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용은 사랑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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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벤
작품등록일 :
2019.05.2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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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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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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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1)

DUMMY

로타샤 지방에 자리한 루시안의 고성은 신기루처럼 몽환적이고 영묘했다.


천 년 전 제국의 수도였던 그 척박한 지방은 극지에 위치하였고.


유도의 후방은 서쪽으로는 호족의 영역과 동쪽으로는 경계의 요새와 맞닿아 있었다.


얼음 성을 연상케 하는 고성 곁을 루시안의 강이 에워쌌다.


이클립스 가문이 다스리는 북부 영토는 검은 산맥의 남단에 놓인 현 수도와 분위기가 판이했다.


가파른 산맥 위에 지어진 외로운 성은 눈에 뒤덮이고 서리가 앉아 멀리서도 하얀빛을 내뿜었다.


침엽수림을 헤쳐 검은 산맥을 따라 올라온 여왕의 식솔들은 고지를 목도하자 저마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왕의 일행은 왕도에서 이클립스 가의 본가까지 포탈을 통해 넘어왔지만, 혹설에 익숙지 않은 그들에겐 비둘기 성에서 반월의 본부로 향하는 두 달의 여정조차 고역이었다.


오죽하면 목숨이 가벼운 이들이 레시의 남편 사랑이 유별나다며 흉을 봤을까.


명목상 여왕은 5년 만에 귀환한 반월의 토벌대를 환영하고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었다.


여왕의 실체를 모르는 자들은 군주가 반월로 떠난 어린 남편이 그리워 경거망동한다 짐작했다.


반면에 그녀의 성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은 북부 경계의 상황을 심히 우려했다.


당연하게도 공주는 후자였다.


“이건 보좌관 할아버지한테 들은 건데. 다른 이한테 함부로 떠들어선 안 되는 얘기라고 하셨어. 호우는, 입이 무겁지?”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차피 너 말곤 나와 말을 섞는 사람도 없는걸.’


마차의 창으로 상체를 내밀던 에일이 몸을 약간 숙여 노새에 앉은 네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반월의 토벌대를 이끌던 지휘관이 실종됐대. 아버지는 다행히 무사하시다지만, 그가 속했던 부대는 이미 궤멸 상태래. 다른 부대 생존자들과 같이 지원군을 기다리시다가, 어머니께서 지원을 거부하셔서 주둔지로 돌아오시는 거래.”


‘반월이 패했다고?’


검은자와 인간이 섞여 살아가는 북부 민가의 이색적인 풍경을 쫓던 너는 그제야 소녀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진 얘기는 여왕의 토벌대가 경계 너머 이단 무리를 숙청하는 일에 성공했다는 거잖아, 그래서 승전제를 벌이는 거고.”


에일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어머니는 더는 경계 너머로 군사를 보내지 않으실 작정인가 봐.”


“그 반역자들이 정비 군을 몰아낼 정도라니, 북부가 위험해지진 않을까? 반월의 군대는 단순한 인간 부대도 아니잖아.”


너는 그 변방 부대가 극한의 환경에 견디기 위해 간부와 병사들 대부분이 검은자나 돌연변이 노예로 이뤄졌다는 얘길 떠올리고 말했다.


“그들은 경계를 넘을 수 없어. 아버지는 ‘인간’에게 당한 게 아니거든.”


“그들? 그게 무슨 얘기야?”


에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직접 말할 순 없어. ‘그들’을 입에 담으면 저주받는 댔거든.”


소녀의 얘기를 떠올리던 너는 거친 눈발을 헤치고 성이 자리한 검은 산맥을 침체한 눈으로 보았다.


루시안 제국이 아이탄 일족에게 패해 북부가 아이탄의 수중에 넘어가기 전까지 저 경계 밖에 설인과 괴인들이 살았다지.


저 너머엔, 이제 어떤 괴물이 도사리려나.


*


너는 홀로 서서 창 너머를 보았다.


성전 밖의 아이들은 도망치고 있었다.


은은한 빛이 전해지는 유리화의 사내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였고 모인 그의 손바닥 위로 검붉은 형상이 해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너는 그 공허한 이상을 비웃으며 누군가를 비난했고 동시에 동정했다.


어둠 속에 홀로 선 너는 어렴풋이 빛으로 가득 찬 저 너머에 어떤 희망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너는 걷는 법을 모르는 갓난애처럼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검은 영혼들이 사방에서 너를 얽매어왔다.


너는 제 삶을 비관해 울었다.


피눈물이 네 시야를 덮자, 너의 세상은 죽은 자의 것처럼 붉은 형체들로 뒤덮였다.


