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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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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l
그림/삽화
EOL
작품등록일 :
2019.05.26 18:45
최근연재일 :
2019.12.06 00:36
연재수 :
70 회
조회수 :
1,632
추천수 :
6
글자수 :
289,774

작성
19.09.23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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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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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악마의 사생아(2)

DUMMY

사내들의 머리가 떨어지는 광경에 위기감 없이 심취해있던 날 일깨운 건, 소녀의 목소리였다.


“야! 이 멍청아! 도망치지 않고 멀뚱히 뭐 하는 거야!”


경매장을 벗어나려는 귀족 무리에 휩쓸려 점점 옆으로 밀려나던 페렐레는 양손을 입에 둥글게 모은 채 소리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나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로운이 여전히 내 옷가지를 쥐고 있어 망설였지만, 그런 머뭇거림을 눈치챈 페렐레가 다시 말했다.


“멍청아! 지금 그 꼬마 신경 쓸 때야?”


군중 사이를 겨우 헤치고 무대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내 발목을 움켜잡고 흔들었다. 나를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다가온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다가도, 그녀의 말 중에 틀린 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나와 마주했던 르뱅크의 눈에는 살의가 가득 담겨있었으며, 기껏 구하러 온 로운을 헤칠 일도 없었다. 이 겁먹은 꼬마보다 위험한 건 나와 다른 귀족들이었다.


내 몸을 끌어안던 아이를 다소 거칠게 떼어낸 나는 붉은 웅덩이들이 생겨난 무대를 가로질러 계단을 내려왔다. 그 와중에도 소란은 계속돼 화려한 차림새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큰길을 따라갔고, 인간의 멱따이는 소리는 약간의 자비와 망설임도 없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무대에서 내려오자, 그녀는 안심한 듯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렇게 불편하고 이질적인 포옹은 처음이었지만, 그녀의 떨리는 손마디에 기분이 상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체온이 에일의 것처럼 차가웠기 때문일까? 그녀는 더는 말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끌었는데, 나는 그것 역시 뿌리치지 못하고 따라갔다.


“넌 정말! 사람을 귀찮게 하는 머저리야!”


흙길을 지나자 그녀는 연신 씩씩거렸다. 흙탕물에 맨발이 닿을 때마다 쓸린 상처들에 이물질이 스미며 새삼 쓰라림을 느꼈다.


언덕 너머로 보이는 천막들과 경매장의 크고 작은 무대들이 불길에 휩싸일 때쯤에서야, 나는 다른 노예 아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르뱅크가 그 아이들을 살려줬을지 궁금했다. 혹 그들이 여전히 철창에 갇혀 있다면 그들을 구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다가, 이미 늦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길 가운데 멈춰서 고개를 돌리니 양 뺨으로 화염의 열기가 이글거렸다.


“또 뭐 하는 거야?”


다시 꿈쩍도 않는 내 손을 페렐레가 잡아당겼다.


“아이들, 다른 아이들........”


더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불이 번진 저 망할 곳으로 뛰어들 용기도, 힘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말을 얼추 알아들은 페렐레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시 화를 내거나 이번엔 날 버리고 가버릴 줄 알았는데, 그녀는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해 줬다.


“네 영역을 넘었어, 너는 할 만큼 했다고.”


그 말에 약간 화가 치밀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내가 해낸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것이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녀를 따라 걷는 내내 뒤통수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아이들의 비명을 들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어리석은 미련이라는 걸 알았다. 유리 마차에 도달한 페렐레는 그제야 땀에 젖은 내 손을 놔주고 피범벅이 된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 털털한 모습에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마차 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문을 활짝 열어줬고, 그녀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그녀를 나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스럽다는 듯 귀를 막던 페렐레는 내가 들어오길 망설이자 내 쪽을 쳐다봤다.


그제야 나는 용기를 내 발판을 밟고 들어갔는데, 내부에는 우리 둘 외에도 이미 두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페렐레와 같은 집안사람으로 보이는 여성은 프릴이 찢기고 밑단이 흙범벅이 된 말괄량이 아가씨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느라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왜인지 페렐레의 머리카락을 끄집어당기고 있는 그 새침데기 여성을 보며 백여우가 연상됐다.


백여우의 옆에는 검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무뚝뚝한 얼굴의 사내가 앉아있었는데, 그는 유독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약간 집요하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런 반응이 일반적일 것이었다.


“저 꼬마는 뭐야, 페렛? 그 와중에 저 아이를 주워오다니, 과연 너답다.”


“빨리 마차를 출발시키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작은이모는 르뱅크가 얼마나 막 나가는 놈들인지도 모르는 거야?”


제가 늦게 온 것은 생각도 않고 페렐레는 마차의 등받이에 몸을 거칠게 튕기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백여우도 동의하는지 그녀는 조카와 쓸데없는 입씨름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 시종들에게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그 가운데에 멀뚱히 서 있던 내 몸이 휘청거렸다. 페렐레는 엉망인 차림새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게 제 옆에 앉으라 턱짓했다.


“내가 전에 말했던 그 검은 아이야.”


페렛은 저보다 대여섯 살은 족히 많아 보이는 이모에게 서슴없이 반말했다.


“오호라! 몇 년 전에 정규모임에서 네 엄마랑 루시안 가신들이 그렇게 노발대발했다던?”


그 말에 내 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루시안의 여인은 한쪽 턱을 쥔 채 전에 없던 흥미로운 눈으로 내 검은 눈을 보았다.


그녀는 에일의 곁에 있던 내가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됐는지 묻는 대신에, 다만 이렇게 말했다.


