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검은눈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Eol
그림/삽화
EOL
작품등록일 :
2019.05.26 18:45
최근연재일 :
2019.12.30 21:57
연재수 :
71 회
조회수 :
1,696
추천수 :
7
글자수 :
295,875

작성
19.11.09 13:49
조회
13
추천
0
글자
11쪽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4)

DUMMY

가문의 내부 일원이 아니더라도 그가 제 유일한 소망을 늘어놓으면, 누구든 황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렌더는 그 얼굴에 대고 제가 아들과 잘 지내보고자 최선을 다해왔다고 뻔뻔하게 자부했다.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그게 진실이라 여겼다.


그들의 내부사정을 잊고 본다면 그의 소망은 가주가 그 후계자에게 바라기에는 무척 당연하고 정당한 기대였는데, 그는 존이 가문을 더 번성시키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으며, 여인네들처럼 저에게 살갑게 구는 걸 원하지도 않았다. 다만 후계자로서 제 뒤를 잇고 아버지에 대한 기본적인 존경심과 약간의 애정을 갖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황소 같은 고집이 또 일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녀석의 그 한심하고 무모한 성정이 또 일을 극단적으로 치닫게 한 것이다.


율리아의 회임 소식 대신, 존이 또 신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그 망할 짓거리를 시도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그렌더는 익숙하게 실망하는 한편 그의 일생에서 이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관계가 또 있었는가를 반문해 보았다.


그는 어렵지 않게 이와 비슷한 사례를 하나 떠올릴 수 있었는데, 그것은 제 주인의 표식을 가져갔던 첫 부인에 관한 것이었다. 주종 관계를 끌어낼 수 있는 마력의 표식을 가져갔음에도, 그녀는 그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일이 없었다. 그를 귀찮게 하는 일이 없었던 그녀는 오히려 무척 순종적이고 정숙한 부인이었는데, 제가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혼자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었다. 죽을 때도 그렇게 평소처럼 얌전히 눈을 감으면 될 것을 그녀는 그에게 저주스러운 말을 퍼붓고 떠났는데, 그 내용은 막상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죽고 나서 그는 제 인생 중에 드물게 절망을 맛보았으며 오랜 기간 실의에 빠져있었으니 말이다.


아, ‘너는 누군갈 사랑할 사람이 못 돼.’였나?


그 말을 떠올림과 동시에 이종족 전문의가 존의 상태가 그전보다 심각하다는 소리를 늘어놨고, 그렌더는 그와 동시에 얼굴을 형편없이 일그러뜨렸다.


존의 말썽만큼이나 그녀의 마지막 말도 퍽 짜증스러웠고, 제 잘못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약간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렌더는 그녀가 왜 그딴 소리를 했는지 알아낼 바에는 존의 뻘짓을 이해하는 편이 더 쉽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


자해가 취미가 아니라면 녀석은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요량으로 그런 짓을 벌였으며 그것은 꽤 오랫동안 성공할 조짐을 보이기도 했으나, 그렌더의 아들은 결국 깨어났다.


그 아이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렌더는 존을 타박하는 짓도 이젠 질려 녀석의 새 신부를 들이는 일에 온 신경을 쏟았다. 율리아의 일로 가문 내에서 짝을 찾는 게 어려워지면서, 그렌더는 가문 간의 이해관계보다는 외형적으로 눈에 띄어 존의 눈길을 한 번이라도 더 받을 만한 귀족의 영애들을 중점적으로 신부 후보를 추렸다.


그렌더가 요녀로 소문난 한미한 남작 가의 여식과 중앙의 황녀를 두고 고민하는 사이, 그녀들의 외형을 본 보좌관은 질겁을 하며 그렌더와 존 사이에는 취향 차이가 있다는 점을 되짚으며 그녀들은 어쩌면 율리아를 연상시킬 만큼 다소 정열적인 느낌의 미인들이라 덧붙였다. 한때는 율리아의 밑에서 일하기도 했던 그 보좌관은 존이 예전에 다른 귀족 여식에게 연정의 편지를 썼다가 율리아에게 들켜, 그녀의 명령에 따라 제가 회초리질 했던 일을 고백하며 그 대상이 루시안의 막내딸이었다고 귀띔을 줬다.


