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희곡 (捨姬曲 : 버린 여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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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석
작품등록일 :
2019.05.1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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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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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자는 귀신 9

DUMMY

9


“그래도 덕분에 열심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그것만큼은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


지민은 부러 자세한 정황을 말하지 않았다. 솔직한 심경만 털어놓을 뿐이었다.


사태를 왜곡하지 않으면 괜찮았다. 연희도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일은 전보다 더욱 복잡해졌다. 누구는 수호를 추적하고 나머지는 연희를 심문하고, 거기다 일련의 사태를 웬만큼 알고 있었던 자신도 동기들 앞에서 성가신 진술까지 반복하겠다.


차라리 지금 이대로 오해하는 편이 나았다. 연희에게는 벌이기도 했다. 자신의 섣부른 행동으로 가장 지키고 싶은 존재가 도리어 위험에 처했으니까. 오해를 해소하는 일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었다. 이쪽이 걱정할 바가 아니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 더는 볼일이 없어서 굳이 오래 있을 이유도 없다.”


슬슬 마무리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궁금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했으니, 더는 질문할 구석도 없겠다.


이렇게 고요하고 숨 막히는 분위기는 정말 질색이었다. 되도록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떤 일이든 깊숙하게 엮이고 싶지 않은데, 민선에게 조금만 틈을 보이면 말끔히 떨칠 수가 없었다.


“송지민.”


하지만 어째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출입문을 열기 직전이었다. 걸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는데, 민선이 느닷없이 이름을 불렀다. 눈앞에 자리한 문손잡이가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래도 아무 일이 아닌 것처럼 돌아보았다. 못 들은 척하고 도망치는 꼴이 이상하니까. 아무런 소음도 없는 공간이라 우연이 아닌, 의도적인 무시로 의심할 것이었다.


“어떠한 사정이 있어도, 강수호는 어머니를 공격한 반역자야.”


앞서 이야기한 내용 중에서 반박하지 않는 점만으로도 지민은 크게 안심했다. 일단은 우려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 막 몰랐던 사실들을 접한 시점이었다. 아무리 신중한 민선이라도, 시간이 넉넉지 않으면 논리의 구멍을 알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 또한 다소 민감한 주제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발견하는 즉시 알려 줘. 내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피하지 말고.”

“모르지 않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으면.”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는데, 도리어 말이 끊겼다. 못마땅한 대답은 끝까지 경청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이어지는 말은 엄중한 충고마저 포함하고 있었다.


지민은 침묵했다. 심각한 목소리에 공포를 느낄 정도로 배짱이 심히 약하지는 않았다. 단지 상대가 던지는 조언의 의미를 상세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너도 동조한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어.”


민선은 진지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지민의 성격상 현재 벌어지는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으리라는 점은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의연했다. 오귀의 대표가 자칫 시해를 당할 뻔한 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당황하지 않은 그녀의 판단 덕에 귀왕이 목숨을 구제했을지 몰랐다.


“이 사안은 절대로 중간이 있지 못하니까.”


그러나 다음 태도는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귀왕은 누가 뭐라고 해도 최상위에 자리한 수장이었다. 그녀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규칙이 지금껏 유지되고,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누구든지 기댈 수가 있었다.


실제로 귀왕의 힘이 없었다면 민선 자신은 이곳에 있지도 못할 운명이었다. 권속들을 대하는 방식에 아직 갈등이 거센 편이지만, 그래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은 그녀에게 명백했다.


귀왕을 따르는 편과 적대하는 편이 기어코 드러난 사건이었다. 오귀들의 미래가 걸린 가운데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서 끝까지 방관하는 선택은 불가했다. 스스로 언제든 배신할 수 있다고 감히 자백하는 꼴이니까.


“그럼 다음에 만나면 서로 적이겠네.”


상당히 저돌적인 답에 민선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이라도 고민할 줄 알았건만. 빈말을 하지 않는 성격임은 알았으나 이런 사안에 관해서도 이렇게 대담할 줄 몰랐다.


