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들의 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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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단영
작품등록일 :
2019.05.24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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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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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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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의 시대 - 19. 시대의 종언(1)

DUMMY

19장 시대의 종언



“결투입니다.”


일바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녀와 이고르, 그리고 카이만은 초조하게 국왕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비요른을 설득해서 지체 높은 그의 몸뚱어리를 만네르헤임의 판금 갑옷 속에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절반의 정의는 실현되는 셈이었다.


문제는 나머지 절반의 정의였고, 일바는 지금 그것의 실현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카이만이 즉각 반론했다.


“벨바헨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재판으로 끌고 가면 사람들은 우리 같은 사냥꾼들 나부랭이보다 바르발라의 영웅을 더 좋아할 테고 벨바헨도 그 사실을 알 텐데요. 인정하긴 싫지만 그치한텐 카리스마도 있고 수완도 있습니다.”


재판이 벌어진다면 카이만의 분석대로 벨바헨에게 상황이 유리하게 흘러갈 공산이 컸다. 벨바헨을 고발하는 것은 기사단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양심 있는 이들을 일깨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보다는 기사단 수뇌부를 자극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무엇보다도 국왕 비요른이 관건이었다. 애초에 이 수사 자체가 기사단에 대한 그의 자부심에 기인한 것이었다. 만네르헤임의 실각과 그로 인한 기사단의 명예 실추는 비요른으로 하여금 대체품을 원하게 만들 터였다.


벨바헨은 바로 그 대체품의 훌륭한 후보였고, 그가 후보 이상의 존재로 부상하는 일만큼은 저지해야 했다.


“받아들일 거야.”


이고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연했다.


“의혹이 생기고 혐의가 추가되고 결국 법정 공방으로 이어진다면 진흙탕 싸움이 될 거야. 더군다나 우리 계획대로라면 벨바헨이 만네르헤임과 척을 지게 될 텐데 이 과정에서 만네르헤임이 벨바헨을 추락의 동료로 삼을 가능성도 농후하고. 그러니 벨바헨은 오히려 이 모든 불확실한 변수들을 단번에 처리해낼 수 있는 결투를 반길 거야.”


그리고 그 지점이 곧 이고르와 수사관들이 처음으로 벨바헨과 의견의 합치를 보는 부분이었다. 서로의 멸절이 가장 이상적인 답이 되는 지점. 각자의 죽음을 향해 뻗은 선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전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면 그다음에 제가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아뇨, 일바. 제가 합니다.”


이고르는 일바의 귀에 가닿은 자신의 말이 곧 그녀의 두 눈에서 불꽃으로 화하는 것을 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벨바헨은 제가 심판할 겁니다. 그래야 합니다.”

“이길 자신 있습니까?”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더라도···”

“아뇨, 승패가 중요합니다. 이길 수 있습니까?”


이고르도, 그리고 일바 자신도 답을 알고 있었다. 이고르 역시 결코 정상적인 몸 상태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일바는 더 심각했다. 그녀는 부러진 늑골 때문에 복대를 차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자는 에드바르를 죽였어요.”

“압니다.”


일바가 고개를 떨구고 콧김을 뿜었다. 대리인을 내세울 성질의 싸움이 아니었다. 손을 빌려 벨바헨을 벌한들 그녀가 지닌 울분은 여전할 것이었다. 이고르가 나직이 덧붙였다.


“그래서 이겨야 하는 겁니다.”


시비와 선악은 관념이고 승패는 실체였다. 의롭게 죽는 것은 더럽게 사는 것만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죽어서라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다. 일바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복수를 포기하는 것은 목숨을 포기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부탁합니다.”


일바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겨 주세요.”



*



“결투라니 체렌도프 엽사, 그게 지금 무슨 말인가?”

“일시는?”


헤르베르트가 비요른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이고르 역시 국왕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장소는?”

“여기.”


물론 이고르의 대답이 기사단장 집무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크론팔크벡 요새, 그리고 그 중에서도 연병장을 이르는 것이리라. 헤르베르트에겐 거절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여건이었다. 기사단원들 앞에 새 지도자를 소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장소였다.


