이 현재 교락의 인상이었다.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처자를 몰아붙인 사실이 알려지면, 그 날에는 민심이 어떻게 요동칠지 몰랐다.


공연한 걱정일 가능성도 농후했다. 금전이 오가는 즉시 여인을 순수한 피해자로 보지 않을 테니까. 그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더구나 각설이 일원이지 않은가. 하룻밤의 대가로 상당한 급전을 받으면 생각이 곧장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방이 걱정하는 부분은 또 있었다. 얼마 전 조정에서 각 지방으로 파견했다는 어사(御使)의 소식이었다. 준복의 소문이 한양에 미쳤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어사들이 지금 이 마을에 있다면 잇따른 부정으로 인하여 사또가 좌천되는 일도 시간문제였다.


“그 일의 어디가 문제라는 말이냐.”

“그게··· 요즘 조정에서 어사들을 보낸다는 말들이 간혹 들려서··· 미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면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염려할 일이 있느냐?”


교락은 미간을 찌푸렸다. 찝찝하게 끝맺은 마무리는 사실이지만, 현장에 있던 이들의 증언으로 따지나 기록을 보나 자신은 걸릴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주로 두루뭉술한 어휘를 사용하고, 이상한 단어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서도 순전히 명령 불복종으로 처리했다.


갑자기 목숨을 끊은 이도 그녀 자신이었다. 그 과정에 있어서 공권력이 개입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엇을 물증으로 삼아서 이쪽에게 죄까지 문다는 말인가.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아하하하······.”


전혀 주눅들지 않는 수령의 태도에 이방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리고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자신은 명을 이행하는 사람이었다. 당장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도 인사권을 가진 사람의 심기를 거슬려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이제 시작하는 신참이 아니라 닳고 닳은 경력의 소유자였다. 악행을 행하고도 지금껏 무리 없이 관직까지 지키고 있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겠다.


“어차피 그들도 사람이야. 해결하는 방법이 다 있지. 이만큼 쉽고 단순한 일도 없어.”


교락이 자신하는 까닭은 있었다. 이제까지 이런 사유로 경질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실적을 얻기 위해서 조바심이 난 어사라도, 그보다 더한 유혹 앞에서 신조를 지키기는 무리였다.


색과 금에 넘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진정한 사내겠는가. 대체적으로 둘 앞에서 반드시 무너졌다. 넉넉한 뇌물을 받고서 지금까지 습득한 정황마저 모르는 척하거나, 도리어 그보다 더한 방법으로 색을 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거기에 속하지 않는 부류들도 있었다. 애당초 이 부정을 눈치채지 못한 경우였다. 그들은 마을에 들어온 이후 계속 손가락만 빨다가 다시 한양으로 올라갔다.


“나와 만나는 즉시 보상하겠다고 일러라.”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괜한 말로 수령의 심기를 어지럽히기 전에 이방은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났다. 어찌나 급하게 나가는지 그 모습을 보는 이에게도 당황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질 정도였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교락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굉장히 만족스러운 빛으로 웃었다. 다가올 만찬을 상상하며 기대하는 성질과는 사뭇 달랐다.


교락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토록 고대한 자리가 목전이었다. 비로소 기나긴 공포에서 완전히 탈출한 것 같아 흡족했다.


“크흐··· 크흐흐, 하하하!”


역시나 죽으면 부질없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서는 멀쩡하게 나가지 못하는 감옥에서 사라졌다. 간밤에 찾아온 맹수의 입으로 자진해서 들어갔든, 정말로 하늘이 데려갔든 결과는 이러했다.


결국은 원수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원귀가 되어서 끝까지 쫓겠다는 다짐은 다 어디로 갔는가. 절절한 각오가 무색하게 수령에게 떨어진 대가는 더 어리고 만만한 여자였다.


진기한 방법으로 목숨을 건졌어도, 지금의 위치에서 무엇이 가능한가. 발각되는 즉시 이전처럼 감옥 신세였다. 이어서는 수령이 친히 약속한 대로 인두를 이용한 고문들과 마주할 것이었다.


뺨 하나만 망가뜨린 정도로 사지를 떨었던 그녀가 이 공포마저 이기고 다시 나타날까. 절대로 그러지 못하겠다. 그렇게 일평생을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들지 못할 생김새로 지낼 것이었다.


낭비한 세월이 여전히 아까웠지만, 결말은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일반 백성에게 명백한 교훈을 안겨 주었다.


강한 자에게 함부로 도전해서는 안 된다는 진리였다. 시간이 지나서 체제로 굳어지면 이 작은 마을에서 왕처럼 군림하기 얼마나 편하겠는가. 그쯤이면 굳이 명분을 만들지 않고도 멋대로 행동할 환경이 조성되겠다.


질척이는 인연이 있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결과가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교락은 뻔뻔하게 감사를 표했다. 본보기로 전락한 그녀를 찬양하면서. 일이 이토록 수월하게 풀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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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6 21.01.29 61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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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4 21.01.26 6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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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2 21.01.22 74 0 15쪽
368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1 21.01.19 52 0 15쪽
367 하늘이 돈짝만 6 21.01.19 44 0 13쪽
366 하늘이 돈짝만 5 21.01.15 44 0 13쪽
365 하늘이 돈짝만 4 21.01.15 77 0 12쪽
364 하늘이 돈짝만 3 21.01.12 62 0 11쪽
363 하늘이 돈짝만 2 21.01.12 71 0 12쪽
362 하늘이 돈짝만 1 21.01.08 49 0 13쪽
361 쥐 본 고양이 9 21.01.08 51 0 13쪽
360 쥐 본 고양이 8 21.01.05 59 0 12쪽
359 쥐 본 고양이 7 21.01.05 51 0 12쪽
358 쥐 본 고양이 6 21.01.01 4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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