“물론 그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은 안 해. 하지만 당사자가 용서했다면? 굳이 우리가 나서서 단죄할 필요가 있어? 애당초 누구를 위한 집행인지도 모르겠네.”


혹시라도 오해를 받을까, 지민은 이야기를 이었다. 직전의 언사가 얼마나 파격적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설령 다시 마주치자마자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이가 되어도, 이 진심은 곡해해서 듣지 않기를 소원했다.


“그럼, 이대로 넘어가는 게 옳아?”


지민의 말대로 귀왕은 항상 관용을 베푸는 존재였다. 유철의 만행만 보아도 그러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피해자가 직접 찾아갈 때까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도움을 요하면 필시 기회가 떨어졌다. 그 정도로 자신의 혈액을 공유한 권속에게 자비로운 심성이었다.


당장 권속들 중 누군가가 그녀에게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도, 흔쾌히 용서할 것이었다. 그 선택으로 도리어 다른 권속들이 상처를 받더라도 말이었다.


“선례를 남기면 앞으로 이런 일이 빈번해질 거야. 사적인 감정이 생길 때마다 어머니의 목숨을 노린다고. 일일이 감당이 되겠어?”


본인의 의지가 아무리 그러한들, 무턱대고 방치하면 곤란했다. 귀왕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선택은 오직 스스로 하지 않았나.


누군가를 원망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후로 각자가 어떤 삶을 살아간들 역모의 명분은 간단하게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처럼 그 분풀이 대상으로 귀왕을 지목하는 일이 많아지면 난감했다.


강력한 처벌이 따르지 않으면 모든 동기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귀왕의 입지를 보다 우습게 여기는 이들이 늘어날 터였고 그러면 비슷한 사고가 더욱 빈번히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나마 아슬하게 잡혔던 무게 중심이 짧은 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나는 절대 못 넘어가.”


생애 가장 찬란한 순간에서 돌연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입장이었다. 그런 혼란이 재차 반복되게 내버리지 않겠다.


결국 피해를 보는 이는 자신들이 아니었다. 혈주 하나만 믿고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권속들이었다. 강력한 영력 없이 생존하는 그들은 자신의 몸을 지킬 장치가 부재했다.


피가 낭자하는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제일 먼저 희생될 이들이었다. 본인들에게 싸울 의지가 없어도, 누구의 권속인지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렇다면··· 어머니께서 자식 농사를 잘못 지으신 결과지.”


지민의 답변은 변함없이 냉랭했다. 민선은 기어이 당혹하고 말았다. 서로가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서 사는 만큼 생각하는 방식이 판이했다.


지민은 줄곧 책임져야 하는 권속이 없었다. 앞으로도 만들지 않을 것이었다. 석수처럼 혈주를 극진히 보좌하는 형태도, 종아리에 달라붙은 거머리를 보는 양 성가셔 하겠다.


그런 상대가 보호할 가족이 무수한 이쪽을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더 설명해 보았자 일방통행이나 다름없는 대화라는 결론만 남았다.


늘 혼자 행동한 지민에게 귀왕의 주변에서 발생한 일은 그다지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그 사안에 대해서 우려하는 민선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극히 훌륭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차라리 민선이 왕이었다면 어땠을까. 보다 공정한 판단으로 권속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을지도 몰랐다.


민선을 포함한 모든 동기들이 귀왕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귀왕은 틀림없이 범상치 않았다. 실존하는 동기들의 구성만 보아도 그러했다. 누구든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성질이 없고, 각자의 삶에 족하든 불평하든 그저 열심히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우연하게 합류한 유철이 특이한 경우였다.


그래서 각자의 신념대로 살면서도, 불미한 난투극이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여기까지 오기 전에 목격한 사람들로 인해서 정체가 발각되었을 터였다.


함부로 사람의 피를 탐하는 일도 드물었다. 어디서 이렇게 끈기가 좋은 인재만 데리고 오는지, 표적을 간파하는 어머니의 혜안은 실로 뛰어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귀왕은 더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워낙에 점잖은 성격들이 대부분인 일족이었다. 작금의 사태와 같이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나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소극적인 이들이 일을 주도했다면,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겠다.


