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상츠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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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작품등록일 :
2012.09.2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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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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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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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상츠모사][12장 “선택지가 없는 선택” - 20 / 에필로그]

DUMMY

[판상츠모사][12장 “선택지가 없는 선택” - 20 / 에필로그]




리체의 인상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신경 쓰지 말자.


“아, 그런 건 아니고...”


라미는 잠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제야 자기가 뭔가 멍하니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냥... 먹기가 아까워 보일 정도네.”


라미는 약간 더듬거리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라미는 수저조차 집지 못한 채 멍하니 그 접시를 바라보고 있는 참이었다. 흠, 두 명이 연달아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왠지 내가 미적인 안목이 없는 바보가 된 느낌인데.


“그렇죠? 음식이라기보다는 예술품 같지 않아요?”


리체는 애써 의기양양한 표정을 감추려는 티를 내면서 라미에게 슬쩍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라미는 리체가 자신에게 말을 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잠시 흠칫 굳었다. 그러나 라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금방 그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었다.


“맞아, 원래 공화국의 음식은 눈으로도 먹는 걸로 유명하지.”


“뭐로 먹는다고?”


분위기상 짐작은 했지만, 둘 다 약속이나 한 듯이 내 볼멘 중얼거림은 깔끔하게 무시하는 바람에 나는 제법 민망해졌다. 젠장.

흠,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나는 약간 삐딱한 시선으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가운데 있던 그 뭐냐, 먹을 수 있는 부분은 내가 이미 먹어버렸기에 원래 나왔던 모양이랑 좀 다르긴 하지만... 난 아무리 봐도 먹을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아보여서 음식이라는 느낌은 안 드는데.

나한테는 그냥 이런 포도주처럼 알기 쉬운 게 좋다구. 이건 병이랑 뚜껑 빼고는 다 먹으면 되잖아. 나는 내 옆에서 하인이 따라주고 있는 붉은 포도주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이것 역시도 잔은 몹시 화려하지만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부루퉁한 느낌으로 잔을 두어 번 돌려봤더니, 눈치 빠르게도 라미는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원래 나라 자체가 이래.”


“나라 자체가?”


“공화국 문화는 이런 쪽으로 워낙 발달되어 있으니까.”


“이런 쪽?”


“비단 이런 음식만 말하는 게 아니라, 전부.”


“전부?”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게 나을까.”


“모든 것이라니?”


설명은 설명인 것 같은데 설명 같이 들리지가 않는 걸. 그러나 라미는 그런 내 질문에도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다시 평소와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온 라미는 표정만큼이나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공화국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에 대한 것들에 관심이 많아.”


“...뭐?”


“현실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관심이 많지. 철학, 인문학, 사회학, 과학 등등은 물론, 각종 실용적인 기술에서 문화예술 같은 분야까지.”


거기까지 중얼거린 라미는 뭔가 빼먹은 것이 없나 하는 표정이 짓더니 별안간 한숨을 쉬었다.


“설명을 하니 오히려 범위가 더 좁아지는 느낌이네. 어쨌든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아.”


라미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멍한 기분이 되었는데, 뭔가 논리적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곰곰이 생각했고, 그리하여 곧 합리적인 의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잠깐, 그건 어차피 왕국도 마찬가지잖아? 왕국 역시도 학문이나 기술 같은 것에는 관심 많을 거 아냐?”


게다가 이건 제국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러나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내 질문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공화국은 제국이나 왕국과는 달라.”


“응?”


“말했다시피 나라 자체가 그래. 사회 자체가 정말로 인간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회야.”


라미는 눈앞에 놓인 전채 접시를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머리를 끙끙 굴린 끝에, 논리적인 관점에서 내가 이 시점에 던져야 할 질문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인간에게만 관심이 있다고?”


내 질문에 라미는 이렇다 할 표정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눈이 마주친 순간, 라미는 입술을 움직여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공화국은 바다에는 관심이 없지.”


“뭐?”


갑자기 뜬금없이 등장한 바다라는 단어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웬... 바다?


