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용은 사랑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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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벤
작품등록일 :
2019.05.2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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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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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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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절망했다(1)

DUMMY

너의 숙소에 난입한 에일은 모레부터 호진이 동행한다는 희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종일 너에게 무심했던 게 마음이 쓰였는지 너의 품을 파고들었다.


외지에서의 무관심은 유독 가혹했지만, 덕분에 친구가 생긴 너는 공주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녀는 내일 도착할 행선지가 무척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며칠 전 이미 들려줬던 섬의 전설에 관해 다시 떠들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상대의 진심이 보인댔어. 호우야, 내 말 듣고 있어?”


너는 하품하며 침대에 누워버렸다.


잠자리에 들려다 소녀의 노크 소리에 일어난 너는 그녀를 어떻게 돌려보낼지 골몰했다.


“에일, 너 안 피곤해?”


소녀는 너의 시큰둥한 반응이 불만이었다.


토라진 그녀가 너의 배 위에 올라앉았다. 그녀는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마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벽까지 수다를 떨 작정인가 보다. 네가 실눈을 뜨자 그녀

가 너의 배를 압박해왔다.


너는 하는 수 없이 폭신한 베개에 등을 대고 앉았다. 보상을 바라듯 옆에 앉은 소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백옥같은 눈과 마주하니 이대로 눈을 감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녀와 손을 맞잡고 잠이 들면 너는 하얀 심연 안에 빠져들었다.


천장도 바닥도 없는 그 순백의 공간에서 너는 모든 걸 망각했고 다만 그녀가 건넨 손이 너에게 형체를 주었다.


그 하얀 손만이 널 존재하게 했고 네가 닿을 수 있는 유일체였다.


너와 팔짱을 낀 소녀는 너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파란 숨이 너의 살갗에 번지면 괴물이 되기 전 그녀를 떠나야겠다는 다짐도, 그녀를 재울 방법에 대한 고민도 전부 의미를 잃었다.


“호우야, 나 인어의 꽃은 안 봐도 괜찮아.”


“네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침대맡에 마력 꽃을 숨겨둔 너는 당황했다.


‘나는 그저 다른 별이 필요했나 봐.’


소녀는 눈으로 말했지만, 너는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인상을 구겼다.


“내일 새벽에 바닷길을 따라 걷자. 백작님이 예쁜 백마도 빌려주신댔어.”


“됐어, 거긴 연인끼리 걷는 거라며.”


빛 바란 파란 눈이 너를 빤히 응시했다. 너는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벽을 봤다.


“그러니까 가야지.” 네가 놀라 돌아보자 그늘진 남색 눈이 보였다.


밑 빠진 둑처럼 너는 계속 그녀와의 추억을 버렸다.


소녀와의 입맞춤이, 고백이, 애정이 손가락 새로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소녀는 이해했다. 그녀는 지치지 않고 구멍 난 마음에 제 사랑을 퍼주었다.


소녀는 인어의 꽃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휴가지에서 너와 함께 꽃을 찾아다니길 바랐다.


기왕이면 섬 서너 곳을 뒤져도 절대 찾아낼 수 없는 것으로.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길 바랐다.


너는 머나먼 길을 돌았지만, 그녀가 바란 건 그거 하나였다.


“너는 내 것이잖아.”


그녀는 너의 뺨을 쓸었다. 소녀의 손가락 끝으로 옆머리가 흩어졌다.


그녀는 익숙하고도 짧게 너에게 입을 맞췄다. 너를 끌어안고 검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지금의 나를 잊어도 괜찮아. 내일의 네가 나와 함께라면.”



10.



-‘그들’이 계속 제게 손짓해요. 밤마다 절 둘러싼 채 속삭여요. 호운이 될 거라고, 저도 결국 그들처럼 될 거라고. 계속. 계속 저를 불러요. 차라리 절 죽여주세요, 악마라고 화형 시켜줘요. 제발, 제발 절 놓아줘요, 어머니! 아아, 어머니···.


너는 유모에게 빌헬름의 최후를 묻고 싶었다.


그가 어떻게 호운의 운명에서 벗어났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 못했다.


유모에게 미움받는 일만큼은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너 그러다 빠진다.”


심해를 향해 상체를 자꾸 숙이던 너의 뒷덜미를 시젤이 낚아챘다.


