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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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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l
그림/삽화
EOL
작품등록일 :
2019.05.26 18:45
최근연재일 :
2019.12.30 21:57
연재수 :
7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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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9
추천수 :
7
글자수 :
295,875

작성
19.11.25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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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5)

DUMMY

빈대가 들끓는 침대에 누운 레나는 그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몸을 움직여 그에게 다가갔다. 눈물이 마른 얼굴에는 건조한 체념이 담겨있었고, 그녀는 그의 뒷목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내가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 게 과욕일까?


그녀의 물음에, 존은 무례하게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마치 그 말에 분노하거나 적어도 기분이 상했다는 듯 그의 몸은 더 꽁꽁 굳힌 채 돌아누웠다. 그녀가 복도 밖으로 나가서야 상체를 일으켰다. 소파 다리 옆에 놓인 와인 병에 시선이 꽂혔던 그는 그것을 가볍게 주워들어 나무 마개를 이빨로 깠다. 그는 갈증으로 지친 맹수처럼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그녀를 처음 본 날은 고위 귀족 회의가 루시안의 성에서 개최되던 날이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의 존은 달리는 마차에서 탈출 기도를 하다 걸려 하얀 셔츠가 붉게 변하도록 얻어맞은 상태였다. 마차에 앉아 울면서 가주를 기다리던 그를 발견한 레나는 제가 그를 치료하겠다며 선뜻 나섰었다. (자바크는 일반 의원에게 치료를 받지 못한다.) 붉은 악마였던 존에게는 그 소녀의 도움이 하등 쓸모없으며 몇 시간만 방치해도 찢어진 살이 붙을 것이었지만, 존은 그 낯선 손길을 두려워하면서도 막상 피하진 못했었다.


몇 년 만에 저에게 닿는 그 애정 어린 손길에 얼마나 행복에 겨웠던가. 그는 그 차가운 살갗에서 어울리지 않게도 고대족이었던,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제 어미를 어렴풋이 떠올렸던 것 같다. 본가에 돌아온 그는 율리아의 부름도 잊은 채, 소녀에게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었다. 그녀가 천박한 검은 자의 문자를 알 리 없다는 걸 간과하고 말이다. 편지가 닿지 못했지만, 레나는 가끔가다 떠오르던 사람이었다. 그 걱정에 찬 초조한 얼굴을 떠올리면, 이 가문만 나가면 자바크인 저를 사랑할 인간이 있으리라 새삼 깨달으며 희망에 찬다. 그러다 그의 생각은 기억도 흐릿한, 그렌더를 만나기 전의 시절을 표류한다. 소녀의 얼굴이 제 상상 속 어미의 모습과 겹쳐진다.


‘넌, 뭘 바랐던 거냐. 뭘 바란 거야.’


존은 저를 버티게 했던 그 상상들을 이젠 헛된 망상이라 비웃을 수 있었다.


그가 병실 생활을 하던 때에 서류 작업은 그의 동의도 없이 끝났으며, 퇴원과 동시에 가주를 사이에 두고 제 두 번째 노예 성혼자와 첫 대면을 했었다. 당시의 솔직한 감정은 당혹스럽고 무서우면서도 상대가 그녀라는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설레기까지 했다. 가주가 건넨 술을 한잔 걸친 상태에서 그가 조심스럽게 제 옆에 앉은 그녀에게 인사하려는데, 시야가 자꾸만 흩어졌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그는 낯설지만 고풍스러운 침대에 누워있었고, 침대 시트를 갈려고 온 시녀들이 그의 몸을 흔들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분하고 수치스러웠다기보단 약간 벙찐 기분이었다. 존은 이미 옆자리가 빈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마시고 있는 레나에게는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그대로 방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약에 이미 취한 채 침대에 묶였다. 그것이 끝나면 레나는 괜히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풀어줬는데, 그는 그 방에서 자지 못하고 곧장 문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저기, 잠깐!’하고 부를 때도 몇 번 있었지만, 그녀가 말을 끝맺을 때까지 존은 기다리지 않았다.