“좋아.”

“잠깐만, 이게 도대체 지금 무슨 상황인가? 벨바헨 경, 답해보게. 방위대원을 죽이고 어쩌고 하는 고발 내용이 사실인가?”

“물론 아닙니다. 체렌도프 엽사도 이를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결투를 신청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증명될 건 제 결백밖에 없을 테지만요.”


헤르베르트는 국왕의 면전에서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거짓을 늘어놓았다. 이고르는 마지막 문장도 거짓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감호소에서 보여준 헤르베르트의 실력만큼은 진짜였던 것이다.


“준비 시간을 갖자고. 난 갑옷을 입어야 하고 넌 터진 자리부터 꿰매야 할 테니. 종자가 달아난 덕분에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는걸.”


헤르베르트가 그렇게 말했을 때에야 이고르는 꿰맨 상처가 다시 터져 옷을 피로 물들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일을 서두르느라 부상은 임시방편으로 급하게 돌볼 수밖에 없었다. 헤르베르트는 자신 있다는 듯이 말미를 주고 있었다.


“앞으로 한 시간 뒤, 두 시 정각에 시작하도록 하지.”

“네 장례식이니까 네가 정하는 게 맞겠지.”


이고르의 응수에 헤르베르트가 폭소를 터뜨리며 집무실을 떠났다.



*



이고르는 숫돌을 내려놓고 칼날을 살폈다. 날을 세운 칼을 턱에 가져다 대자 수염이 말끔히 깎여 나갔다.


이고르는 주어진 한 시간의 대부분을 무기를 정비하는 데에 썼다. 상처는 얼마나 잘 꿰매어 놓든 전투가 시작되면 다시 터질 것이었고, 접질린 왼 발목도 부목을 대는 것 이상의 치료법이 없었다.


몸과 달리 칼은 반응성이 좋은 물질이었다. 잠깐의 정비로도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었고 모든 손질을 묵묵하고 정직하게 받아들였다.


잇새에 낀 음식물처럼 여섯 개의 칼날 사이에는 마물의 살점이 잔뜩 걸려 있었고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빼낸 살점만으로 소형의 마물 하나는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부품의 각각을 분리해 쇠줄에 기름을 먹이고 피도 모조리 씻어낸 참이었다.


“구경났군.”


카이만이 연병장에 모여든 인파를 보고 툭 내뱉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가서 한 시간 만에 할룬스타드의 시민들을 불러 모았다. 기사단원들은 처음에는 구경꾼들을 들이지 않다가 이제는 포기하고 혼란을 통제하는 데만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네 상태가 최상은 아닌 걸로 아는데.”


알빈의 말이었다. 사냥단 지부에도 소문이 닿았는지 헬무트와 펠리샤, 그리고 제르비엘 박사까지 와 있었다. 카이만과 일바를 포함한 이들 여섯 명은 이고르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들만이 이고르의 편인 것처럼 보였다.


연병장 한 가운데의 눈을 치우는 종자부터 모여든 인파와 비요른 국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단결해서 헤르베르트 벨바헨을 응원하고 있음은 뻔한 일이었다. 인파 속에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욕설과 야유를 들으며 이고르는 소문이 어떤 식으로 퍼졌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고르를 불러들인 건 국새경이었고, 국새경의 범죄 사실이 밝혀진 지금 이고르는 마치 그를 위해 싸우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고 만 것이었다. 소문을 적극적으로 퍼뜨린 기사단 측에서는 이런 오해를 구태여 바로잡을 필요가 없었다.


“최상의 상태에서 싸워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걸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고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국새경과 만네르헤임은 노련한 정치가들이었고 그들의 기민한 대처를 막으려면 이쪽에서 더 신속하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고르는 감호소에서의 선잠 외엔 어떤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류드밀라의 함정에 빠져 전투를 치르고, 다시 킬스홀름 요새에서 반나절 동안 마물들을 도륙하고, 말을 달려 할룬스타드로 돌아온 뒤엔 벨바헨과 결투를 앞두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 시체가 오는군.”


