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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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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l
그림/삽화
EOL
작품등록일 :
2019.05.26 18:45
최근연재일 :
2019.12.30 21:57
연재수 :
7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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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
추천수 :
7
글자수 :
295,875

작성
19.08.21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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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경매장(1)

DUMMY

나와 에일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검은자와 붉은자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검은 쪽을 닮는 일은 드물었기에 아마도 아이는 에일을 닮은 청백색 머리카락에 잘 웃는 푸른 눈동자를 가질 것이었다. 어쩌면 아들이 태어나 눈동자 색이 레온과 같은 청록일 수도 있었다. 봄의 싱그러운 이파리를 연상시키는 생기있는 눈을 떠올리니, 남자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친구 사이에 아이를 가지는 것은 퍽 어색하고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몰려와 이런 망상에 사로잡혔던 내 모습이 익숙지 않았다.

호커스에게 노예 성혼이니, 뭐니 하는 기이한 얘기를 듣고,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순혈 사이의 혼혈아를 보니 이런 이상한 망상에 빠지는 듯했다. 그런데 그 망상이 약간도 역겹거나 거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생각은 낙관으로 가득 찬 쪽이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에일과 나의 관계는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 것이며, 그녀와 계속 살을 부대끼며 살다 보면 어쩌면 내게도 그 쑥스럽고 어색한 감정이 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괴물보단 나을 것이다.


“호커스,”


내 부름에 뒤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나를 항상 말 머리 쪽에 태웠는데, 나는 말 위에서 잠이 쏟아질 때마다 그의 가슴팍에 기대 졸곤 했다.


“클라라는 어떤 분이셨어요?”


그는 이렇게 말 거는 게 질리지도 않느냐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예쁜 여자였지.”

“그게 끝이에요?”

“잘 울었지, 그녀가 운 날에는 난 곱빼기로 얻어맞았고 말이야.”

“그럼, 그녀가 미워요?”


사네는 내 질문에 전부 답해주는 건 아니었지만, 어떤 민감한 질문을 하든 화를 내는 일은 없었기에 나는 거침없이 물었다.


“딱히.” 그는 말고삐를 왼쪽으로 당기며 무성의하게 말했다.

“그녀와 검은 왕국은 왜 같이 가게 됐어요?”


내 질문에 그는 그런 것까지 뭣 하러 묻느냐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난 그다음 날 짐가방을 메고 에눌리아를 나갈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 아가씨가 잡더라고. 그날도 그렇게 울었는데, 울면서 나한테 무릎까지 꿇며 빌더라고. 제가 미안했다고, 더 잘하겠다고.”


“그래서요?” 내가 추임새를 넣듯 물었다.


“당신한테 딱히 불만은 없고, 다만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확실하게 말해줬지.”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온정을 호소하는 여자에게 저 무심한 얼굴로 말하는 모습이 빤히 그려졌다. 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두 아들까지 데리고 날 쫓아오더라고. 처음엔 방황했지. 당연한 일이지, 우리 같은 경우가 흔하지도 않거니와. 붉은자와 검은자가 함께 살만한 곳도 마땅히 없었으니까. 그러던 중에 그녀가 어디서 알아냈는지 검은 왕국에 대해 먼저 얘기했고, 일이 그렇게 된 거지.”


“그 일로 너무 자책하진 마세요. 그 왕국이 그렇게 된 게 호커스, 잘못도 아니잖아요.”


호커스는 그 말에 특유의 웃음소리를 냈다. “웃기는 소릴 하네. 자책은 무슨.”


검은 왕국에서의 일을 겪고 시궁창의 쥐들끼리 뭉치듯 우리는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내가 질문만 하면 그는 웬만한 선에서는 저에 관한 얘기를 숨기지 않고 털어놨는데, 이렇게 계속 지내면 언젠간 그도 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먼저 말을 걸어올지도 모르겠다. 물론 난 그처럼 검정이 실리지 않은 딱딱한 목소리로는 단 한 시간도 얘기를 못 하겠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우린 퍽 좋은 파트너로 거듭나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니, 문이 열리기 전까지만 그와 함께 여정을 다니는 것도 꽤 즐거울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라면........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괴물이 된 나를 벨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 어깨는 침울하게 늘어졌다. 호커스 손에 죽는 게 딱히 싫은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선택이 무척 이기적인 것 같았다. 그가 나를 그렇게 죽이고 나서 또 후유증이 남지 않을 리란 확신은 서지 않았다. 가족이 죽은 지 6년이 넘어가는 데도 폐인처럼 그 집에 머무르던 그였다. 어릴 적의 상처로 여전히 경기를 일으키고, 눈물만 봐도 안색이 희게 질려버리는 그였다. 어쩌면 그는 웃는 낯으로 날 보내고, 제가 뭘 잃었는지도 모른 채 제 목에 칼을 들이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와 나의 관계는, 그런 염려가 민망할 만큼 아직 깊은 골이 있었지만, 그렇게 되는 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그가 누누이 언급하는 것보단 그가 사랑에 약간은 더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제 몸에 남겨진 흉터와 비슷한 아들 팔의 상처를 보고,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존재의 목을 꺾은 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그 속에 미친 광기가 서려 있지만, 그것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건 변치 않는 진실일 것이다.


“호커스,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말을 멈춰 세운 그가 야영을 위해 땔감을 줍던 와중에 내가 대뜸 물었다.


“너도 그 답을 이미 알 텐데?”


