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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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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l
그림/삽화
EOL
작품등록일 :
2019.05.26 18:45
최근연재일 :
2019.12.06 00:36
연재수 :
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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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
추천수 :
6
글자수 :
289,774

작성
19.10.1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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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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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8쪽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2)

DUMMY

호우야, 날 사랑해?


그녀의 목소리가 하루에도 수십 번은 들려왔다. 너는 내게 그런 식으로 물은 적이 없었지만, 네가 언제나 이 말을 속으로 삼켰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지, 그저 내 마음이. 솔직하지 못했던 그 마음이 이런 식으로 단순하고 지독하게 날 괴롭혀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너를 사랑하지. 어릴 적엔 푸른 머리카락이 닿던 너의 하얀 발목부터 나와는 이질적이기만 한 푸른 머리카락, 그 한올 한올까지. 아마도 나는, 내 삶의 시작부터 그 끝까지 영원히 너를 바랄 테지.’


이렇게 선언하고 나면 마치 고해를 마친 신도처럼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


“왜 그들과는 대화해 본 적이 없죠?”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와 비슷한 처지인 주제에, 이런 질문이 그에게는 무척 무례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렸다.


‘레나는 굳이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내 속을 훤히 알고, 조슈아 녀석은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으니까.’


그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대꾸했지만, 그 음성에는 왠지 모를 짜증이 담겨있었다.


사실 주술의 대화에는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와 두 눈을 마주치고 그 소리를 듣노라면. 이따금 내 것이라고 하기에는 퍽 이질적이고 섬세한 잔상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졌으니 말이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소통이었으며, 그리 부르기에는 서운할 만큼 일반적인 것보다는 진보한 종류의 것이었다.


“조슈아를 미워하시는군요.”


녀석의 향한 그의 부정적인 감정이 내 눈살을 찌푸려지게 했다.


‘일반적인 부성애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 레나를 닮은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녀석이니까.’


그가 마침내 얼굴을 약간 찌푸렸는데, 나는 그런 반응에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녀석은 아저씨를 닮았잖아요.”


‘나는 어릴 적에 그렇게 형편없지 않았어.’


그는 다른 대답을 할 때와는 다르게 약간의 여유도 없이 곧장 반박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도 없었다.


‘조슈아는 노예로 태어나지 않았잖아요.’


확신하건대. 꼬마가 만약 노예로 태어났다면 저와 살갗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를 떠는 인간들의 옷에 마구잡이로 불을 붙이진 못했을 것이다. 만약 악의성을 띠고 그리 굴었다고 해도 주인에게 회초리를 몇 대 얻어맞고 나면 그 행동도 버릇이 되기 전에 완전히 고쳐졌을 터였다.


‘노예가 아니라 자바크야.’


그의 말에 나는 상체를 뒤로 뺐다. 대화하는 와중에는 내가 속으로 삼키는 생각마저 그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놀라웠으며, 본의 아니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자바크요?”


내가 되묻자 그는 바람 빠진 한숨을 쉬었다.


‘너도 자바크로 지내다가 도망친 거 아니었나?’


“자바크라뇨? 자바크는 동방 영웅의 이름-!”


‘그것도 맞지만, 요즘에는 돌연변이 노예를 자바크라고 불러.’


“왜 그렇게-?”


그는 내 말을 못 들어주겠는지 계속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자바크의 후예들이 해태르 왕조에 반기를 들었던 혁명 시대에 대해서는 아나?’


내가 고개를 젓자, 그는 감정을 알 수 없게 입술을 기울였다.


‘어쨌든 그 시대 이후부터는 돌연변이 노예들은 자바크라고 불리게 됐지. 붉은 왕조들은 숭고하다고 여겨지는 자신들과 비슷한 힘을 다루는 존재들이 신분은 한없이 천박한 것에 관해 그들의 기원이 그 반란에서 시작된다고 여겼거든, 물론 헛소리지만.’


-야, 자바크! 야, 자바크!


애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담한 목소리가 들리며 존과 비슷한 붉은 눈을 가진 소녀가 시야가 담겼다.


-말도 못하는 주제, 이제는 귀까지 안 들려? 건방진 자바크 새끼가........눈깔을 파버릴까 보다.


뭔가를 보고 당황했던 소녀는 이내 다시 독기를 품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너......이씨, 날 언제쯤 주인으로 모실 거야?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그르릉 소리가 이어지자 소녀의 하얀 손이 그의 뺨을 쳐왔다.


내 머릿속을 침투했다가 지나간 짧은 기억에 나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가, 험악하게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방금 그건 아저씨 기억이에요?”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날 노려보았다.


“그래서 레나님이랑 대화를 하시지 않았던 거군요!”


‘너.....대화 중에 그딴 무례한 짓을 잘도.....’


그는 내가 본의 아니게 그의 기억을 들춰낸 것이 퍽 불쾌한 듯했다.


“저 때문에 기억이 보였던 건가요? 죄송해요. 일부로 그런 건 아니었어요.”