카이만의 말대로 헤르베르트가 종자 하나를 대동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이고르가 그에 더 가까웠다. 칙칙한 회색 갑옷은 빛을 삼켜 그늘에 잠긴 듯 보였고, 한쪽 어깨엔 새까만 케이프를 드리우고 있었다.


투구는 착용하지 않고 머리를 드러냈는데, 이건 그가 이고르의 칼이 지닌 속성을 파악하고 있는 때문이었다. 제멋대로 휘어지는 칼을 상대하려면 시야가 제한 받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당당한 걸음걸이는 개선장군의 그것이었다.


관중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바르발라의 영웅을 연호하는 소리와 목청을 돋워 부르는 군가가 얼어붙은 공기를 쟁쟁하게 때렸다. 국왕의 시종이 손짓으로 이고르와 헤르베르트를 가운데로 불렀다.


“무기를 모두 이 위에 내려놓으십시오.”


시종이 엄숙하게 탁자 위를 가리켰다.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이고르가 비요른을 처음 알현하던 당시 국왕을 보좌하고 있던 시종이었다. 비요른은 시종 뒤에서 종자들이 탁자와 함께 내어온 의자 위에 모피를 두른 채 앉아 있었다.


이고르는 반으로 접은 칼과 단도를 올려놓았다. 헤르베르트는 예의 여러 개의 추가 달린 플레일과 케이프 속에 감추고 있던 브로드소드를 꺼내 올려놓았다.


불행히도 이고르는 그의 검술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지 확인할 기회가 없었고, 헤르베르트 역시 그 점을 알고서 브로드소드를 가져온 것이었다.


“더 없습니까?”


시종이 이고르의 무기에 달린 이색적인 장치들을 곁눈질로 살피며 물었다. 헤르베르트가 건틀릿에 숨겨두고 있던 단검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지금 올려두신 무기 외에 다른 것을 결투 중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정해진 반경을 벗어나서도 안 되며, 독을 바른 무기 혹은 사출식의 무기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지형지물을 활용할 수 있지만 여기엔 인공적인 물건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군중들을 도발해서도 안 되며, 그들에게 어떤 해를 가해서도 안 됩니다. 이상 말씀드린 사항을 적극적 고의로써 위반하는 경우 그 즉시 패배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두 분 모두 이해하셨습니까?”

“이해했습니다.”


이고르가 답했다. 헤르베르트는 그토록 명확히 설명했는데 이해하지 않고 배기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소리 내어 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했소.”

“서로의 무기를 눈으로 확인하십시오.”


이고르는 헤르베르트의 무기를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플레일에는 다섯 갈래의 사슬과 마찬가지로 다섯 개의 추가 달려 있었고, 브로드소드는 팔보다 조금 더 길고 폭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였다. 장식 없이 온전히 실용적인 검이었다. 이고르는 손잡이의 닳은 정도로 헤르베르트의 검술을 짐작할 뿐이었다.


“체렌도프 엽사께서 주장하신 벨바헨 경의 죄목에 대한 처벌은 사형에 해당합니다. 고발의 내용을 변경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고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고발당한 이는 죽어 마땅했고, 거짓이라면 고발자가 피고발자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므로 역시 죽음으로 갚아야 했다. 시종이 이번에는 헤르베르트에게 말했다.


“록펠트 왕국의 존경 받는 기사로서 벨바헨 경께선 존귀하신 비요른 국왕 전하의 자비로운 보살피심 아래 공정한 재판과 최선의 변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이 권리를 포기하시고 결투로써 시비와 진위를 가리는 데에 동의하시겠습니까?”

“동의하다마다.”

“그럼 결투는 어느 한쪽이 숨을 거두게 될 때까지 일체의 지연과 지체, 그리고 중단 없이 진행됩니다. 항거 불능으로 인한 항복과 포기 선언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항을 위반한 경우 그 위반 내용이 중하지 않을 때는 입회인의 통제 아래 결투가 재개되며, 만약 중할 경우 패배가 인정되어 그 위반자는 처형됩니다. 이제 무기를 패용하셔도 좋습니다.”