그가 수수께끼를 내듯 대꾸하자, 언덕배기 너머로 불빛이 부서지는 황야의 도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막의 오아시스? 카트라?” 그러다 오싹한 예감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날 파실 작정이에요?”

“난 빈말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는 쫑알대는 내가 귀엽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전 아저씨를 구했어요!” 목에 힘을 줘 말했다.

“난 너에게 누누이 말했지. 난 널 팔 거라고.”

“날 굳이 팔아서 아저씨가 얻는 게 뭔데요?”

“당분간 풀칠할 금화를 얻고, 시끄럽게 떠들고 그만큼 처먹는 입이 하나 줄겠지.”

“아저씨는 그런 데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는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불만이면, 지금 당장 도망쳐. 난 딱히 널 잡을 생각도 없으니까.”


내가 침을 꼴깍 삼키며 어디가 어딘지 방향감각도 안 잡히는 주위를 둘러보자, 그가 한쪽 입꼬리를 쓸어올렸다.


“못 떠나잖아, 안 그래? 너도 은연중에 알고 있겠지. 너 혼자서는 결코 그들을 피할 수 없고, 너 같은 괴물 놈은 세상에 함부로 나다니면 안 된다는 걸. 넌 계속 아닌 척하지만, 피를 보고 희열을 느끼는 내 본성이 마냥 무서워서 누가 고삐라도 쥐여주길 바라잖아? 안 그래?”

“아니요, 전 그런 적 없어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넌 웃었어. 내가 봤지.”

“아저씨가 뭘 봤다고요?”

“검은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미소. 장사치들이 널 조금은 거칠게 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야, 넌 어리니까 곧 좋은 새 주인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가 타이르듯 말하자 나는 비아냥댔다.


“절 패고, 매질할 주인이요?”

“그렇게라도 사람 구실 하게 되면 감사히 여겨야지.”

“아니요, 그런 건 사람이 아니에요! 그들이 우릴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대하는 거라고요! 사람으로 대한다면,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럴 수는....그럴 수는.....”


나와 자신이 같다고 말하던 소녀가 떠올랐다. 나를 친구라고 당당하게 말해주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내가 뭘 못 하겠는가. 그녀가 원한다면 살점도 떼어 팔 수 있는데, 요리들이 식탁에 올라온 것처럼 단상에 올라 난도질당하고 팔리는 것쯤은, 그녀와 멀어지기 위해 결코 그녀와 같을 순 없지만,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는 일쯤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난 무엇보다 그의 손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다. 각오도 없다. 아마도 난 그가 날 꽁꽁 묶은 줄은 노예 상인들에게 넘길 때까지 칭얼대는 것밖에 못 할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검은 왕국에서 가져왔던 작은 책을 노예시장에서도 가지고 있을 수 있느냐고, 호커스에게 물어봤다. 호커스는 자신이 그들을 좀 안다며 그 정도는 자신이 부탁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퍽 웃긴 상황이지만, 밧줄에 몸이 묶인 나는 그 말에 안도했다.


“꼬마야, 세 가지만 명심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말했다.


“어디 연구소는 안 돼, 붉은 낙인이 찍히는 것도 안 돼.”

“붉은 낙인이요?”


그 질문에 그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어쨌든 그들이 저런 소리를 약간이라도 흘리면, 어떻게든 빠져나와.”


‘그게 어디 쉬운가요?’ 하고 불평하려다 나는 입을 닫았다.


“세 번째는 뭐예요?”


내 질문에 그는 선뜻 답하지 못하고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너 혹시, 그 ‘짓’할 줄 아냐?”

“그 짓?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들어요?”

“알 리가 없지, 과부는 피해야겠네.”


그는 그리 말하며 내 이마를 톡 쳤는데, 잠시 미간을 짚고는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꼬마야. 너한테 이런 얘기해준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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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7) 19.12.30 10 0 13쪽
70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6) 19.12.06 11 0 9쪽
69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5) 19.11.25 13 0 11쪽
68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4) 19.11.09 13 0 11쪽
67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3) 19.11.03 12 0 10쪽
66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2) 19.10.19 12 0 8쪽
65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1) 19.10.09 8 0 9쪽
64 악마의 사생아(2) 19.09.23 12 0 10쪽
63 악마의 사생아(1) 19.09.16 12 0 9쪽
62 경매장(7) 19.09.11 17 0 12쪽
61 경매장(6) 19.08.29 17 0 7쪽
60 경매장(5) 19.08.26 22 0 8쪽
59 경매장(4) 19.08.25 15 0 8쪽
58 경매장(3) 19.08.23 19 0 8쪽
57 경매장(2) 19.08.22 21 0 8쪽
» 경매장(1) 19.08.21 16 0 10쪽
55 검은 왕국(5) 19.08.20 15 0 8쪽
54 검은 왕국(4) 19.08.18 16 0 7쪽
53 검은 왕국(3) 19.08.15 14 0 11쪽
52 검은 왕국(2) 19.08.08 28 0 10쪽
51 검은 왕국(1) 19.08.04 16 0 8쪽
50 숙부(7) 19.07.29 15 0 8쪽
49 숙부(6) 19.07.28 20 0 8쪽
48 숙부(5) 19.07.22 18 0 7쪽
47 숙부(4) 19.07.21 25 0 7쪽
46 숙부(3) 19.07.15 25 0 7쪽
45 숙부(2) 19.07.14 26 0 9쪽
44 숙부(1) 19.07.13 33 0 7쪽
43 별들의 방랑자 (2부 프롤로그) 19.07.08 41 0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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