너는 검은 점이 돼 사라지는 형제들에게 약조했었다.


다시금 되뇌었다.


‘내가 찾아갈게. 내 이름을 잊는대도 너흴 기억하겠어···.’


다음 순간 뒤에서 어둠이 몰려왔다.


재단 앞에 선 너는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네가 선 자리에 그림자가 졌지만, 네 두 뺨에는 색색의 빛이 머물고 있었다.


그 바람은 네 몫이 아니었다.


홀로 남기를 택한 너는 적을 마주하지 못했다.


너는 체념하거나 모든 걸 포기한 마냥 굴었다.


하지만 실상은, 네 몸은 두려움에 굳어있었다.


요동치는 심장은 비굴하게도 삶을 갈망했다.




“헉! 헉···헉···.”


상체를 일으킨 너는 가슴을 움켜쥔 채 거친 숨을 골랐다.


네가 누웠던 자리와 베개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지만, 다른 수많은 밤처럼 악몽의 내용이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잠결에 끙끙대면 널 깨우고 달래주던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네가 머무는 숙소는 창고를 개조한 공간이었지만, 본래 방보다 상태가 양호했고 작은 창까지 딸려있었다.


빗장을 열어젖히자 익숙해진 칼바람이 양 볼을 할퀴고 지나갔다.


유리성에 도착한 지 서너 일이 지났지만, 하인들은 방치됐던 성을 손보느라 여전히 분주했다.


천막이 쳐진 뒤뜰에서 연회를 위해 요리사들이 고기를 구웠고 하얀 잔마다 맥주가 채워졌다.


한때는 성 일부였을 하얀 기둥을 경계로 육식인 검은 자들을 위한 상이 따로 차려졌다.


환영식은 변방의 병사들을 위한 것치곤 호화로웠지만, 철저히 외부인을 배제해 성 내부는 한산하다 못해 적적했다.


저주받은 땅을 지나온 전사들은 정화의식을 치러야만 왕국의 영토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의식은 왕의 알현실에서 행해질 예정이었다.


귀환한 기사들이 입성할 길목을 따라 하얀 카펫이 깔리고 그 위로 푸른 꽃잎이 뿌려졌다.


내려진 도개교로 여전히 병사들이 넘어오고 있었다.


오른편의 기수는 왕실의 초록 깃을 들었고 반대편에서는 반월의 검붉은 깃이 펄럭였다.


그 가운데 선 말 위의 사내가 은제 투구를 벗어 허리춤에 두었다.


그 체구 좋은 남자의 어깨 위로 루시아 특유의 파란 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너는 그 사내를 쫓으면 공주를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전날 너는 에일과 들꽃을 꺾어 화관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본래는 북부의 마을로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에일이 5년 만에 귀환한 아버지를 빈손으로 맞고 싶지 않다며 고집을 부려 축제 구경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남부의 민가를 검은자가 홀로 돌아다녔다간 돌을 맞아 죽기 십상이었기에 너는 그 일을 제법 고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족 따위가 공주의 결심을 꺾을 수도 없었고, 소녀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친부와 함께 축전에 동행하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무패의 군주였으나 아이탄의 권모술수에 넘어가 살해당한 혼혈 황제, 루시안 레오를 마지막으로 천 년 간 루시안 가문에서는 검은자와의 노예 성혼을 금하고 있었다.


그 와중 여왕은 친족의 만류와 동맹국인 아르헌트 제국(북부에 세워졌던 아이탄의 왕조가 망한 뒤 아이탄 일족의 분파가 중앙대륙에 세운 제국)의 견제를 무시하고 호족 소년을 침실에 들였다.


여왕이 대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진작 자매의 손에 독살을 당하거나, 아르헌트 황제에 의해 유배를 당했을 거라고 에일이 부연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아이가 딸이자 여왕은 상심했고 그녀는 공주를 변방의 성으로 치워버렸다.


이에 에일의 친부였던 호진은 여왕의 명을 어기고 아이를 쫓아갔다.


그는 7년간 어린 딸을 돌봤고 여왕이 부녀를 수도로 불러들이자 도피하듯 반월에 입대했다.


소녀는 제 아버지가 보낸 편지로 매년 상자가 가득 찰 만큼 그가 자상하고 애정이 넘치는 기사라 소개했다.


그 얘기에 어미와 대조되는 공주의 따스한 성품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새삼 깨달은 너였다.


길게 이어진 나선형 계단을 내려오며 그녀의 얘기를 곱씹던 너는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그 호족이 그렇게 절 피해 다녔는데, 레시가 그 꼴을 두고 봤다고? 방자하다고 목을 자르지도 않고, 쇠사슬을 채워 가두지도 않고? 설마 그 레시가 그를···.’