“왕국이나 제국과 달리, 공화국은 바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사회 역시도 그렇고, 국민들 역시도 그렇고.”


그렇게 중얼거린 라미는 다시 접시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공화국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이렇게 인간과 관계된 것들뿐.”


라미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런 대답을 들은 나 역시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잠자코 입을 닫고 있었다.


“라미 님.”


그런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입을 다물고 있던 리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바다는...”


리체는 그렇게 먼저 운을 떼고는 라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인간과 관계없는 것이 아니에요.”


라미는 담담한 시선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리체를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은 평온했지만, 그걸 지켜보고 있는 나는 왠지 조금 불안해졌다.


“그래. 사람마다 시선이 다른 거니까.”


라미는 가볍게 수긍하며 순순히 시선을 돌렸다. 의외로 선선히 라미가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둘의 대치상황은 금방 끝났...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말이야.”


라미는 그렇게 다시 입을 열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나는 인간의 이런 부분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


그 순간, 어쩐지 그 이야기가 쓸쓸하게 들린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착각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라미의 손끝이 닿는 부분을 나도 모르게 주시하고 있었다.

라미는 손을 뻗어 하얀 식탁보 가운데에 놓인 작은 장식품을 건드렸다. 아니, 단순히 건드렸다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좀 더 섬세하고 기계적인 손놀림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뭔가 장치를 조작한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라미가 상자 옆에 붙은 작은 손잡이 비슷한 것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면서 별 생각 없이 옆에 놓인 포도주잔을 집어 들었다. 흠, 뭘 하려는 걸까? 그리고 내가 그런 의문을 품은 순간이었다. 라미의 손길 끝에 굳어있던 장식품이 살며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프허흡?”


단순히 장식품이라고 생각했던 작디작은 인형이 반짝 눈을 뜨는 순간 나는 그만 깜짝 놀라 술을 숨구멍으로 삼키고 말았다. 당연히 기침이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목구멍에서 이어졌으나, 그렇게 눈을 뜬 인형은 그런 내 콜록거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약간은 딱딱한 동작으로 자기 옆에 놓여있던 현악기를 집어 들었다.


“아...?”


콜록거리느라 명멸하는 시야 사이로 리체가 살짝 놀란 표정을 한 채 입술을 살짝 벌리는 장면이 들어왔다.


“이건...?”


나는 억지로 크흠크흠 목을 울려 기침을 추스르고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스윽 닦았다. 그렇게 간신히 의식을 수습한 나는 그제야 약간 정신을 차리고는 눈앞의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내가 신경을 써야 할 대상이 눈앞의 인형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내 귓가에 들리는 건...


“음악이... 나오네요?”


리체가 여전히 놀란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인형이 움직이는 건 그렇다 치고, 인형에서 음악이 나오... 아니, 인형 밑 상자에서 음악이 나오는 걸 보면 이건...

라미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래. 자명금이야.”


“아...”


리체의 얼굴에 가벼운 깨달음이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눈을 한 번 깜빡거리고는 맑은 소리를 내고 있는 자명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명금...?”


“태엽 장치를 써서 소리를 내는 거야.”


아니, 그런 의미로 중얼거린 게 아닌데. 나는 라미의 대답에 약간 뚱해져서 눈앞의 자명금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많이 정교해졌네.”


라미는 그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살짝 턱을 괸 채 아련한 눈빛으로 음악이 나오고 있는 자명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어쩐지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잠시였다. 옆에서 넋이 나간 듯 그 자명금을 쳐다보고 있던 리체가 갑자기 문득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더니 도리질을 붕붕 하고는 찌릿하는 눈빛으로 라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뭐죠?”


“그런 건 없어.”


“네?”


“마침 여기 있어서 그냥 한 번 켜봤을 뿐이야.”


어...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그런 결론을 내리려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리체 역시도 라미가 저렇게까지 담담하게 이야기하니 약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렇든 아니든, 라미는 아직도 맑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는 자명금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에 얼마나 머물지는 모르겠지만...”