루시안의 여인을 집안에 들이면 아들을 보는 일은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존이 그리 극단적인 시도를 하고 거의 성공할 뻔한 후가 아니었다면 그렌더는 그 얘기에 되레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그렌더는 존이 그 소녀를 보고 얼굴을 붉힌 일을 떠올리고는 곧장 루시안으로 청혼서를 넣었다. 파노스의 제안은 영광으로 여기나, 왕가의 여인을 자바크와 맺어줄 순 없다는 이유로 루시안을 이를 거절했다. 이에 그렌더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내처럼 꽃과 보석을 들고 루시안의 전대 가주와 그 딸을 설득해, 레나를 파노스의 양딸로 들이는 걸 조건으로 노예 성혼을 성사시켰다.


그 후로 그는 루시안의 성문을 두들긴 일을 결단코 후회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그의 상상 이상으로 파노스 가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녀는 그렌더에게 완벽한 며느리였을 뿐 아니라 그렌더는 관심도 없는 그 가문의 시종인들과도 살갑게 지냈는데, 율리아가 안주인 노릇을 할 때처럼 매질로 죽어나가는 이가 없어 매달 시체 치우는 일이 줄어든 점도 그렌더는 내심 마음에 들었다.


사실, 그렌더가 레나에게 만족한 이유는 존과 노예 성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에 주인의 증표가 나타났다는 점이 가장 컸는데,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기대도 하지 않던 손자를 가주에게 안겨주기까지 했다. 이에 존이 태어날 때보다 더 기뻐한 그렌더는 금은보화를 그녀에게 선물하는 것도 충분치 않다고 여겨 그녀에게 성채 하나를 통째로 선물했었다.


가주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영주민들은 그들의 여왕처럼 떠받들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불만에 차있었다. 그녀는 불장난에 빠지길 원하는 여인들처럼 남편의 사랑에 목말라하며, 못해도 보름에 한 번씩은 가주를 찾아가 존의 무심함에 대해 토로했다.


-합방 기간이 아니면 그는 별채에 발을 들일 생각을 안 해요. 매일 아침 식사 때 간간이 얼굴을 보는 것 말고는 인사를 나눌 일이 없다니까요!


레나는 식사 내내 병풍처럼 가주의 옆에 서 있는 존의 굳은 얼굴을 떠올리곤 다시금 열을 올렸다.


-그래도 아기 아버지라는 사람이 말이에요, 같이 식사는 못하더라도 슈 쪽을 봐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니지, 당연히 그쪽으로 눈이 가기 마련 아닌가요? 하지만 그 동요 없는 눈을 들여다볼 때면 제가 감정 없는 돌덩이와 결혼한 것 같아요.


레나의 목소리에 맞춰 그렌더는 리듬을 타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는 차라리 레나가 품위 유지비를 올려달라거나 성을 더 달라고 조르는 일이 그녀에게 더 생산적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레나는 그런 그의 반응이 무성의하게 느껴졌다.


존의 고집을 꺾는 일이 비효율적인 투자라는 걸 그렌더는 이미 알았지만, 귀하게 들인 며느리를 위해 그들의 비정상적인 결혼 생활에 관해 존에게 훈계를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를 모르는 레나는 그가 그들 관계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레나는 기왕 이리된 것 그녀의 사랑을 스스로 쟁취하는 쪽으로 의지를 굳혔는데 진작에 그런 생각을 왜 못 했는지 이젠 노파심이 나기까지 했다. 그가 자신과 조슈아가 지내는 별채에 오지 않으면 자신이 그의 방을 찾아가면 되는 일을,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귀족 여인이 자바크의 방을 드나드는 것은 그리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라며 조심스럽게 충고를 하던 알모어는 마지못해 레나에게 열쇠를 넘겼다. 항상 문지방 너머로만 그 공간을 바라보던 레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돌리며 약간 설레기까지 했는데, 방문이 완전히 열리자 그러한 기대감은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왕족이 지내는 제 방만큼은 아니더라도 귀족 영식이 지낼 만큼의 양식은 갖추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예상보다 그의 방은 열악한 상태였다.