조슈아가 생겼다는 말을 가주를 통해 들었던 게 존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율리아가 아닌 레나라도 그의 반응은 다를 게 없었을 테니 말이다. 율리아, 그녀가 고문에 가까운 행위들을 하고는 뻔뻔하게 제 배에 그의 손을 올리며 회임기가 보인다는 말을 전했을 때 그는 울컥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어차피 그녀 말고도 제 아이를 가질 다른 여자는 많다는 점을 이젠 알아 그때의 일을 후회하면서도, 그 일을 조금이라도 미룰 수 있어서 그는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었다. 아이에 관한 부분에서 존은 아이를 낳아야 하는 여자 쪽보다 더 민감했으며,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생각들에 사로잡혔다. 조슈아도 다를 게 없었다. 나날이 불러가는 레나의 배를 보며 그는 초조했고, 그녀도 죽일까 진중하게 고민했다. 레나에 관한 약간의 애정마저 완전히 지워질 만큼 재앙과 같은 아이의 존재는 그에게 공포였고, 본질적인 분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존은 아이와 마주할 날을 감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자신을 아버지라 부를 리 없는 그 끔찍한 녀석을 어떻게 대해야 하며, 이젠 그들 셋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더러운 아이를 가진 레나가 존은 역겨웠다. 그는 노골적으로 그녀와의 만남을 기피했고, 그녀의 출산일쯤에는 파병 신청까지 했다가 수락을 받지 못했다.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온 파노스 가의 사람들과 루시안의 사람들이 전부 떠나고, 레나는 문 옆을 지키고 서 있는 존을 불렀다. 그녀가 아이를 안아보라며 그에게 건넸지만, 그는 거부했고 그때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뒤늦은 죄책감이 몰려왔었다.


‘내게 뭘 원한 거야, 넌. 자바크인 내게. 각오했어야지, 각오를.’


존은 달빛 아래에서도 핏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는 다른 손에는 빈 술병을 강하게 쥐어 손에 유리가 박히도록 으스러뜨렸다. 아이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녀와 노예 성혼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녀에게 불도장투성이인 제 몸을 보이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치 않았다.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이놈의 몸뚱어리뿐이었다.


그는 길게 잘린 유리 조각을 제 손목에 들이댔다가 치웠다. 이젠, 그것도 아닌가 보다.


-


하인이 그녀가 평소에 즐겨 입던 자주색 이브닝드레스를 건네자 레나는 옷걸이 걸린 하얀 드레스를 가리켰다. 파노스에 오기 전에는 주로 목까지 차고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옷을 즐겨 입었던 그녀였지만, 존이 저를 돌덩이 보듯 하니 사내의 욕구라도 자극해볼까 싶어 제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파인 옷들을 선호하게 된 그녀였다. 그런데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들의 관계에 저딴 천 쪼가리가 도움될 성싶진 않았다.


-그는 내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겠지.


레나는 작게 중얼대며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그는, 파노스에서는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그녀는 하얀 소맷부리로 비치는 제 손목의 증표를 보다가, 조슈아의 울음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목 끝까지 꽁꽁 싸매진 옷에는 하얀 살갗도 거의 비치지 않아 언뜻 보기에는 수수한 느낌을 주었지만, 등 뒤가 훤히 파여있었다.


레나는 잠에서 깨면 습관적으로 칭얼대는 제 아들을 한번 안아준 뒤, 슈를 유모에게 조심스럽게 넘겼다. 그들은 함께 다이닝룸으로 향했고, 그들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주와 존이 그곳에 왔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얼굴을 한 존은 그녀의 파격적인 차림새에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레나가 가주에게 살갑게 말을 걸지 않는 한 그렌더는 식사 중에 딱히 말을 하지 않았다. 어제의 일 때문에 그렌더에게 깊은 반발심이 생긴 레나는 그에게 일부로 말을 걸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렌더가 먼저 말을 건네왔다.


-어젯밤, 녀석의 방에 갔다지?


그가 평소처럼 호의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던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주가 슬쩍 웃음기를 흘리며 물었다.


-이 녀석이 좀 더럽지?


존이 다리를 절던 모습을 떠올린 레나는 이에 관해 그에게 따지려다가 이젠 존이 멀쩡히 걸어 다닌다는 생각에 입을 닫았다. 그가 지금 멀쩡하다고 어제의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렌더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레나는 그가 당연히 발뺌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제부터 존이 벙어리인 것까지 가주의 소행인가를 두고 계속 의심하던 레나는 그에게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는 언제부터 말을 못하게 된 거죠?


냉랭한 레나의 물음에도 그렌더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제 어미가 죽은 날 갑자기 그렇게 됐지.


그의 말을 끝으로 식전 음식이 나왔고, 아직 모유를 먹는 슈가 옆에서 손가락을 빨았다.


-슈, 조금만 기다려. 슈는 나중에 먹자.