자명금 소리가 묻히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에블도트 학원 앞을 들러보는 것도 좋을 거야.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거길요? 왜죠?”


리체가 약간은 가시가 돋아있는 말투로 되물었다. 그러나 라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질문을 던진 리체를 잠시 주시하다가, 슬쩍 지나가는 듯 답했다.


“공화국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볼 수 있을 거야.”


어쩐지 이야기가 선문답으로 흘러가는 듯한 느낌인데. 그러나 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귓가 뒤쪽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즉각 약간 고양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령께서 오고 계십니다.”


어?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런 내 귓가로 라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하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저 인간을 보고도 알 수 있긴 하겠지만.”


분위기가 갑자기 부산해진다. 누구도 허둥지둥하지 않지만, 방안의 공기가 어쩐지 조금 갑갑해진 것으로 나는 공화국에서 총령이라는 위치가 갖는 힘을 알 수 있었다.


“핀 군.”


“네?”


블라도스 씨도, 알데가르트 시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걸어와 있었다.


“같이 맞이하러가세.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니 크게 격식을 차릴 것까지는 없겠지만, 어쨌든 우리를 초대한 주인이니.”


“네...”


나는 그 이야기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미 양, 인사라도 하시겠소?”


“저는 나중에 따로 하죠.”


라미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리고 그런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었는지 알데가르트 씨의 납득은 빨랐다.


“리체 양도 오시게. 어쨌든 같은 자리에 있으니.”


“아, 네.”


마치 유시아 공주를 맞이하는 것처럼, 약간은 긴장한 표정으로 리체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알데 씨와 블라도스 씨가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가자, 리체는 그럼 우리도 갈까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


“핀, 핀 님?”


“응?”


갑자기 리체의 표정이 황급히 굳었다.


“저기... 그, 그 옷...”


“응? 옷?”


리체가 입을 딱 벌리고 손가락으로 내 목덜미를 가리켰기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어?”


어?


“어라? 뭐지?”


목 근처 흰색 옷깃 부분에 뭔지 모를 빨간 액체가 흉물스럽게 얼룩져 있었다. 이건...


“아, 맞다. 방금 전에 내가 포도주 마시고 풉하고 뿜었...”


“그그그그그게 지금 문제가 아니잖아요! 총령님 뵙는 자리라고요!”


리체는 마치 혀라도 깨물 것 같은 속도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잠시 후 합하고 입을 막았다. 그리고 황급히 눈알을 굴려 좌우를 한 번씩 살폈고, 그래서 나는 간략히 소감을 말했다.


“목소리가 너무 커.”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오, 자연스러운 반말 좋... 으케케케케켁?! 리체가 손수건을 꺼내들고 내 목덜미를 격렬하게 닦아버리는 바람에... 아니, 긁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순간 지옥의 고통 속에서...


“총령님 입장하십니다.”


으아아아, 난 몰라~! 이런 표정을 지으면서 리체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분명 총령쯤 되는 녀석이라면 이런 겉모습 따위에 현혹 되지 않고, 나라는 인물의 큰 가치를 즉각 알아볼...”


리체가 울먹거리는 눈매를 한 주제에 내 입을 찢어버릴 듯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나는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아, 이것 참. 뭐 대단한 사람 온다고 이렇게들 서있으십니까? 사람 민망하게.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


둔탁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명료하게 바뀌는 순간, 연회실 안의 분위기도 확연하게 바뀌었다.

아, 들어왔구나...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리체의 눈치를 보면서도 문 쪽을 힐끔 거렸다. 어... 어쨌든 맞이하러 가야되지 않겠어?


“아...”


리체는 울상이 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리체 역시도 나와 마찬가지로 문과 나를 번갈아서 쳐다보더니, 결국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일단 최대한 닦아보세요. 인사는 제일 마지막에 하시구요.”