에일과 너는 백작 가의 선박을 얻어타 새벽녘 연의 섬으로 출항했다.


루시안의 기사들과 백작 가의 식솔들을 태운 배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순항했다.


닻에 그려진 회색 파도도 바닷바람을 따라 넘실댔다.


전설 속 섬은 시르카스 제도의 남단에 자리했다. 우리는 많은 섬 무리를 지나왔고 개중에는 그림 같은 산호섬과 신이 조각한 듯 아름다운 바위섬도 많았다.


하지만 소년이 흥분해 가리킨 목적지는 귀족의 저택과 편의시설을 걷어내면 특이점이 없는 외딴섬이었다.


“저 섬으로 왜 저렇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거야?”


“아름다운 비극이 얽힌 곳이잖아.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소년이 능청을 떨었다. 백작이 제도를 하사받은 뒤 연의 섬에 관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걸 아는 너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짓말이잖아. 저 섬에는 비애가 짙어.”


그는 너의 강경함에 두 손을 들어 항복하곤 덧붙였다.


“그 전설이 완전 거짓은 아니야. 동화의 원본은 본디 잔혹한 법이잖아?”


배가 선착장에 정박할 때까지 소년의 이야기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참나무 다리를 건넌 일행은 부둣가에 늘어선 왕실 마차에 올랐고, 너는 에일의 맞은편을 차지했다.


시르카스 영애는 내심 공주와 동행하길 원했다. 숫기가 많은 공주가 그 소녀와는 제법 친해진 모양이었다.


너는 그들의 관계를 캐묻고 싶었지만, 에일은 되레 시젤과 너에 관해 물었다.


소년의 목소리를 삽입하진 않겠다.


아내와 친구를 차별한다기보단(완전히 동등한 건 불가능하지만) 시젤의 얘기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너는 글을 배운 이후였기에, 누군가의 말을 곱씹으며 통째로 외우는 일과는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언한다. 공주의 설화가 루시안의 유리성을 닮은 것과 달리 소년의 목소리는 내가 전할 영혼의 곡성과 유사했다.


*


황제의 외아들이었던 자바크는 동대륙 내의 입지가 좁았다.


황태자의 어미와 그 가문은 역모죄로 숙청당했으며, 현 황후와 황태자비를 배출한 외척이 제국에서 득세했다.


친부는 반역자의 피가 섞인 아들을 업신여기며 그의 유약함을 비웃었다.


황제가 자바크를 죽이지 못한 건 천륜을 넘어 그가 황제가 지녔던 문달의 표식을 계승했기 때문이었다.


문달의 표식이란 적룡의 피를 잇는 증표였다.


그것은 동대륙 황제의 자격이었으며 화기를 짙게 타고난 자식에게 자연 전승됐다.


아들의 목빗근에 나타난 검은 태양은 미친 황제의 불안감에 불을 붙였다.


5대륙의 영웅이라 불리던 황제의 영광은 젊은 날의 정의와 함께 퇴색되어 부서졌다.


그는 버려진 땅을 개척했고 그 위에 자신에게 대적할 가능성이 있는 돌연변이를 가두고자 했다.


그는 감옥의 재료로 가장 완벽한 물질을 원했고 각지의 현자들을 불러모았다.


현자의 탈을 쓴 광대가 황제 앞에서 말했다.


-이 돌은 아주 특별한 것이랍니다. 밤이 오면 모래더미로 흩어지기에 인간의 손으로 형체를 갖출 수 있고, 낮이 오면 태양의 빛을 흡수해 어떤 마법과 천기로도 깰 수 없는 완벽한 물질이 됩죠.


그의 농간에 황제는 대도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던 자바크는 이를 농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별과 함께 떠올라 일출과 함께 부서지는 바위섬과 그곳에서 천 년 도록 추앙받는 여신의 소문을 꺼내 들었다.


그는 두 개의 물질을 섞어 완벽한 감옥을 짓자고 아비에게 제안했다.


자바크는 아비의 횡포에 동조하지 않았고, 눈앞의 사내를 살리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북 대륙의 바위섬을 옮기는 일에 수년이 걸리리라 예상했고 두 물질을 섞으면 두 물질이 본래의 물성을 잃으리라 짐작했다.