“과연 두 못난이가 그렇게 속앓이를 할 만한데?”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어진 페렐레가 펄쩍 뛰며 화를 냈지만, 백여우는 그런 반응을 원했다는 듯 혼자 낄낄댔다.


더러운 차림새였던 내가 페렐레와 꽤 거리를 두고 앉자 그녀는 조금씩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반쯤 열린 덧창으로 붉은 열기와 검은 연기에 둘러싸인 숲이 서서히 사라지며 나는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깊은 허무함과 이곳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비겁한 안도감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눈꺼풀은 무거웠다. 내가 눈을 감자 페렐레가 내 머리를 약간 기울여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싫어, 얜 내가 발견했으니! 내 것이라고!”


페렐레의 날 선 목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내 처분에 관한 얘기인 듯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라 별로 관심이 생기진 않았다.


“쟬 네 집으로 데려갔다간, 나까지 형부한테 혼나거든!”


“이 망할 아줌마가! 호우한테 눈독 들이지 마! 얜 내꺼라고!”


그 후에도 루시안들은 계속 투닥댔지만, 도중에 다시 깊은 잠에 빠져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진 모르겠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어깨와 무릎을 내줬던 페렐레는 사라진 후였다. 옆으로 누워있던 얼굴 위로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며 나는 간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나 때문에 깬 거니, 호우야?”


화려한 이목구비에 하얀 담비 털을 두른 백여우는 차가운 인상을 주는 미인이었는데, 표정이 다양하고 말투가 상냥해서 순간 에일과 겹쳐 보였다. 내 상태를 확인한 여인은 제 옆에 앉았던 사내에게 나를 일으키라 턱짓하곤 마차에서 내렸다.


올리브 빛 피부에 눈동자 색이 붉은 남자는 마차를 타고 가던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입을 뗀 적이 없어 잠결에라도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우람한 체격에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마치 굳은살이 박인 듯한 얼굴을 보면 낮은 목소리가 어울릴 것 같긴 했다.


남자의 손길은 그가 풍기는 분위기와는 이질적으로 퍽 다정한 쪽이었다. 내 양어깨를 잡아 날 조심스럽게 일으킨 그는 내가 일어서는 일을 도와줬는데, 그의 부축을 받아 겨우 마차에서 내린 나는 스스로 갈 수 있다며 그의 도움을 도중에 거절했다.


마차가 멈춘 곳은 산중에 있어 요양원 같은 느낌을 주는 붉은 별장이었다.


어깨춤에 차는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에 야리야리한 몸을 가진 백여우는 골반을 약간씩 흔들며 돌담길을 걸었고, 그녀에게서 몇 걸음을 떨어진 채 사내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갔다.


“저기, 마차를 태워주신 건 감사한테, 여긴 어디죠?”


내가 사내에게 묻자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날 내려다보았다.


“어머, 호우야. 질문이 있으면 나한테 하렴.”


내 말에 몸을 돌린 그녀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다정히 말했다.


“소개가 늦었지만, 난 ‘루시안 레나’라고 해. 아까 들었겠지만, 페렛의 이모고, 동시에 에일의 이모이기도 하단다.”


그녀가 에일과 가까운 친척이란 사실에 나는 새삼 놀랐다.


“절 에일에게 넘기실 건가요?”


나는 약간의 경계심을 섞어 물었다.


“글쎄, 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지.”


그녀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척 털털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요?”


“그렇게 하지 않겠지.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넌 이곳에 머무를 수 있을 거야. 물론, 밥만 축내는 건 곤란하지만.”


“제가 뭘 해야 하는데요?”


그녀는 그런 걸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밤놀이 어때?”


그녀는 그리 말하며 내가 아닌 내 옆의 사내 쪽을 보며 손가락 끝으로 어깨를 툭 쳤다.


“우리 쫀은 영 덩치값을 못 해서 말이야.”


그녀의 얄궂은 말에 사내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듯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역시 쫀은 괜찮다고 하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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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6) 19.12.06 7 0 9쪽
69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5) 19.11.25 11 0 11쪽
68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4) 19.11.09 12 0 11쪽
67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3) 19.11.03 10 0 10쪽
66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2) 19.10.19 12 0 8쪽
65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1) 19.10.09 8 0 9쪽
» 악마의 사생아(2) 19.09.23 12 0 10쪽
63 악마의 사생아(1) 19.09.16 11 0 9쪽
62 경매장(7) 19.09.11 17 0 12쪽
61 경매장(6) 19.08.29 17 0 7쪽
60 경매장(5) 19.08.26 22 0 8쪽
59 경매장(4) 19.08.25 14 0 8쪽
58 경매장(3) 19.08.23 18 0 8쪽
57 경매장(2) 19.08.22 21 0 8쪽
56 경매장(1) 19.08.21 15 0 10쪽
55 검은 왕국(5) 19.08.20 14 0 8쪽
54 검은 왕국(4) 19.08.18 16 0 7쪽
53 검은 왕국(3) 19.08.15 14 0 11쪽
52 검은 왕국(2) 19.08.08 28 0 10쪽
51 검은 왕국(1) 19.08.04 15 0 8쪽
50 숙부(7) 19.07.29 15 0 8쪽
49 숙부(6) 19.07.28 20 0 8쪽
48 숙부(5) 19.07.22 17 0 7쪽
47 숙부(4) 19.07.21 19 0 7쪽
46 숙부(3) 19.07.15 25 0 7쪽
45 숙부(2) 19.07.14 25 0 9쪽
44 숙부(1) 19.07.13 32 0 7쪽
43 별들의 방랑자 (2부 프롤로그) 19.07.08 39 0 1쪽
42 연의 섬에 바닷길이 열리면(3) 19.07.08 33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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