시종이 뒤로 물러나고, 비요른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왕은 이 결투의 입회인이었다.


“위치로.”


국왕의 소년처럼 철없이 말간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드러났다. 비요른이 고대해 온 사냥꾼과 기사의 대결은 바로 이런 것이었을 터였다. 이고르는 사냥꾼을 수사에 끌어들인 국새경이 지금 국왕 앞에 무릎을 꿇으면 용서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고르와 헤르베르트가 등지고 각자의 자리를 향해 걸어가자 소란이 더해졌다. 이 땅에선 정의도 유흥이었다. 아니, 어느 곳에서건 항상 그래 왔다. 이고르는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알았다. 몸을 덥히는 전투의 예감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유열은 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


이고르와 헤르베르트가 마주 섰다. 종자들이 둥그렇게 치운 눈이 결투와 관람의 영역을 구획했다. 이고르는 성한 오른발로 땅의 감촉을 확인했다. 헤르베르트는 오른손엔 플레일을, 케이프로 가린 왼손엔 브로드소드를 쥐고 있었다.


품을 더듬어 단도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전투에 앞서 이고르가 치르는 작은 의식이었다. 내뿜은 숨이 하얀 김으로 흘러나왔다. 비요른이 수발총(燧發銃)을 들어올렸다. 총성을 들었나? 이고르는 확신하지 못했다.


함성, 야유, 그리고 정숙을 명하는 목소리,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는 사람들, 마치 손의 연장(延長)인 듯 헤르베르트의 팔 끝에서 절그럭거리는 다섯 갈래의 사슬······. 과잉된 현실이 도리어 비현실적이었다. 숨 막히는 한기. 불운한 새가 총탄을 맞고 결투장의 한가운데에 추락했다.


철컥-


이고르는 손잡이의 장치를 조작해 칼을 펼쳤다. 한다, 한다, 하고 숨죽여 말하는 소리가 둘을 둘러쌌다. 그래, 한다. 이고르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더디게 다가갔다. 격돌의 순간은 빠르게 닥쳐왔다.


헤르베르트가 플레일을 휘두르고 이고르가 칼을 들어 막았다. 사슬이 칼을 휘감기 전에 이고르가 칼날을 미끄러트리며 빼냈다. 밤을 떼어낸 듯 어둠의 한 자락이 일순 시야를 흩트리고 브로드소드가 이고르의 겨드랑이 아래를 긋고 지나갔다.


이고르가 얼른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반격을 꾀했다. 칼끝에 걸리는 느낌이 없었다. 플레일의 추가 오른 허벅지를 때렸다. 힘과 긴장을 담아 수축되었던 근육이 충격으로 비명을 질렀다. 자세를 바로잡았을 때 헤르베르트는 이미 물러나 있었다.


얕봤나? 이고르는 숨을 고르며 오른팔을 움직여 보았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철편을 덧댄 가죽 흉갑이 아직은 제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 더 부딪히면 헤르베르트도 곧 이고르의 방어구와 그 허점을 파악할 것이었다.


이고르가 입고 있는 외투는 주요 관절을 보호할 뿐이었고 가죽 흉갑도 상반신의 앞부분만 감싸고 있었다. 변칙적인 일격이 주안인 이고르의 검술이 신속한 움직임에 기반을 두고 있는 탓이었다.


그리고 부상으로 몸이 굼뜬 지금 기량의 절반도 펼칠 수 없는 형편에 더해 방어가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헤르베르트가 다시금 기세를 올려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플레일을 앞세우는 대신 완전히 브로드소드 검술의 공격 자세를 취하며 찔러 들어왔다.


“흡-!”


변칙을 장기로 삼는 건 이고르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처럼 공격 도중에 무기를 바꾸리라는 예상을 간파한 듯이 헤르베르트는 오로지 브로드소드만으로 이고르의 어깨를 찔러 균형을 무너뜨리고 이어 손목을 베었다.