아들의 훼방을 간파했지만, 황제는 기뻐했다.


그는 바위섬을 가져올 원정대를 꾸렸고 그 오합지졸과 함께 아들을 머나먼 땅으로 유배 보냈다.


밤의 물질을 남김없이 제국으로 가져오기 전까지 황성에는 얼씬도 말라며 아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대신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태자는 결국 오백 명 남짓의 병사를 이끌고 귀향길에 올랐다.


신이란 무엇일까. 밤의 여신, 달은 영검으로 이어지는 제 삶이 가혹했다.


여인의 태를 통해 수많은 생을 반복한 달은 어느 생도 신전을 벗어나지 못했다.


생모는 어린 그녀를 광신도에게 빼앗겼고 그녀의 연인들은 미친 추종자에게 살해당했다.


밤마다 초월자로 각성하는 그녀는 낮이 오면 제 삶을 지킬 능력조차 없었다.


신전에 갇힌 그녀는 제 성역 안에서 자라고 늙었으며 모든 생에는 불멸의 기억이 함께였다.


용의 후예조차 그녀의 영역에서는 제 천기를 펼칠 수 없었다.


자바크는 속내를 숨기고 저들을 여신의 소문을 따라온 방랑자라 소개했다.


그는 성역에 터를 내린 다른 인간처럼 매달 재단에 재물을 바쳤고, 외로운 달은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달은 그와 거래했다.


적룡의 후예인 그가 그녀를 일 년간 보호해주면, 그가 원하는 걸 주겠다는 구두 계약이었다.


그는 달과 함께 주변 섬을 여행했다.


달은 그녀를 존재하게 해주는 바위섬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었지만, 주변 섬을 전부 둘러보기에도 일 년의 시간은 짧았다.


약속의 날이 다가왔고 신전으로 되돌아간 여신이 성역을 일시적으로 거뒀다.


그 틈을 타 황자의 병사들이 신전의 모래를 옮겼다.


바위섬의 본질은 달을 존재하게 해주는 생명석이었다. 그것이 없어지자 달의 몸은 서서히 모래로 흩어졌다.


몸이 부서지는 와중 달은 바퀴 자국을 따라갔고 마침내 자바크에게 다다랐다.


그의 앞에 섰을 때 그녀의 백발은 부서지고 그녀의 조각난 얼굴에는 입술만 남아있었다.


-인사를 잊었네. 고마워, 자바크.


동방으로 귀환한 황자는 모든 수확물을 아비에게 바쳤지만, 황제는 달의 돌에 만족하지 못했다.


밤의 신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들에게 촛대를 집어 던졌다.


황제가 공식 석상에서 손찌검하는 일은 잦았지만, 황자는 그날로 제국을 떠나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않았다.


그는 왜 동방을 떠났을까.


결국, 황태자의 이름을 버릴 것이면서 왜 그녀를 죽였고, 그녀의 돌을 아비에게 넘겼는가.


사람의 마음이란 그 겹이 너무도 많아, 때로는 직접 갈라봐야만 알 수 있다.


“호우야, 너 울어?”


너는 눈에서 흐르는 핏물을 대충 닦으며 변명했다.


“내가 우는 건 아니야. 내 눈에서 나오지만.”


그녀가 뺨에 엉겨 붙은 검붉은 눈물을 엄지로 쓸었다. 너는 벌게진 얼굴을 뒤로 빼며 손길을 피했다.


“호우, 너 어젯밤 일 기억하는구나?”


“그걸 어, 어떻게 까먹어?”


네가 버벅대자 소녀는 작게 응얼댔다. “잘만 잊던데.”


“무슨 생각 했어? 내 얘긴 전혀 안 듣고 있었네.”


너는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마차 내부는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하얀 화폭에 살림을 즐기는 귀족의 모습이 담겼다.


한가로운 풍경은 점점 붉은색으로 물들고 손수건을 꺼내 든 공주가 곁에 앉았다.


“호우는 호족치곤 감정표현이 참 다양하다니까.”


저주받은 호족에게 감정은 사치였다. 그들은 슬플 때면 눈물 대신 핏물을 흘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피눈물이 검게 굳어버리기 전, 그녀가 너의 얼굴을 닦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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