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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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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l
그림/삽화
EOL
작품등록일 :
2019.05.26 18:45
최근연재일 :
2019.12.30 21:57
연재수 :
71 회
조회수 :
1,681
추천수 :
7
글자수 :
295,875

작성
19.08.04 03:17
조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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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8쪽

검은 왕국(1)

DUMMY

말이 냇가에서 물을 마시는 와중에는 나는 흑탄을 신은 듯 그새 까매진 발바닥을 씻어냈다. 사내가 내게 제 신발을 벗겨주는 배려를 하진 않았지만, 그가 계속 날 말에 태운 채 움직였기에 거친 숲길을 걸어온 것치곤 내 발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물론 장시간 승마를 하다 보니 허리가 뻐근하고 허벅지 안쪽이 쓰렸지만, 맨발로 거친 길을 지나는 것보단 그게 나았다.


매끄럽지 않았던 시작과는 달리 호커스와의 동행 길은 그저 순조롭고 평탄하기만 했다. 곧 나타날 것처럼 위기감을 일으키던 에눌리아의 병사들이 잘못된 정보를 듣고 반대편으로 간 건지 숨막히는 추격전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사실 개구리와 토끼 고기를 먹어야 하는 식단이 처음에는 곤욕스럽기도 했지만, 그조차도 이젠 익숙해진 나는, 항상 고기를 깨끗이 발라먹지 못하는 호커스가 넘긴 뼈까지 빨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와의 예정이 거칠기도 했지만, 그는 매일 나를 냇가에서 씻겼고, 이미 아버지였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의 손길은 꽤 섬세하고 다정했다. 그래서 가끔은, 호진이 떠올라 괜히 울적해지기도 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말 위에 나를 올려주는 그의 익숙한 손길에 몸을 맡긴 채로 물었다. 내가 말을 시키지 않는 한 과묵하기 그지없는 남자였지만 나는 이제 그에게 말 거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검은 왕국.”


그는 피식 웃으며 내 발에 묻은 물기를 어깨에 두른 천 쪼가리로 닦아냈다.


말고삐를 쥔 그는 첫날과는 다르게 내 말에 오르지 않은 채 옆에서 걸어갔는데, 그가 내 곁에서 걸어갈 때면 나는 더 자주 그에게 말을 걸곤 했다. 검은 왕국에 대해 곧장 묻자 그는 가보면 안다며 간단하게 대꾸했고,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나는 계속 그 질문을 반복했다. 귀찮은 법도 하건만 그는 내 질문을 아예 무시하는 대신 같은 대답을 기계적으로 해줬다. 그 놀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했던 수많은 질문이 무색하게도 몇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달한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숲을 지나자 정면으로 펼쳐진 도시의 성벽은 기괴하게 느껴질 만큼 검게 칠해져 있었는데, 멀리서 보기에는 그 모습이 마치 태양에 그을려 검게 타버린 것 같았고 흉흉한 기운을 뿜어냈다. 돌벽 하나하나에 내가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이에 왕도에 들어선 우리는 나무문이 날아간 성문을 지났고 가까이서 벽을 보니 그것은 검은 칠이 아니라 흑연 가루 같은 것에 뒤덮인 것이었다. 말에서 내리기를 주저한 나는 도시의 돌벽에 슬쩍 손을 대보았고, 손에 검은 뭔가가 묻어나며 순식간에 일어난 검은 가루들이 내 얼굴을 덮쳐왔다.


콜록, 콜록!


나는 독가스라도 들이킨 듯 코끝이 시큰해져 얼굴을 찌푸리다가 내 손가락 끝에 묻어난 검은 것들을 다른 손가락을 만져보았다.


“이건 뭐죠?”


검은 폐허들 사이에 자리 잡은 돌계단도 까맣게 그을리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말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말발굽을 움직일 때마다 검은 가루들이 피어올라 낯선 방문객들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건물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시내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귀신들이 똬리를 틀은 듯한 검고 곧은 왕도의 끝에는 루시안의 양식과는 판이하며 지붕이 돔으로 된 낮은 성과 성전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그것들 역시 다른 건물들처럼 검게 그을려 있었다.


“화재가 났었나요?”


나는 그리 물으면서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불이 났다면 성벽과 건물들이 저리 멀쩡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내 말에 답을 주지 않은 채 능숙하게 길을 지나며 굽이진 돌계단을 건너던 그는 마침내 입구가 검은 천으로 뒤덮인 주인 없는 집에 도착했다.


아래층에 식당이 있는 가정집의 내부는 건너온 길목의 벽들처럼 검은 가루들이 겹겹이 뒤덮여 있진 않았는데, 약간씩 기울어진 가구들의 위치가 어긋나있어 단정하다는 느낌을 주진 못했다. 겉보기에는 아담하던 것과는 달리 꽤 넓은 거실을 가진 집에는 주위를 밝힐만한 샹들리에가 달려있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들어온 호커스가 커튼을 들춰내며 네모난 창으로 빛이 쏟아졌고, 그제야 안심한 나는 그곳으로 발을 디뎠다. 돌다리와 연결된 채로 계단이 없는 집에는 세 개의 방이 있었는데, 내가 그 안을 둘러보려 문고리에 손을 대자 호커스가 고개를 저으며 서랍장에서 익숙하게 마석이 달린 라이터를 꺼내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는 검은 얼룩이 군데군데 진 소파에 사선으로 누웠다. 다른 장식장의 서랍에서 시가를 꺼내 든 그는 담배를 물고 다리를 불량하게 꼬았다.