지난한 싸움도 졸전일 테지만 구경거리를 기대하고 있는 이들에겐 확연한 실력의 차이로 초반부터 승패가 판가름 나는 싸움도 졸전이긴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고르를 향한 야유가 쏟아졌다. 또 한 번 칼을 주고받으며 이고르는 헤르베르트가 자신과는 달리 감호소에서 모든 힘을 쏟아내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현명한 처사였다. 헤르베르트가 조롱하듯이 발치에 놓인 죽은 새를 걷어차서 이고르에게 날려 보냈다. 조류의 사체가 절망적인 비행을 시도하다가 이고르의 몸에 맞고 다시 떨어졌다. 우스울 것 하나 없는 상황에서도 관중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말해봐. 넌 사냥단 중에서 몇 번째지?”

“뭐?”

“몇 번째로 강한 사냥꾼이냔 말이야.”

“뒤에서 다섯 번째쯤.”


헤르베르트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이번엔 양손에 든 무기를 모두 활용한 공격을 펼쳤다. 그의 몸은 마치 반반이 따로 노는 것만 같았다. 이고르는 공격을 칼날의 넓은 면으로 흘리고 손잡이로 헤르베르트의 얼굴을 강타했다.


헤르베르트가 손등으로 한쪽 콧구멍을 막고 코를 풀었다. 코피가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이고르의 왼팔이 축 늘어졌다. 감호소에서 마물과 싸우던 중 한 번 빠졌던 어깨가 플레일의 사슬에 휘감겨 또 다시 탈골되었다.


“이 따위 실력으로 용케 살아남았군.”


이고르는 헤르베르트의 주도면밀함에 치를 떨었다. 감호소의 난전에서 이고르가 용을 쓰는 동안 헤르베르트는 그의 부상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고르는 몸 안에 가득 차있던 헛숨을 길게 내뱉었다.


손잡이의 두 번째 장치를 풀며 이고르가 또렷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래. 그리고 지금도 그럴 거야.”

20190909_153826.jpg


작가의말

이고르가 사용하는 무기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 구상 당시 적어두었던 메모 일부를 첨부했습니다. - 2019.09.09.16:27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9.09.09 08:20
    No. 1

    이고르가 너덜너덜해요 ㅜ ㅜ 힘내 이고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4 아히ㅡ
    작성일
    19.09.09 12:05
    No. 2

    템빨을 보여줘 이고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7 Kihano
    작성일
    19.09.09 13:44
    No. 3

    이고르칼은 항상 머릿속에 상상이 잘안되네요. 삽화같은건 힘드시겠죠 작가님?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이단영
    작성일
    19.09.09 16:31
    No. 4

    급한 대로 작품 구상 노트에 적어두었던 메모를 본문 아래에 첨부하였습니다. 모양새를 눈여겨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휘두르는 방향을 향해 휘어지며 상대를 '그러안는' 듯한 공격을 하는 무기라는 것이 구상 당시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제 메모를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그림 실력이 영 형편없는 터라 말씀하신 대로 삽화는 어렵겠고, 조금 더 자세한 작동법 등은 시간과 능력이 허락하는 대로 공지를 통해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3 la******..
    작성일
    19.09.09 14:13
    No. 5

    크으, 이런 결투 장면이라니, 다음 화를 기다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8 Fenix11
    작성일
    19.09.09 17:06
    No. 6