침대도 겨우 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그의 좁은 방에서는 홀아비 냄새가 났고, 가구들이 죄 낡았을 뿐 아니라 그나마 최근에 붙인 듯한 붉은 벽지에는 모서리를 따라 곰팡이가 나고 있었다. 단철의 격자 창살로 보이는 풍경은 다른 건물에 막혀있어, 차라리 창을 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답답함에 현기증까지 느낀 레나는 다소 힘겹게 소파에 앉았다. 제 발 옆에 가져온 선물로 가져온 고급 와인을 세워둔 레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를 놀라게 할 작정으로 촛불에 불도 붙이지도 않은 채 그를 기다렸다.


바닥으로 고개를 숙인 채 약간 비틀거리며 문을 밀고 들어온 그는 절뚝거리고 걸어들어오면서 외투를 벗었다.


-다리는 어쩌다가 그랬어요?


외투를 현관 옆 옷걸이에 걸던 존은 다소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것도 잠깐이었는지 존은 다시 무심한 눈을 하곤 다리에 힘을 줘 (그럼에도 어정쩡하기만 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소파에 앉은 레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레나는 그의 오른 다리를 쏘아보며 정도를 알 수 없는 그 타박상에 대해 온갖 추측을 속으로 늘어놓았는데, 문뜩 존이 가주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는, 하인들의 어깨너머로 들어 결코 확신할 수 없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런 예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분노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설마, 아버님께서 그러신 건가요?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레나를 내려다보았고 레나의 목소리는 속절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 제가 아버님을 찾아갔었어요, 설마 그것 때문에? 이런 게......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던 건가요? 그러니까, 그래서 날........그렇게 미워했던 거군요?


차마 존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을 보고 말하던 레나는 마지막 말을 하며 눈시울이 붉어지기까지 했는데, 무례하게도 존은 그녀의 말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제 기분만 나쁘면 그렌더는 기호화된 서류문서에 마침표를 안 찍어도 저를 패는 인간이었다. 이까짓 고통은 그에겐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으며, 이제까지 이것을 그녀의 탓으로 생각해본 일도 없었다. 그의 삶이 요즘 들어 더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은 맞았지만, 이런 것들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었다.


물기가 찬 레나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던 존은 그녀를 무시하는 듯 그 채로 몸을 기울였다. 레나는 더는 그에게 묻지 않았지만, 그는 침대 위에 눕는 것만으로는 아쉬움을 느껴 몸을 벽 쪽으로 기울여 버렸다. 어둑어둑한 벽을 보고도 그녀가 신경 쓰였던 존은 눈을 질끈 감으며 첫사랑과 노예 성혼을 감행한 일이 그렌더가 해온 그 어떠한 장난보다도 악랄하다고 탄식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눈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자유연재+제목 변경 19.08.09 48 0 -
71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7) 19.12.30 10 0 13쪽
70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6) 19.12.06 11 0 9쪽
69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5) 19.11.25 13 0 11쪽
»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4) 19.11.09 14 0 11쪽
67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3) 19.11.03 13 0 10쪽
66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2) 19.10.19 13 0 8쪽
65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1) 19.10.09 9 0 9쪽
64 악마의 사생아(2) 19.09.23 13 0 10쪽
63 악마의 사생아(1) 19.09.16 12 0 9쪽
62 경매장(7) 19.09.11 17 0 12쪽
61 경매장(6) 19.08.29 18 0 7쪽
60 경매장(5) 19.08.26 22 0 8쪽
59 경매장(4) 19.08.25 15 0 8쪽
58 경매장(3) 19.08.23 19 0 8쪽
57 경매장(2) 19.08.22 21 0 8쪽
56 경매장(1) 19.08.21 16 0 10쪽
55 검은 왕국(5) 19.08.20 15 0 8쪽
54 검은 왕국(4) 19.08.18 16 0 7쪽
53 검은 왕국(3) 19.08.15 14 0 11쪽
52 검은 왕국(2) 19.08.08 28 0 10쪽
51 검은 왕국(1) 19.08.04 16 0 8쪽
50 숙부(7) 19.07.29 15 0 8쪽
49 숙부(6) 19.07.28 21 0 8쪽
48 숙부(5) 19.07.22 18 0 7쪽
47 숙부(4) 19.07.21 28 0 7쪽
46 숙부(3) 19.07.15 25 0 7쪽
45 숙부(2) 19.07.14 27 0 9쪽
44 숙부(1) 19.07.13 33 0 7쪽
43 별들의 방랑자 (2부 프롤로그) 19.07.08 41 0 1쪽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Eol'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