“남의 집에서 이러시면 안 되죠!”


내가 날 선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내 집인데.”


설마 이곳이 그가 말했던 그 몰락한 왕국인 건가? 이 집이 그가 그의 가족들과 살았던 공간이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그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꼬맹아, 배 안 고프냐?”


귀찮은 날 떼어놓을 묘략을 떠올린 그가 내 외투 주머니로 손을 넣어 순식간에 금화단지를 꺼내고는 그것에서 고작 금화 두 개를 꺼내 선심 쓰듯 내 손에 쥐여 줬다.


“내 이름 대면서, 먹을 것 좀 사와.”

“아저씨도 돈 있잖아요!”


내 반발에 그가 혀를 끌끌 찼다. “넌, 노예가 재산 있는 거 봤냐? 넌 내 상품이니까, 이것도 내 것이지.”


난 아직 노예가 아니라며 그 말을 받아치려다가 그와 실랑이를 벌여봐야 얻을 게 없다는 생각에 입안 쪽을 꽉 깨물어 화를 식혔다.


“어디로 가야 하는데요? 이런 곳에 가게가 있긴 해요?”

“광장 주변에 있는 도서관 지하에 암거래 시장이 있어. 다른 건 구경할 필요도 없고 마물고기나 몇 근사와. 아마 귀찮게 하는 인간들이 꼬일 텐데.......”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곤 내 등 뒤에 매어진 검자루를 톡톡 치며 싱긋 웃었다.


“우리 꼬마 기사님한테는 한 입 거리일 거야.”


그는 날 놀리고 있었다. 자기는-하고 따지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범죄자들이 그를 귀찮게 하면 말 그대로 그들을 날려버렸을 것이었다.


-


보란 듯이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생각에 나는 조급한 걸음으로 광장에 도달했다.


그가 알려준 대로 검게 그을린 동상이 세워진 광장의 주변에서 입구에 양쪽으로 돌기둥이 조각된 도서관 건물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검게 변한 건물 외벽과 달리 내부에는 매끈한 하얀 대리석이 깔려 밝은 빛이 반사돼 비치며 화사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바닥에는 검은 사람 발자국들이 떼처럼 묻어 있어 지하로 향하는 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겹겹이 놓인 나무책장들을 가로질러 가던 나는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로 시선이 꽂혔다. 루시안의 언어와는 다른 다소 투박해 보이는 문자가 새겨진 책들을 멀찍이 서서 구경하던 나는 별생각 없이 표지에 갈기없는 호랑이가 그려진 책을 꺼내 들었다. 내가 평소에 읽던 것들보다 얇고 가벼운 검은 표지의 책에는 듬성듬성 삽화가 섞여 있었는데, 고대인들이 흑백으로 그려진 삽화들를 띄엄띄엄 넘겨보던 나는 맨 뒤에 있는 삽화 하나를 보고는 어깨를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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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7) 19.12.30 10 0 13쪽
70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6) 19.12.06 11 0 9쪽
69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5) 19.11.25 13 0 11쪽
68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4) 19.11.09 13 0 11쪽
67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3) 19.11.03 12 0 10쪽
66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2) 19.10.19 12 0 8쪽
65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1) 19.10.09 8 0 9쪽
64 악마의 사생아(2) 19.09.23 12 0 10쪽
63 악마의 사생아(1) 19.09.16 11 0 9쪽
62 경매장(7) 19.09.11 17 0 12쪽
61 경매장(6) 19.08.29 17 0 7쪽
60 경매장(5) 19.08.26 22 0 8쪽
59 경매장(4) 19.08.25 15 0 8쪽
58 경매장(3) 19.08.23 19 0 8쪽
57 경매장(2) 19.08.22 21 0 8쪽
56 경매장(1) 19.08.21 15 0 10쪽
55 검은 왕국(5) 19.08.20 15 0 8쪽
54 검은 왕국(4) 19.08.18 16 0 7쪽
53 검은 왕국(3) 19.08.15 14 0 11쪽
52 검은 왕국(2) 19.08.08 28 0 10쪽
» 검은 왕국(1) 19.08.04 16 0 8쪽
50 숙부(7) 19.07.29 15 0 8쪽
49 숙부(6) 19.07.28 20 0 8쪽
48 숙부(5) 19.07.22 18 0 7쪽
47 숙부(4) 19.07.21 25 0 7쪽
46 숙부(3) 19.07.15 25 0 7쪽
45 숙부(2) 19.07.14 26 0 9쪽
44 숙부(1) 19.07.13 32 0 7쪽
43 별들의 방랑자 (2부 프롤로그) 19.07.08 41 0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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