레나가 아이의 손가락을 입에서 꺼내자, 슈는 약간 성을 내더니 어린 것이 벌써 어미의 마음을 아는지 가주가 쥔 숟가락 끝으로 정전기 같은 불꽃이 튀었다가 사라졌다.


-어머, 가주님! 죄송해요!


안색이 창백해진 레나와는 달리, 가주는 조슈아가 대견하다는 듯 그쪽으로 손을 뻗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본디 파노스의 아이는 돌잡이 전에 불을 다루지, 그런데 아이 몸에 쉴드가 안쳐져 있네?

-쉴드요?


레나의 물음에도 존 쪽으로 몸을 돌린 그렌더는 곧장 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직까지 애새끼 몸에 쉴드를 안 쳐? 마력도 남아도는 새끼가?


그는 그리 씩씩대는 와중에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네놈은 아직도 네 애새끼가 뒤지길 바라나 보지? 아님 네놈처럼 어디 한군데가 병신이 되거나 말이야!


악몽에도 울던 슈는 두 눈을 말똥거리며 그 광경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감상했다. 존이 맞는 광경을 처음 보는 레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있다가 아이의 눈을 겨우 가렸다. 가주가 쉴드를 언급할 때까지 존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던 걸 보면 그도 그것에 관해 몰랐던 것이 틀림없다고 레나는 확신했다. 그에게 정확히 얘기해준 적도 없으면서 저런 무차별적인 폭행이라니, 레나는 아까 전 그녀가 보였던 반응 때문에 가주가 그녀가 그의 폭행을 묵과는 것으로 뜻을 내비쳤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당장에라도 제 남자를 건드리지 말라며 가주의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간신이 참은 레나는 가주를 겨우 달래 자리에 앉혔다.


이 정도의 폭행은 익숙한지 입술에 묻은 피를 쓱 닦은 존은 곧장 일어섰다. 그는 멍이 들어 눈이 잘 떠지지 않는 얼굴로 다시 가주의 호위를 하고 섰다.


다음 음식이 나와도 레나는 제대로 숟가락을 쥐지 못했다. 존을 때리고 나니 그 어느때보다 기분이 좋아진 파노스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이제까지 잘도 인자한 시아버지를 연기하던 파노스의 행위에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이쯤 되니 존의 어머니도 정상적으로 죽었을 것 같지 않았다. 레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킬까, 스푼을 다시 내려놓고는 미친개에게 말했다.


-잠시 휴가를 가고 싶어요. 존과 조슈아를 데리고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그렌더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마지못해 물었다.


-어디 봐둔 곳은 있고?

-아버님이 전에 선물해주신 별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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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7) 19.12.30 10 0 13쪽
70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6) 19.12.06 10 0 9쪽
»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5) 19.11.25 13 0 11쪽
68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4) 19.11.09 13 0 11쪽
67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3) 19.11.03 12 0 10쪽
66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2) 19.10.19 12 0 8쪽
65 거짓과 진실, 혹은 진심(1) 19.10.09 8 0 9쪽
64 악마의 사생아(2) 19.09.23 12 0 10쪽
63 악마의 사생아(1) 19.09.16 11 0 9쪽
62 경매장(7) 19.09.11 17 0 12쪽
61 경매장(6) 19.08.29 17 0 7쪽
60 경매장(5) 19.08.26 22 0 8쪽
59 경매장(4) 19.08.25 15 0 8쪽
58 경매장(3) 19.08.23 19 0 8쪽
57 경매장(2) 19.08.22 21 0 8쪽
56 경매장(1) 19.08.21 15 0 10쪽
55 검은 왕국(5) 19.08.20 15 0 8쪽
54 검은 왕국(4) 19.08.18 16 0 7쪽
53 검은 왕국(3) 19.08.15 14 0 11쪽
52 검은 왕국(2) 19.08.08 28 0 10쪽
51 검은 왕국(1) 19.08.04 15 0 8쪽
50 숙부(7) 19.07.29 15 0 8쪽
49 숙부(6) 19.07.28 20 0 8쪽
48 숙부(5) 19.07.22 18 0 7쪽
47 숙부(4) 19.07.21 25 0 7쪽
46 숙부(3) 19.07.15 25 0 7쪽
45 숙부(2) 19.07.14 26 0 9쪽
44 숙부(1) 19.07.13 32 0 7쪽
43 별들의 방랑자 (2부 프롤로그) 19.07.08 41 0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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