이게 닦는다고 닦아지겠냐? 그러나 내가 미처 그런 말을 꺼낼 틈도 없이 리체는 내게 손수건을 건네주더니, 그다음 바로 내 손목을 잡고 문 쪽으로 황급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야야! 이쪽 손에 손수건을 줬으면 반대쪽 손을 잡아야 할 거 아냐! 그러나 그 사이 이미 서있는 사람들은 인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번 사절 호위대장 가닐영 시도그라프입니다. 그리고 이쪽 계신 두 분이...”


“알데가르트 데 듀리필입니다. 제국원정군 총사령관입니다.”


“블라도스 가르쉔입니다. 제국원정군 마력전 사령관입니다.”


사람들에 가려서 총령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알데가르트 씨와 블라도스 씨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장면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에 맞춰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 반갑수다.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죠? 하긴 소속이 다르니 어쩔 수 있나. 저 공화국 총령 스나플리앙 아즈올시다.”


어라...? 나는 내 귓가에 들려온 꽤나 파격적인 통성명에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총령쯤 되는 사람이라면 격식을 꽤 차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가본데? 음,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저건 총령이 하기는 좀 품격이 낮은 인사 같은... 아, 그러고 보니 원래 성격이 좀 이상하다고 그랬던가?


“빨리 닦아요!”


리체가 속삭이듯 중얼거렸지만 귀에 대고 하는 소리라서 크게 들렸다. 그래서 나는 반쯤은 타의에 의해 강제된 채 손수건으로 내 옷깃을 닦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신경의 절반 정도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총령이라는 사람의 목소리에 가있었다. 총령이라면서 저런 품격 낮은 인사를 하는 놈이 대체 어떻게 생긴 놈인지 지금 당장이라도 보고 싶긴 하지만, 리체의 태도로 볼 때 일단은 이걸 적당히 닦아내는 척이라도 해야 될 것 같단 말이야.


“어쨌든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하셨수다. 이왕 온 거 푹 쉬다 가십쇼. 푹 쉴 시간이 있을는지는 모르겠다만. 하하하핫.”


어라, 그런데 잠깐만. 나는 손수건으로 내 옷깃을 닦다가 내 귀에 들려온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목소리가 엄청 젊네? 아, 잠깐 그런데 이 목소리...?

나는 무심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지만 내 앞에 알데 씨와 블라도스 씨가 서있었기에 총령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 저기... 핀 님? 리체 님?”


가닐영의 호명에 리체가 화들짝 놀라서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튀어나가 급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총령님을 뵙습니다. 핀 아이켈 님의 부관이자 이번 사절단 호위를 맡은 아델리체 나르노크입니다.”


“오오, 훌륭한 가슴을 가진 아가씨군요. 공화국 총령 스나플리앙 아즈입니다.”


화기애애한 인사 속에서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 잠깐, 대화가 뭔가 이상했는데?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깊은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버린 분위기 끝에 대화를 한 당사자인 리체의 떨떠름한, 아주 떨떠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총령님.”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하지만 반쯤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리즐렛 씨가 입을 열었다.


“응? 왜?”


“저... 먼 길 오신 손님이시니...”


“아, 그렇군.”


마치 모르기라도 했다는 듯한 반응이었...


“지금 보니 엉덩이도 매우 훌륭하군. 미안합니다. 제가 원래 여성을 보면 가슴부터 보자는 주의라서. 둘 다 알아보지 못한 나의 결례를 용서하시게나.”


다시 한 번 분위기가 굳었다. 어, 잠깐. 이건...


“꺄, 꺄아아악?!”


비명소리라고 하기에는 성량이 좀 작긴 했지만, 어쨌든 리체가 그런 짧은 비명과 함께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제야 나도 상황을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잠깐, 이게 총령이 한 말이라고? 그렇게 깨달은 사실에 내가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헤치고 총령 앞으로 걸어 나간 순간, 짧은 한 마디가 연회장 안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즈.”


어, 이 목소리는...?


“여전히 성격은 똑같구나. 좀 진중해질 수 없어?”


흔들리던 연회장 분위기가 그 목소리에 순식간에 차분하게 정돈되어 간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총령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문 앞에 선 인물을 잠시 응시하다가, 방금 전과는 조금 다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셨습니까. 유시아 공주님.”