    이고르 화이팅입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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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기사들의 시대 - 14. 괴물의 항변(1) +3 19.08.13 342 19 16쪽
43 기사들의 시대 - 13. 덫에 걸린 사냥꾼(3) +3 19.08.12 314 22 12쪽
42 기사들의 시대 - 13. 덫에 걸린 사냥꾼(2) +5 19.08.09 327 21 12쪽
41 기사들의 시대 - 13. 덫에 걸린 사냥꾼(1) +4 19.08.08 325 21 14쪽
40 기사들의 시대 - 12. 함정의 설계자들(3) +3 19.08.06 318 25 13쪽
39 기사들의 시대 - 12. 함정의 설계자들(2) +3 19.08.05 301 24 15쪽
38 기사들의 시대 - 12. 함정의 설계자들(1) +9 19.08.02 359 19 12쪽
37 기사들의 시대 - 11. 배신과 올가미(4) +4 19.08.01 391 24 14쪽
36 기사들의 시대 - 11. 배신과 올가미(3) +2 19.07.30 318 27 13쪽
35 기사들의 시대 - 11. 배신과 올가미(2) +4 19.07.29 353 26 14쪽
34 카이만의 수첩 - 인물편 +3 19.07.28 379 23 15쪽
33 기사들의 시대 - 11. 배신과 올가미(1) +4 19.07.26 443 20 12쪽
32 기사들의 시대 - 10. 지옥은 비어있다(4) +5 19.07.25 342 24 12쪽
31 기사들의 시대 - 10. 지옥은 비어있다(3) +1 19.07.23 377 25 12쪽
30 기사들의 시대 - 10. 지옥은 비어있다(2) 19.07.22 322 24 13쪽
29 기사들의 시대 - 10. 지옥은 비어있다(1) +2 19.07.19 403 21 13쪽
28 기사들의 시대 - 9. 우리를 미행하는 음악(3) +5 19.07.18 369 24 13쪽
27 기사들의 시대 - 9. 우리를 미행하는 음악(2) +2 19.07.16 363 23 15쪽
26 기사들의 시대 - 9. 우리를 미행하는 음악(1) 19.07.15 378 21 13쪽
25 기사들의 시대 - 8. 당신의 이름(2) +5 19.07.05 372 21 17쪽
24 기사들의 시대 - 8. 당신의 이름(1) +6 19.07.04 368 23 12쪽
23 기사들의 시대 - 7. 빛으로부터의 유배(3) +4 19.07.02 387 20 13쪽
22 기사들의 시대 - 7. 빛으로부터의 유배(2) +3 19.07.01 346 22 16쪽
21 기사들의 시대 - 7. 빛으로부터의 유배(1) +4 19.06.28 414 25 16쪽
20 기사들의 시대 - 6. 달은 밤에 뜨는 태양(3) +1 19.06.27 408 23 14쪽
19 기사들의 시대 - 6. 달은 밤에 뜨는 태양(2) +3 19.06.25 446 24 14쪽
18 기사들의 시대 - 6. 달은 밤에 뜨는 태양(1) +4 19.06.24 646 22 15쪽
17 기사들의 시대 - 5. 더러운 진실(3) +5 19.06.21 419 26 15쪽
16 기사들의 시대 - 5. 더러운 진실(2) +5 19.06.20 397 22 15쪽
15 기사들의 시대 - 5. 더러운 진실(1) +1 19.06.18 498 28 14쪽
14 기사들의 시대 - 4. 옷장 속의 해골(4) +3 19.06.17 386 29 16쪽
13 기사들의 시대 - 4. 옷장 속의 해골(3) +7 19.06.14 403 29 13쪽
12 기사들의 시대 - 4. 옷장 속의 해골(2) +2 19.06.13 429 24 13쪽
11 기사들의 시대 - 4. 옷장 속의 해골(1) +1 19.06.11 501 27 15쪽
10 기사들의 시대 - 3. 공모자들의 도시(3) +3 19.06.10 494 28 15쪽
9 기사들의 시대 - 3. 공모자들의 도시(2) +1 19.06.07 476 26 13쪽
8 기사들의 시대 - 3. 공모자들의 도시(1) +2 19.06.06 525 26 13쪽
7 기사들의 시대 - 2. 불완전한 목격자(3) +2 19.06.04 475 32 18쪽
6 기사들의 시대 - 2. 불완전한 목격자(2) +5 19.06.03 538 28 14쪽
5 기사들의 시대 - 2. 불완전한 목격자(1) +3 19.05.31 640 32 12쪽
4 기사들의 시대 - 1. 필요한 모든 것(3) +3 19.05.30 743 31 17쪽
3 기사들의 시대 - 1. 필요한 모든 것(2) +2 19.05.28 841 27 13쪽
2 기사들의 시대 - 1. 필요한 모든 것(1) +7 19.05.27 1,288 36 15쪽
1 기사들의 시대 - 프롤로그. 사자의 전언 +15 19.05.27 2,448 4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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