일족의 우두머리라고 해서, 그것을 멋대로 불식시킬 권리는 없었다. 무엇이든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뒤따르는 법이었다. 귀왕은 분명 언제든지 그 마음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겠다.


“당신도 잘 아니까··· 스스로 자리를 떠나신 거야.”


하물며 갑자기 중심이 사라져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폭삭 무너질 사회도 아니지 않나. 그 증거가 바로 행방이 불명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귀 사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사하게 굴러갔고 그 결과 다시 저택으로 돌아온 귀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결국은 지나친 걱정이었다. 사실상 귀왕은 어떠한 권위조차 가지지 못했다. 권속들을 특별히 구속하지도 않았고, 그만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존경받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귀의 상징이었다. 현재 우리들이 존재하게 만든 뿌리니까. 그래서 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개인적인 욕심으로 그 자리를 강탈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없는 것이었다.


“아무튼, 목숨은 구해다 드렸잖아. 오늘은 이만 봐 줘.”


지민이 태연하게 출입문을 열었다. 민선은 제지하지 않았다. 직전의 언사들로 충분히 속내를 짐작했다. 그래서 구태여 부질없는 잔소리를 덧붙이지 않았다.


이윽고 몸을 돌려서 나가는 뒤태만 바라볼 뿐이었다. 대놓고 모호한 자세를 보였으니, 불순한 뜻을 가졌다는 죄로 잡아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라서 민감했고, 상대의 마지막 말도 일리가 있어서 끝내 실행하지 않았다. 이기적인 속내가 영 못마땅하지만, 그녀의 손에 의해 귀왕이 구사일생한 점은 사실이니까.


다만 모습을 직접 확인하지 못해 아쉬웠다. 이러면 호억을 바로 안심시킬 수도 없었다. 일단은 소식만 전하기 위해 전화를 들었다. 통화한 기록을 찾아서 접촉이 가장 수월한 석수에게 연결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도통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삐 소리 후······.]


상태가 호전된 호억과 이야기하나. 아무리 그래도 굳이 전화를 무시할 이유가 없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못할 정도로 다른 업무에 허덕이고 있다는 예상이 더 맞겠다.


가만히 있을 시간에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호억이 또 어디에서 소란을 피울지 몰랐다.


우웅—.


도중에 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통화 기록을 확인한 석수에게 온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확인해 보니 발신자의 이름이 달랐다.


「영지하」


한창 한강 근처를 수색하고 있을 지하에게 온 전화였다. 지금쯤이면 가닥이 잡혔겠다. 아마도 그 보고를 위해 전화한 모양이었다.


민선은 자리에 멈추어 서서 전화를 받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승강기를 타면서 말하기 민감한 내용이었고,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병실이 편했다.


“어떻게 됐어?”


성과는 역시나 전무했다. 목표는 누구보다 은신술이 뛰어난 동기였다. 그림자 안으로 숨었다면 기운이 다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자취를 감출 정도로 기력이 남았다는 뜻인가. 권속들로 하여금 수호의 행방을 찾는 일은 아무래도 여기서 그쳐야 하겠다. 조금만 지체되면 햇빛이 떨어졌다. 자칫 잘못하면 도리어 그의 먹이가 되었다.


아무리 스스로 물에 뛰어들 만큼 호억에게 밀린 형세였어도, 일개 오귀들을 상대로는 여전히 건재할지 몰랐다. 더구나 치명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물의 피가 아주 절실하지 않겠는가.


평소 수호의 성정을 떠올리면 감히 상상도 안 되지만 이쪽에서 친절히 제물까지 바칠 필요는 없었다.


“이쯤에서 복귀해. 곧 있으면 해가 질 거야. 녀석을 상대로는 아무래도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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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4 21.01.26 6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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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 쥐 본 고양이 7 21.01.05 5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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