“그냥 편하게 불러. 공식석상도 아닌데 뭘 딱딱하게.”


“그럴까?”


평온한 대화가 이어졌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같은... 아, 설마 진짜 아는 사이인가? 그제야 나는 엊그제 계속 안고 있던 작은 의문을 하나 해결할 수 있었다. 어째 시아가 계속 총령을 친숙하게 언급한다 했더니, 실제로 아는 사이였나 보군.

그러나 그 의문을 해결한 뒤에도 신경 쓰이는 점은 여전히 있었다. 잠깐, 그런데 이 목소리... 아무래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리체.”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유시아 공주의 시선이 칼같이 날아와서 리체를 향했고,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시선을 받은 리체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리체는 그 시선 덕에 당황함을 추슬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네? 아, 네.”


“미안, 원래 이런 녀석이야. 생각 안 하고 말하는 녀석이니 그냥 그러려니 생각해.”


“거, 표현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저 정도로 뻔뻔하면 어디 가서 굶어죽는 것도 힘들겠는데? 물론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시아 역시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원하는 대답을 주지는 않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생각 안 하고 말하는 건 맞잖아.”


“물론 그건 그렇다만.”


...일국의 대표끼리 하는 말 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었지만, 총령이라는 녀석은 그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저 어깨만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그리고 유시아 공주의 말이 이어졌다.


“그보다, 아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응?”


“네가 관심 있어 할 사람이 지금 네 뒤에 있어.”


“호오? 그래?”


약간 과장된 모양새로 유시아 공주의 말을 받아들인 총령이 그제야 뒤로 가볍게 돌아섰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총령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깜짝 놀랐는데, 총령이라는 사람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훠어어얼씬 젊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젊어도 되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


“인사해. 핀 아이켈이야.”


“그으래?”


스나플리앙 아즈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를 바라본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이상한 느낌의 실체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스나플리앙 아즈는 내 얼굴을 한 번 살피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묘한 미소였지만, 지금 내 신경은 그 미소에 가있지는 않았다.

젊다. 정말로. 아니, 젊은 정도가 아니라... 이건 어리잖아?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대가 되지 않은 앳된 얼굴이었다. 차라리 내 또래라고 하는 게 더 맞겠...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총령의 얼굴을 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어?”


어?


“응? 왜 그러시나?”


자, 잠깐? 이, 이 얼굴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스나플리앙 아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굴을 한두 번 손으로 만져보더니, 손을 보고는 어깨를 다시 한 번 으쓱했다.


“내 외모에 감탄하는 건 좋지만, 난 여자만 좋아하니까 이해해주면 좋겠군.”


그리고 그렇게 말한 녀석은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나는, 공화국 총령 스나플리앙 아즈.”


그러나 그렇게 호기롭게 내밀어진 손을 잡는 대신, 나는 멍하니 총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녀석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말도 안 되잖아! 믿을 수 없게도, 내 눈앞에서 자신을 총령이라고 소개한 녀석, 바로 스나플리앙 아즈는...


“저, 핀 님...?”


옆에서 가닐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여전히 녀석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끊임없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전이... 사전이 어째서 여기에...?


작가의말

예전 연재할 때 이러한 전개를 예상하신 분이 있었던 게 기억나네요.


13장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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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5] 23.09.21 27 1 20쪽
287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4] 23.09.20 27 1 20쪽
286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3] 23.09.14 30 1 19쪽
285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2] +1 23.09.09 31 2 26쪽
284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1] 23.09.08 25 1 23쪽
283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0] +1 23.09.03 30 2 21쪽
282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9] 23.09.02 28 1 22쪽
281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8] 23.09.01 30 1 21쪽
280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7] 23.08.30 33 2 21쪽
279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6] +1 23.08.29 33 2 27쪽
278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5] 23.08.28 35 2 17쪽
277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4] 23.08.27 30 2 19쪽
276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3] +1 23.08.26 34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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