나는 곧장 사과했지만, 그는 나와 소통할 마음을 접었는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잠깐만요! 이렇게 가시면 안 되죠! 먼저 말을 건 건 아저씨였잖아요! 저......저도 주술사의 대화를 배우고 싶다는 말이에요!”


나는 그를 잡고자 하얀 붕대가 감긴 그의 왼손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는 제 상처 부위에 뭔가가 닿는 게 끔찍하게 싫은지 그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러고는 약간 미안한지 나를 돌아보았다.


‘호족이면서, 주술사의 언어를 모른다고? 너,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게 설마 처음인 거냐?’


그는 내 말이 의심스럽다는 듯 가뜩이나 험악하게 생긴 눈매를 찌푸렸다. 나는 모든 진솔함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너에게 가르쳐줄 건 없어. 나도 이걸 호족들에게 배웠다고.’


그 말에 나는 그의 기억을 엿보았을 때보다 더 강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아저씨는 호족과 친하신가요?”


‘파노스 가문 소속이었을 때는 자주 원정을 다녔고, 그때 만났던 몇몇 녀석들과 친해졌지.’


내 한쪽 손에 들린 검은 책을 내려다본 나는 어쩌면 그를 우연히 만난 게 내겐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저씨도 호족의 문자를 아세요?”


그 질문에 그는 약간 망설였다. 아무래도 그들의 문자를 알지만, 내가 저에게 어떤 요구를 할지 의심스러운 눈치였다. 기분이 상했음에도 내 애원을 막상 뿌리치지 못하는 그를 보니, 험악하게 생긴 인상과는 달리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정인 듯했다.


‘루시안의 언어는 몰라. 하지만 그쪽 언어는.......약간은, 알지.’


“그럼 그 약간을 제게 가르쳐주실 순 없으신가요?”


내 요구에 그는 곤란한 듯 붉은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젠장, 어떻게? 네놈 자아가 자꾸 남의 기억을 들여다봐서, 우린 제대로 된 대화도 이뤄지지 않잖아. 네 놈에게 말을 건 건 내 실수였다고, 젠장! 간만에 호족을 보았다고 바보같이......’


“아저씨 기억을 봐도 레나님한테 얘기하진 않을게요......”


‘그건 당연한 거고. 난 그냥 남이 내 기억을 보는 게 싫어.’


내 요구가 무척 철없게 느껴질 만큼 그의 불쾌감은 당연하였다. 그럼에도 그가 선뜻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저 역시 내 동족에게 남의 기억을 엿보며 대화법을 배우고 문자를 익혔던 것이 떠올라서인 듯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기억을 엿보는 건 꽤 위험하다고, 내가 대화를 배울 때도 다른 호족들과 돌아가면서 언어를 배웠어. 한 사람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봤다간 네 정체성이 흔들릴 수도 있어. 그렇게까지 안 된다고 해도 남의 기억이 유입될수록 반대로 내 것들은 흐려지게 될 거야.’


“제 것이요?”


‘네 감정이나 기억들 말이야.’


그의 말을 나는 속으로 다시 곱씹었다.


“좋네요......”


‘뭐?’


“아저씨랑 계속 대화하고 싶다고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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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자유연재+제목 변경 19.08.09 42 0 -
70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6) 19.12.06 5 0 9쪽
69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5) 19.11.25 10 0 11쪽
68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4) 19.11.09 12 0 11쪽
67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3) 19.11.03 10 0 10쪽
»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2) 19.10.19 12 0 8쪽
65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1) 19.10.09 7 0 9쪽
64 악마의 사생아(2) 19.09.23 11 0 10쪽
63 악마의 사생아(1) 19.09.16 11 0 9쪽
62 경매장(7) 19.09.11 17 0 12쪽
61 경매장(6) 19.08.29 17 0 7쪽
60 경매장(5) 19.08.26 22 0 8쪽
59 경매장(4) 19.08.25 14 0 8쪽
58 경매장(3) 19.08.23 18 0 8쪽
57 경매장(2) 19.08.22 21 0 8쪽
56 경매장(1) 19.08.21 15 0 10쪽
55 검은 왕국(5) 19.08.20 14 0 8쪽
54 검은 왕국(4) 19.08.18 15 0 7쪽
53 검은 왕국(3) 19.08.15 14 0 11쪽
52 검은 왕국(2) 19.08.08 28 0 10쪽
51 검은 왕국(1) 19.08.04 15 0 8쪽
50 숙부(7) 19.07.29 15 0 8쪽
49 숙부(6) 19.07.28 18 0 8쪽
48 숙부(5) 19.07.22 17 0 7쪽
47 숙부(4) 19.07.21 19 0 7쪽
46 숙부(3) 19.07.15 25 0 7쪽
45 숙부(2) 19.07.14 25 0 9쪽
44 숙부(1) 19.07.13 32 0 7쪽
43 별들의 방랑자 (2부 프롤로그) 19.07.08 39 0 1쪽
42 연의 섬에 바닷길이 열리면(3) 19.07.08 33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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