너는 실없는 망상을 하다가 발을 헛디뎠다.


옆의 난간을 재빨리 잡지 않았다면 계단을 굴러 뼈 몇 마디가 부러질 뻔했다.


성을 빠져나와 외동딸과 재회한 그를 실제로 보았을 때, 너는 그 상념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호진은 손재주가 자수 솜씨만큼 형편없는 공주를 대신해 네가 만든 화관을 쓰고 있었다.


그의 검은 망토 안으로 들어간 공주는 그 품에서 맹랑하게 조잘댔고 사내는 딸의 뺨에 뽀뽀를 퍼부었다.


주변의 검은 기사들은 그 광경을 흐뭇하게 보았지만, 너만은 얼굴을 굳혔다.


‘레시가 술에 취해 에일을 가졌나?’


멀리서는 마냥 화려하고 탐스럽던 청람색 머리카락은 떡이 져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과 뒤엉켰고, 그의 얼굴은 검은 때로 얼룩져 있었다.


그 산적은 인간의 암내를 뛰어넘는 퀴퀴한 악취를 풍겼고, 입을 열 때마다 시궁창이 열렸다 닫히는 듯했다.


네가 그들 곁에 서너 걸음 물러서자, 에일 눈엔 그게 낯을 가리는 모양새로 보였는지 그녀가 기꺼이 널 끌어당겼다.


“호진, 호진! 애가 호우야!”


한쪽 무릎을 꿇고 소녀를 안던 호진은 그녀를 품에서 내보내고, 반듯하게 서 네게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그의 손톱에 낀 때를 보며 네가 머뭇대자 옆에 서 있던 검은 기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게 내가 입성 전에 좀 씻으라고 했었잖아, 호진. 저 녀석 썩은 표정 좀 보라고!”


“내가 너 같은 순수혈통인 줄 알아, 호라. 그 엄동설한에 씻었다간 시체로 입성했을걸.”


호진이 저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 보이는 청년의 어깨를 툭 치며 반발했다.


아차 싶었던 너는 그가 내민 손을 뒤늦게 잡았고, 그는 네 손을 부드럽게 쥐고 몇 번 흔들었다.


상처투성이에 굿은 살이 박힌 그의 손은 거칠었지만, 예상과 달리 그와 손을 맞잡는 행위가 그리 거북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순혈과는 다르다 우겼지만, 그의 체온은 너와 비슷했다. 그의 두 눈은 검었고, 그 시선에는 딸을 향한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검은 자가 저리 따스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단 사실에 너는 적잖이 놀랐다.


“안녕하세요. 호진.”


너의 뒤늦은 인사에 그가 흠칫 놀랐다. 그의 눈시울이 순간 붉어졌다.


“왜 그러세요?”


“호우 군의 목소리가 제가 아는 누군가를 닮았거든요. 착각할 뻔했네요.”


‘얼굴도 아니고, 목소리 때문에 착각할 수도 있나?’


너는 그의 말에 의아해 고개를 기울였다.


너와 호진의 대화가 실속 없게 들렸는지 호라이가 그 사이를 끼어들며 물었다.


“호우는 호족 출신이야?”


그 질문에 호진은 미간을 찌푸렸고 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름이 ‘호’우인데?”


“제가 기억을 잃어서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는 몰라요.”


“기억이 없다, 그것참 희한한 일이네?”


사내는 돌연 정색하며 말끝을 흐렸다.


“누군가 네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것도 아닐 테고···.”


의식을 핑계로 호진이 너와 그를 급히 떼놓았다.


호진에게 뒷덜미가 잡혀 끌려가는 와중에도 호라는 다시 보자며 널 향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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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소년은 절망했다(2) 22.09.19 25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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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소녀는 사랑에 빠졌고(1) 22.09.09 18 0 11쪽
13 인어의 눈물(2) 22.09.05 22 0 11쪽
12 인어의 눈물(1) 22.09.02 41 0 12쪽
11 대련 22.08.29 18 0 11쪽
10 대부(3) 22.08.26 21 0 11쪽
9 대부(2) 22.08.22 18 0 11쪽
» 대부(1) 22.08.19 22 0 12쪽
7 하리오의 후예는 사랑을 모르고(3) 22.08.15 22 0 13쪽
6 하리오의 후예는 사랑을 모르고(2) 22.08.12 18 0 12쪽
5 하리오의 후예는 사랑을 모르고(1) 22.08.08 33 0 12쪽
4 페렐레(2) 22.08.06 27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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